# 38
“어떤가? 차도를 느꼈는가?”
“네에, 정말 많이 좋아지셨어요. 이젠 통증도 덜하시죠?”
“그럼. 그래서 살맛이 나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퇴원했으면 좋겠는데 의사 선생들이 놔주질 않네.”
노인의 얼굴엔 웃음이 배어 있었다.
“네에, 그러시군요.”
잠시 후, 지현을 불러들였다. 현수는 노인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다. 둘 다 너무나 기뻐한다.
그러는 동안 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지난 19일에 컴플리트 힐과 리커버리 마법을 시전해 치료했다.
다음날인 20일에 포션 열 병을 주었으니 오늘까지 다섯 병을 복용한 것이다. 그런데 암세포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나머지 다섯 병을 마시면 완치에 가까워져야 한다.
포션이 암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확인하기는 했다. 하나 날짜별로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흐음, 혹시 모르니 조금 더 주고 가야겠구나. 출장 가면 못 만날 테니.’
현수는 지현의 외조부에게 내일 오전에 출국한다면서 몸조리 잘하시라는 말을 드렸다.
노인은 섭섭해했지만 어쩌겠는가!
직장인이 회사의 명을 받아 출장 간다는데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권지현도 내놓고 섭섭해했다.
현수가 병실을 나서자 지현도 따라나선다. 로비까지 배웅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 마음이 따뜻하다고 느낀 현수는 병원 로비의 커피숍으로 갔다.
그리곤 포션 열 병을 추가로 더 주었다.
“전에 드린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기는 해요. 그래도 혹시 몰라 여분으로 드리는 겁니다. 이 중 두 병은 더 드시도록 하고 열두 병째 드시고 나면 CT 촬영을 해보세요.”
“네.”
“암세포가 없어졌다고 하면 더 드셔봤자 도움이 안 될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계속해서 복용하도록 하세요.”
“정말 고마워요. 바쁘실 텐데 이처럼 신경 써주시는데 저는 현수 씨에게 아무 것도 드릴 게 없네요.”
“뭘요. 전 괜찮습니다. 사실 지현 씨 외조부님이 나오는 방송을 본 적이 있어요. 그때 진짜 존경받을 만한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 도와드리고 싶어서 이런 것이니 마음 쓰지 마세요.”
“그러셨군요. 그래도 고마워요.”
“네.”
“근데 얼마나 오래 출장 가시나요?”
현수는 어디로 출장 가는지,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줬다. 놀라면서도 섭섭해한다.
“잘 다녀오세요. 제가 가끔 연락드려도 되죠?”
“네, 그러세요.”
권지현과 헤어진 뒤 차 문을 열고 막 출발하려는 찰나 전화가 걸려온다.
띠리리리잉! 띠리리링!
“여보세요.”
“아, 형님. 저 오광섭입니다.”
“네? 형님이라니요? 혹시 전화 잘못하신 것 아닙니까?”
현수는 29살, 오광섭은 30살이다. 그러니 이런 물음은 당연한 것이다.
“아닙니다, 김현수 형님. 오늘부터 저 오광섭은 형님을 영원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에구, 대체 무슨 일 때문입니까?”
“오늘 아버지가 정상인이라는 판정이 내려졌습니다.”
“아, 그래요? 그거 다행입니다.”
“형님, 대구로 한번 내려오십시오. 제가 거하게 쏘겠습니다.”
“이런, 나 내일 출장 떠나요. 아프리카로.”
“네에……? 언제 오시는데요?”
“글쎄요. 반년이 걸릴지 1년이 걸릴지 아직은 잘 몰라요.”
“섭섭하군요. 알겠습니다. 형님이 안 계시는 동안 형수님은 제가 잘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형수님이요?”
“네, 대구지방법원 검찰청에 근무하시는 권지현 형수님 말입니다. 제가 형님 오실 때까지 날파리 끼지 않도록 잘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현수는 아니라고 부인하려다 말았다.
역전회는 폭력 조직으로 출발하였지만 현재는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그래도 조직력은 무시 못한다. 손을 씻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언제든 기회가 생기면 되돌아갈 수도 있다. 그렇기에 부산의 칠성파 등에 협조 요청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보호해 준다면 안전하기는 할 것이다. 그렇기에 부인하지 않은 것이다.
“형님, 잘 다녀오십시오. 형수님은 저희가 책임집니다.”
“네에, 그럼 다음에 만납시다.”
“네, 형님.”
전화를 끊은 현수는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권지현을 자신의 애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게 괜히 웃겼던 것이다.
또한 한 살 많은 동생이 생겼다는 것도 우스웠다.
우미내로 되돌아온 현수는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차도를 물었다. 다행히 많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컴플리트 힐이나 리커버리 마법을 시전받지 못해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여 다시 전화를 걸어 포션 열두 병을 건네주었다.
세상 사람을 다 구할 수는 없다. 하나 가까이 있으면서 인연이 닿은 사람들은 돕고 싶다는 마음의 발로이다.
어머닌 짐을 싸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현수는 짐을 싸지 않았다. 마트 세 개가 아공간 속에 고스란히 있으니 짐 쌀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여권을 챙겨 들고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아버진 새벽부터 추씨 공방에서 기계를 가져와야 한다며 외출하셨기에 뵙질 못했다.
현수는 급여 통장을 어머니께 맡겼다. 매월 이체되는 월급을 찾아서 쓰라는 뜻이다.
어머닌 돈 한 푼 없이 외국에서 어찌 생활할 것인지를 물었다. 하여 회사에서 따로 돈은 준다고 얼버무리고는 떠났다.
그전에 현수는 서른여섯 병의 회복 포션을 어머니께 드렸다.
혹시라도 다치시는 일이 있거든 그때 드시라는 상세한 설명서도 드렸다. 이제 남은 것은 마흔두 병뿐이다.
“흐음, 먼저 프랑스 파리로 가야 하는군. 오늘이 금요일이니 내일 새벽에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인 킨샤사로 향하는 에어 프랑스를 타야겠군.”
회사에서 만들어진 일정표를 읽으며 비행기 티켓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출국 수속을 밟았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시계를 확인했다.
“출발하려면 세 시간쯤 남았군. 가서 뭣 좀 먹을까?”
두리번거리니 3층에 푸드 코트가 있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현수는 가방을 끌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때였다.
“오빠야!”
두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사람은 권지현이다.
“아니, 지현 씨가 여길 어떻게……?”
“배웅해 드리려구요. 저 괜한 걸음 한 거 아니죠?”
“네에, 고맙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어머, 아니에요. 저희가 더 고맙지요. 아버지께서 인사도 못 드렸다고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 전해달래요.”
“아이고, 아닙니다. 죄송하다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할아버진 현수 씨 배웅 가라면서 절 떠밀었어요.”
“괜찮으신 거죠?”
“그럼요. 정말 많이 좋아져서 병원에서도 깜짝 놀라요.”
“다행입니다. 쾌차하셨으면 좋겠어요.”
“네. 아마도 그럴 거 같아요. 다 현수 씨 덕분이에요.”
“무슨 말씀을…….”
“근데 출국하기까지 시간 있으시죠? 제가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어떠세요?”
“네, 그렇지 않아도 떠나기 전에 뭘 먹으려던 차입니다. 식사 같이 하십시다.”
“네, 제가 자주 가는 집 있어요.”
“그럼 그쪽으로 가죠.”
지현이 안내한 곳은 베니건스 마켓오였다. 둘은 몬테크리스토와 치킨 퀘사디아, 그리고 맥주를 주문했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어야 하니 건배나 하자는 뜻이다.
지현은 거듭해서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말하길 C&C 나이트클럽에서 자신의 부팅 요구를 세 번이나 거절해주어 고맙다고 한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인연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현수는 탑승 절차를 밟았다. 지현은 손을 흔들며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
너무도 예쁜 여인이 열성적인 배웅을 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미쳤다. 그리곤 이내 현수를 바라본다.
부럽다는 뜻일 것이다.
현수는 왠지 애인에게 배웅받는 기분이 되었다.
잠시 후, 현수를 태운 보잉747 비행기는 활주로를 박차고 나가 창공의 한 점이 되었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타보는 비행기다.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가 먹먹하여 답답함을 느꼈으나 이내 아래 세상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집들이 성냥곽만 하게 보이더니 곧 점처럼 작아 보인다.
시들해진 현수는 시트에 기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곤 덕항산에서 전능의 팔찌를 얻은 이후부터 지금까지를 천천히 더듬었다.
아르센 대륙에 첫발을 들였을 때의 상쾌함을 떠올리니 새삼 기분이 좋아진다.
알베제 마을의 처참하다 해도 좋은 열악한 환경을 생각하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때 그곳 사람들에게 피자, 호떡, 소주, 콜라, 환타 등을 베푼 일은 참 잘한 일인 것 같다.
멀린의 레어에서 가까운 곳이니 인연이 되면 그곳의 영주가 되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 마을을 떠나 올테른에 당도하기까지의 과정도 되짚어 생각해 보았다.
오우거, 오크, 고블린, 와이번 등 몬스터들이 정말 많았다. 그놈들을 대상으로 공격 마법 연습은 정말 실컷 했다.
대상 마법과 범위 마법을 교대로 시전해 보기도 했다. 덕분에 공격 마법은 능숙해졌다.
언젠가 팔찌의 보석이 검은색으로 변하면 또다시 그곳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가진 것이 많으니 많이 베풀자는 생각을 했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는 베풀기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람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영화 속 주인공 슈퍼맨보다도 더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은 것이다.
12시간에 걸친 비행 끝에 파리 드골 공항에 내렸다. 택시를 타고 머큐어 소르본 호텔로 향했다.
가보니 3성급 호텔이다. 어차피 하루만 자고 떠날 것이니 좋고 나쁘고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배정받은 룸에 가방을 두고 나와 시테섬, 퐁네프, 노틀담 성당 등을 구경했다. 그리곤 소르본 대학 앞 식당가에서 적당한 것을 먹었다. 생각보다 값이 싸서 좋았다.
콩고민주공화국행 비행기는 내일 아침 9시에 뜬다. 그렇다면 공항에 6시쯤엔 도착해 있어야 하기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모처럼 온 유럽인데 기껏 몇 군데 관광지를 둘러보고 배를 채운 게 고작이다.
다음날, 현수는 무사히 콩고민주공화국에 당도했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김현수입니다.”
현수는 자신의 이름이 쓰인 도화지를 들고 있는 사내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게. 이춘만 과장이네.”
“아, 반갑습니다, 지사장님!”
“그래, 먼 길 오느라 힘들었지?”
지사장은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다. 그런데 전혀 반감이 들지 않는다. 40은 분명히 넘었고 50에 가깝거나, 혹은 그 이상일지 모를 정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소 뚱뚱한 지사장은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지금껏 혼자였는데 드디어 부하 직원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아닙니다. 생각보다 훨씬 편하게 잘 왔습니다.”
“다행이구만. 한데 짐은 이게 전부인가?”
“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부족하면 사서 쓸 생각으로 조금만 싸왔습니다.”
순간 지사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찌 그 의미를 모르겠는가!
“하하, 농담입니다. 제 짐은 따로 화물로 부쳤습니다. 며칠 후면 당도하겠지요.”
“아, 그런가? 난 또. 여긴 뭐든지 부족한 곳이라네.”
“네에, 그렇군요. 근데 사무실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사무실……? 조금만 가면 있네.”
“아, 그래요?”
말이 조금이지 공항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 반이나 달렸다.
멀어서이기도 하지만 도로 사정이 나빠 속력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콩고민주공화국의 도로는 한국과 달리 붉은 빛이 나는 황토색이다. 전혀 포장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해 계속해서 덜컹거렸다. 천장에 머리를 몇 번이나 박고 나서야 시트를 뒤로 제치고 반쯤 누웠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사방이 담장으로 둘러싸인 슬레이트 지붕을 씌운 단층집이다.
1970년대에 시골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블록도 아닌 흙벽돌을 쌓아 만든 것이다.
지사장은 사무실 문에 걸린 자물쇠 네 개를 익숙한 솜씨로 땄다. 그러면서 말하길, 도둑이 너무 많다고 한다.
“들어오게. 겉보기엔 이래도 안은 제법 시원해.”
지사장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넓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약 50평 정도 되는 실내이다.
중간중간 기둥이 박혀 있는데 너무 가늘어서 제 역할을 할까 싶은 정도이다.
지사장의 말대로 그렇게 덥지는 않았다.
처음 슬레이트 지붕을 보았을 때 안은 찜통일 것이라 생각했다. 현수가 군 생활을 하던 곳에는 콘센트 막사가 있었다.
여름에 푹푹 쪘고 겨울엔 덜덜 떨었다.
그래서 굉장히 더울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왜 그런가 싶어 살펴보니 외벽은 이중벽인 듯하다.
벽과 벽 사이에 스티로폼이라도 끼워둔 모양이다.
천장을 보니 슬레이트가 아니라 샌드위치 패널이다. 그 위에 약간의 간격을 두고 슬레이트 지붕을 하나 더 얹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