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우리 회사는 건설회사인데 웬 신발입니까?”
“이건 내 개인 사업이야. 한국에서 땡처리하는 물건을 가져와 팔면 제법 짭짤하거든.”
“그래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우린 여기서 할 일이 없어. 회사에선 잠재력 타령을 하는데, 언제 그 잠재력이 발현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지금은 그 잠재력이 잠자고 있는 시기라는 거지.”
“……!”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순 없지 않나? 그래서 용돈이라도 벌 겸 이런 사업을 하고 있네. 자네도 가져올 수 있는 물건이 있으면 가져다 팔게. 눈감아줄 테니.”
이날 현수는 지사장과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 일은 유학을 보낸 자식 학비에 보태기 위해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엔 한국에서 땡처리 신발을 가져왔다.
워낙 물자가 귀한 곳인지라 며칠도 지나지 않아 들인 돈의 다섯 배가 넘는 대박을 쳤다.
다음엔 옷이다. 한국에서 촌스럽다 하여 외면받은 울긋불긋한 옷을 무게로 달아 사온 뒤 이곳에 풀어 떼돈을 벌었다.
그렇게 하여 번 돈으로 자식들 유학 비용에 보탰고, 노후를 위해 저축하는 중이라고 한다.
지사장이 한 일은 도덕성에 흠집 나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웃음으로 맞장구쳐 주었고, 대단하다고 추켜세웠다.
밤늦도록 셋은 맥주를 마시며 하하, 호호 했다.
마투바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상당히 주량이 셌다. 하나 어찌 사내들을 당해내겠는가! 10시쯤 너무 졸려 자야겠다며 갔다.
문이 닫히자 현수가 말을 꺼냈다.
“마투바 말입니다.”
“왜? 여자가 필요한가?”
“아이고, 그게 아니고요. 그냥 마투바의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이곳 공립학교 교사 월급은 대략 30달러 수준이네.”
“30달러요? 그럼 3만 원이 조금 넘는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대통령의 충견이라 할 수 있는 경찰의 월급도 10만 원을 넘지 않네.”
“그럼 마투바는요?”
“한 달에 200불을 주네. 그래서 절대 충성을 하는 중이지.”
“200불이요? 회사에서 책정된 금액이 그건가요?”
“아니. 물론 그보다 많지.”
“근데 왜?”
“더 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고 있네. 왠 줄 아는가?”
“왜죠?”
“돈을 더 주면 파리들이 꼬이기 때문이네. 그래서 마투바의 공식적인 월급은 20달러로 알려져 있네.”
“그래도…….”
“이곳 킨샤사의 별명이 뭔 줄 아는가?”
“도시에도 별명이 붙어요?”
“그래. 이곳의 별명은 ‘세계 성폭행의 수도’라네. 지난 일 년간 최소 8,300건에 이르는 성폭행이 있었지. 마투바에게 돈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언제 끌려 나가 성폭행당하고 돈까지 빼앗길지 모르는 일이네.”
“으으음!”
“그래서 마투바는 집과 사무실 이외엔 나가지 않네. 앞으로도 외부 심부름은 시킬 생각은 말게. 그리고 여자가 필요하면 마투바에게 말해보게. 자네를 마음에 두는 듯하니 어쩌면…….”
“지사장님!”
현수가 정색하자 이춘만 과장이 너털웃음을 짓는다.
“하하하, 마지막 말은 농담이었네.”
“…제가 이곳에서 할 일은 뭡니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회사 일은 할 게 없네. 아무런 지원도 없이 사람만 달랑 두 명 보내놓은 것이 전부인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으으음……!”
“그러니 내일부턴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여행을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게. 단, 믿을 만한 호위를 달고 다녀야 할 것이네. 시내에선 덜하지만 외곽으로 나가면 관광객은 좋은 사냥감이 되거든.”
“네, 알겠습니다.”
다음날 현수는 일꾼을 사서 커다란 상자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곤 공항에 가서 굴러다니는 수화물 꼬리표 하나를 주워왔다.
“헉! 이건… 기, 김치가 아닌가?”
“네.”
“이건 고추장, 된장, 막장에 쌈장까지?”
“조금 드릴까요?”
“그럼 고맙지. 하하, 하하하하!”
이춘만 과장은 현수의 짐 속에서 나온 물건들에 환장하는 모습이다. 아이스박스에서 별의별 것이 다 나온 때문이다.
물론 잘 상하지 않는 식품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냉장고 네 개를 가득 채우고도 상당히 많은 통조림들이 남았다.
소주도 몇 병 나왔다. 술 좋아하는 이 과장을 위해 어젯밤 아공간에서 꺼내 담은 것들이다.
한동안 같이 있어야 하는데 껄끄러운 것보다는 호의적인 것이 좋기에 내 편을 만들기 위한 포석이다.
알베제 마을에 물건을 풀어놓은 것도, 케이상단의 알론에게 호의적으로 대한 것도 모두 이러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아르센 대륙엔 아는 이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편을 들어줄 사람들을 만들어두어 나쁠 일이 무어 있겠는가!
그렇기에 퍼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베푼 것이다.
아무튼 현수의 짐 속엔 마투바를 위한 물건도 있었다.
선글라스와 머리띠, 샌들과 여러 장의 원피스가 그것이다. 심지어 생리대까지 준비되어 있다.
선물을 받은 마투바는 현수에게 다가와 와락 껴안기까지 했다. 그런데 몸에서 냄새가 나는 듯하다. 하여 슬쩍 샴푸랑 비누, 그리고 치약과 향수를 짐 속에 끼워 넣었다.
짐 풀기를 마친 후 현수는 훨씬 살가워진 이 과장과 마투바의 태도에 기분이 좋았다.
확실한 내 편이 이제 두 명이나 생겼기 때문이다.
“내일은 여기저기 둘러볼 생각입니다.”
“내가 호위 붙여줄까?”
“아니에요. 우선은 혼자 다녀볼게요.”
“위험할 텐데……. 총을 꼭 들고 다니게. 근데 자네가 말한 총은 아직 못 구했는데…….”
“일단 리볼버라도 들고 다녀보죠.”
“그러게. 하나 유의하게. 이곳 치안은 엉망이네. 킨샤사 밖으로 절대 나가지 말고.”
훨씬 살가워진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네, 알겠습니다.”
자동차를 몰고 킨샤사 거리를 샅샅이 누비며 사람들 사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한국과 비교해도 괜찮을 정도로 깨끗한 마트도 있지만 대부분 매우 어려운 삶을 사는 듯하다.
킨샤사의 인구는 1,500만에 육박한다. 하나 이 모든 인원을 수용하기엔 식량도 생활용품도 부족한 듯 느껴진다.
단편적인 현장 학습이지만 현수는 결론을 내렸다. 콩고민주공화국은 빈부의 양극화가 진행되는 곳이다.
물론 부자는 극히 드물고, 거의 대부분이 가난하다. 경제 구조보다는 잘못된 권력 구조 때문일 것이다.
되돌아오는 내내 이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심했다. 전능의 팔찌에 차원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의 마나가 모였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확인해 보니 검은색이어야 할 마나석은 여전히 회색이다. 아르센 대륙으로 가려면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제법 긴 기간 동안 무엇이든 해야 한다. 하는 일 없이 먹고 자고를 반복하고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거의 당도했을 즈음 결론을 내렸다.
기회의 땅이라 일컫는 아프리카에서 돈을 벌어보기로 한 것이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이제 그 가난을 자식에게 대물림해 주지 않기 위해 돈을 벌 생각을 한 것이다.
제일 쉬운 방법은 아공간의 물건을 팔아치우는 것이다. 하나 그럴 순 없다. 출처를 캐물으면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돈을 벌고 싶지는 않다.
하여 사무실 앞에서 차를 돌렸다. 킨샤사에서 콩고민주공화국의 제3도시라 할 수 있는 항구도시 마타디로 가는 길 역시 비포장이었다. 앞서가는 트럭엔 흑인들이 가득 타고 있다.
정기적으로 오가는 버스 같은 교통편이 없어 돈 내고 타는 것이다.
길가엔 대통령인 조셉 카빌라의 사진이 유난히도 많이 뜨인다. 수도인 킨샤사를 비롯한 서부 지역에 지지기반이 약해서라고 하는데 좋아 보이지 않는다.
내걸린 사진 하나를 줄이면 굶주린 아이 셋은 허기를 면할 세상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달려 마타디에 당도하였다.
수많은 물품이 하역되고 선적되는 항구이기에 상공업이 활발한 곳이다. 이곳에 오기 전 출력해 온 자료엔 수확한 커피와 카카오를 수출하는 무역항이라고 되어 있었다.
아무튼 최근 들어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이 커져 큰 도시로 변모하는 중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나 이는 겉모습만 그렇다.
항구의 뒤쪽은 1970년대 초반 한국의 산동네 같은 모습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도로 포장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역장에는 컨테이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런데 바쁜 발걸음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적체 현상은 보나마나 항만 관계자의 업무 태만 내지는 뇌물과 관련되어 있다. 수입업자들이 돈을 주지 않으면 반출 허가 지연 등으로 골탕 먹이고 있는 것이다.
자료를 보니 마타디 항구는 20피트형 컨테이너 3,500개를 수용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쌓여 있는 컨테이너만 8,000개는 됨 직하다. 이쯤 되면 항만이 아니라 하치장이다.
“어딜 가나 이놈의 부정부패는… 쯧쯧!”
자신의 잇속만 챙기려는 항만 관계자들의 속셈이 뻔히 보인다. 그렇기에 나직이 혀를 찼다. 그러면서 중얼거린다.
“내가 이 항구를 이용할 때에도 이런 일을 벌이면… 마법의 무서움을 깨닫게 될 거야.”
사무실로 돌아오니 마투바가 시원한 주스를 건네준다. 한국에서 가져온 분말 오렌지 주스를 얼음물에 탄 것이다.
“마투바, 그거 맛있어?”
“네, 정말 맛있어요. 이런 맛을 보게 해줘서 고마워요.”
“고맙긴, 근데 지사장님은 어디 가셨니?”
“네, 마타디 항구에 가셨어요.”
“그래? 무슨 물건 들어왔대?”
“네, 한국에서 보낸 물건이 도착했다고 해서 가셨어요.”
“그래? 언제 들어오는데?”
“글쎄요? 한 나흘쯤 있으면…….”
“나흘? 무슨 통관 작업을 나흘이나 해?”
“오늘은 돈 주고 서류 작업하고, 내일은 하역 작업하고, 모레는 검사하고, 나흘째 되어야 물건 가져와요.”
“돈 주고 서류 작업 하다니?”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
“뇌물 안 주면 물건 안 줘요.”
“으으음……!”
현수는 조금 늦게 올 것을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랬다면 지사장을 만났을 것이고, 어떻게 통관되는지를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 미스터 킴, 한국에서 팩시밀리 왔어요.”
“아! 그래?”
“여기요.”
마투바가 건넨 팩시밀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보고픈 현수 씨에게!
콩고민주공화국엔 잘 도착하셨는지요?
부디 그러셨기를 바랍니다.
적도 바로 아래라 몹시 더울 텐데 건강에 유의하셔요.
오늘 아침 할아버지께서 퇴원하셨답니다. 병원에서는 할아버지에게서 일어나는 기적적인 현상에 깜짝 놀라는 중이에요.^^
연세가 많으셔서 항암 치료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절로 암세포가 줄어드는 것만으로도 기적인데 어제 했던 검사에선 아예 암세포가 발견조차 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호호! 너무 기뻐요!^^
전 세계 의학회에 보고할 만한 일이라면서 조금 더 입원해 달라고 했지만 할아버지가 답답하다 하셔서 퇴원하셨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 머리카락을 모두 뽑아 현수 씨의 신발이라도 만들어 드리고 싶을 정도로 고맙습니다.
유난히도 저를 예뻐하셨던 할아버지께서 다시 건강한 몸이 되셔서 무엇보다도 기쁘답니다.
참, 요즘 출퇴근 시간마다 역전회 깍두기 아저씨들이 저를 보호하고 있어요. 현수 씨를 형님으로 모시기로 한 오광섭 씨의 배려라고 합니다.
덕분에 편한 출퇴근을 한답니다. 전엔 한두 명씩 찝쩍거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알아서 차단해 주니 고마운 거지요.
이것 역시 현수 씨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고마워요!^^
참, 오대준 씨도 쾌차하셨다고 합니다. 그 일 역시 현수 씨 덕분이겠지요.
어떻게 해서 그런 능력을 갖게 되셨는지는 여쭙지 않겠습니다. 대신 현수 씨 덕에 할아버지의 건강을 되찾은 것에 대한 보답을 할 기회를 꼭 주셨으면 합니다.
검색해 보니 그쪽 사정이 열악한 듯한데 혹시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최선을 다해 보내 드리겠습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언제 오실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오시는 그날, 공항에 나아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현수 씨의 모습을 보고 싶거든요.
2013년 1월 29일
현수 씨께 너무 큰 은혜를 입은 권지현 올림.
날짜를 보니 어제 보낸 것이다. 이곳 사정이 어떤지 짐작될 일이다.
팩시밀리의 내용이 모두 좋은 소식을 알리는 것이었기에 현수의 얼굴엔 흐뭇하다는 미소가 배어 있다.
이런 모습을 마투바가 빤히 바라본다.
“애인한테서 온 편지? 미스터 킴, 애인 있어요?”
“응? 애인 아니야. 그냥 아는 사람한테서 온 편지야.”
“그랬구나. 미스터 킴, 시원한 맥주 줘요?”
“그래. 부탁해도 될까?”
“미스터 킴이니까 부탁해도 돼요. 이제 지사장님은 안 줄 거야. 잠깐만 기다려요.”
이춘만 과장의 말대로 어쩌면 마투바가 현수를 점찍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 현수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저 같이 일하는 동료로서 친하게 지내려고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