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마투바가 맥주를 가지러 간 사이에 현수는 팩시밀리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었다.
워드 프로세서로 타이핑한 것이 아닌 손으로 쓴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씨 참 예쁘게 쓴다.
“보고 싶은 현수 씨에게? 후후, 후후후!”
현수는 나직이 웃음 짓고는 팩시밀리를 잘 접어 수첩 뒤에 끼웠다. 이런 글귀로 시작되는 편지는 생전 처음이다.
초등학생 때에도 ‘보고 싶은 현수에게’라는 글귀로 시작하는 편지나 쪽지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괜히 그래야 할 것 같은 생각 때문에 보관한 것이다.
마투바가 가져온 맥주를 마시고 잠시 이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적응이 덜 되어 그러는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책상 위에는 다이어리 비슷하게 생긴 것이 펼쳐져 있다. 보아하니 뭔가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11월 7일 용산전자상가 임지훈 삼성 20인치 텔레비전 11.
11월 16일 LG 29인치 13, 삼성 20인치 15.
12월 14일 LG29 11, 삼성29 23.
…….
2013년 2월 10일까지 LG20 16, 삼성29 14.
내용을 보던 현수는 이게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마투바!”
“왜요?”
“지사장님, 텔레비전 가지러 마타디에 가신 거야?”
“아마 그럴 거예요. 한국에서 그거 부쳤다는 팩시밀리가 며칠 전에 왔거든요.”
“그래? 알았어.”
이춘만 지사장은 전자제품까지 손을 뻗은 모양이다.
‘돈을 벌기로 했는데 난 무얼 취급하지?’
현수는 밤 깊도록 고심하다 잠들었다. 물론 자기 전에 마법으로 실내 기온을 떨어뜨렸기에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날, 현수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마타디로 향했다.
킨샤사에서 350㎞나 떨어진 곳이다. 한국에서라면 네 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 거리이건만 일곱 시간이나 걸렸다.
비포장이라곤 하나 잘 닦인 도로였기에 그 시간만큼 걸린 것이다. 다른 곳이었다면 아마 열 시간 이상 걸렸을 것이다.
‘1월 2일 지구로 왔으니 오늘로서 딱 30일이 지나는군. 아드리안 공국은 아직 괜찮겠지?’
현수는 멀린의 부탁을 바로 들어주지 못함이 약간 미안했다.
‘이실리프 마법사들이 총출동했다고 뻥쳤으니까. 아니, 뻥은 아니지. 총출동한 것은 맞지. 나 하나라서 그런 거지.’
스스로를 자위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중얼거렸다.
‘케이상단의 알론과 용병들이 제대로 소문을 내주었다면 세 나라에서 함부로 대하진 않겠지?’
실제로 현수의 이런 생각은 적중하고 있다.
* * *
기세 좋게 아드리안 공국으로 쳐들어가던 미판테, 쿠르스, 그리고 엘라이 왕국은 이실리프의 마법사들이 대거 하산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숨죽이고 있는 중이다.
소문을 듣자마자 이들 세 나라는 일단 진군을 멈췄다. 조심해서 손해 볼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곤 소문의 근원을 쫓아 케이상단의 알론을 비롯한 상인들과 용병들을 접촉했다.
이들이 소속된 국가는 테리안 왕국이다. 하여 테리안 국왕의 협조를 얻어 이들 모두를 왕궁으로 불러 모은 것이다.
그리곤 이실리프의 마법사가 어떤 실력을 보여주었는지에 대해 꼼꼼하게 물었다.
당시의 상황, 대항했던 몬스터의 숫자, 발현된 마법의 구체적인 모습 등을 세세하게 묻고 또 물었다.
알론을 비롯한 상인과 용병들 모두 개별적인 심문을 받았다. 말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으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나중엔 대질 심문까지 했다.
이 자리엔 세 나라의 고위 마법사들이 모두 참석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현수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다.
첫째, 바세른 산맥에서 하산하였다.
이실리프 마탑이 바세른 산맥 어딘가에 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사실인 것이다.
둘째, 알베제 마을에 며칠 간 머물렀다.
이것을 파악하고는 곧장 알베제 마을로 몰려갔다. 그곳에서 마레바 촌장을 비롯하여 엘베른 등을 심문하였다.
처음엔 고압적인 자세였으나 보존되어 있는 샤벨타이거의 사체를 보고 난 뒤엔 태도가 싹 바뀌었다.
어쩌면 이실리프 마탑의 관심 내지는 보호를 받는 마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때문이다.
촌장이 소주병과 한국산 천일염을 보여주었다면 더욱 확실했을 것이다. 하나 촌장은 이를 끝까지 숨겼다.
보여주면 빼앗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엘베른이 데리고 있는 샤벨타이거의 새끼를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절대 복종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아직 새끼이니 길들일 수는 있지만 엘베른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고 멈출 정도까지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심문해 보아도 하인스 마법사가 이실리프 마탑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상당히 강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세 나라 마법사들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러설 정도의 경지에 있는 듯하다.
샤벨타이거의 내부를 진동시켜 단번에 죽일 만한 실력을 가진 마법사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이후 사람을 풀어 이실리프 마법사들의 행방을 찾았다.
하나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세상 어디에서도 이실리프 마탑 소속 마법사들의 움직임은 없었다.
만일 아드리안 공국에 벌써 스며들어 있다면 공격하다 전멸당할 수 있다.
대부분의 마탑은 마법사 300여 명 정도를 보유한다.
이실리프 마탑 또한 그러하다면, 그리고 현수가 보여주었던 윈드 블레이드를 모두 시전할 수 있다면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수만의 병사들이 도륙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불과 1∼2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기사라 하여 다를 바 없다.
갑옷을 걸치고 있기에 화살 따윈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 샤벨타이거를 죽인 쇼크 웨이브라면 일순간에 끝이다.
미판테 왕국과 쿠르스 왕국, 그리고 엘라이 왕국은 각기 소드 마스터들을 보유하고 있다. 미판테엔 세 명, 쿠르스에도 세 명, 엘라이 왕국엔 다섯 명이나 있다.
이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한참을 고심한 끝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다.
“국왕이시여, 만일 이실리프 마법사가 하나라면 저희가 어찌 감당하겠으나 그런 마법사가 열 명 이상이라면 저희가 전멸당할 수도 있사옵니다.”
이 대목에서 이야긴 끝났다.
이들이 이런 결론을 내린 이유가 있다. 마법사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9장 짜식들, 맛 좀 봐라!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 후작께서 창안하신 마법은 아르센 대륙의 다른 마법과 궤를 달리하며, 같은 써클 마법이라도 그 위력이 세 배 이상 강하다.”
오래전, 멀린에게 모멸감을 안겨주었던 카이엔 제국의 영광의 탑이란 마탑의 탑주였던 7써클 대마법사 헬리온 드 스타이발 후작이 공식석상에서 한 말이다.
헬리온 후작은 그 자리에서 예전에 멀린 후작에게 범했던 잘못을 처절히 뉘우치고 있다면서 무릎까지 꿇었다.
마탑의 탑주가, 그것도 7써클에 이른 대마법사가 공식석상에서 멀린에게 용서를 청하며 무릎을 꿇은 것이다.
만일 이실리프 마탑 마법사들이 세 나라의 수도에 스며들어 있다면 더욱 큰일이다.
알론은 만일 아드리안 공국에 위해를 가할 경우 신의 징벌에 해당하는 궤멸적인 재앙을 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왕족과 귀족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며 백성들 모두 노예가 될 것이라 했다.
시전되었던 마법들을 확인해 보니 허풍이 아닌 것 같다.
오우거 다섯 마리를 단 한 번에 내부를 진동시켜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때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저 하인스 대마법사가 입술만 달싹였을 뿐이라 한다. 어쩌면 언령 마법이 시전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령이란 중간계의 조율자인 드래곤만의 전유물로 마법 구현을 위한 수식 계산이나 영창 없이 말로만 마법이 시전되는 것이다.
이는 9써클에 해당하는 마법이다. 그리고 멀린이 9써클이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소문이다.
이런 상황이니 어찌 아드리안 공국을 집어삼키겠다고 하겠는가! 하여 일단 진군을 멈춘 것이다.
한편, 아드리안 공국에선 환호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이실리프 마탑에서 공국을 구하기 위해 하산했다는 소문 때문이다. 또한 세 나라가 쫄아서 진군을 멈춘 때문이기도 하다.
국운이 다하는가 싶었는데 기적적으로 회생한다 생각하니 어찌 환호성이 터져 나오지 않겠는가!
세 나라가 주춤하고 있는 동안 그간 포기하고 있던 재건 작업을 하는 중이다.
새로운 기사단장을 뽑고, 기사들을 수련시키고 있다.
마탑에서는 모든 마법사들이 마법 연구에 한창이다.
미구에 당도할 이실리프의 마법사들로부터 교육받을 영광을 누리기 위함이다.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 역시 난리가 벌어졌다.
수백 년 만에 주인 될 사람들이 온다는 소식 때문이다.
언제 올지 모르기에 대청소를 하고, 몸단장을 하느라 소란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 깊은 탄식을 내는 곳들도 있다.
백작가 내지는 후작가로 시집간 전대 이실리프의 여인들이 내는 탄식이다. 몇 년만 더 빨랐다면 하는 생각 때문이다.
* * *
“여전하군!”
하역 작업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화물을 인수받아 떠나는 차들은 매우 드물다.
“지사장님은 어디 계시지?”
두리번거리며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근처 술집들을 뒤졌다. 아직 한낮인데도 이춘만 과장은 만취해 있었다.
“에이, 쉬펄! 개새끼들!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어라? 왜 이러시지?’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들려온 중얼거림에 현수는 멈췄다. 그리곤 이 과장의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뭐? 한 대당 1,000달러를 내라고? 개새끼들, 그 텔레비 한 대에 800달러 받는데. 에이, 쉬펄! 더러운 새끼들!”
보아하니 통관 담당자가 뇌물을 요구한 듯하다. 그런데 뇌물치곤 그 액수가 많다.
한국에선 2012년 12월 31일 새벽 4시를 기해 아날로그 방송 송출이 끝났다. 하여 기존의 브라운관 형식의 TV는 컨버터를 달지 않으면 방송을 수신할 수 없다.
그 결과 사용하던 중고 텔레비전이 쏟아져 나왔다.
LG나 삼성, 대우전자 등에선 일찌감치 이에 대한 대비를 했다. 하나 이미 시장에 풀렸으나 팔리지 않은 TV가 제법 있다.
재고 상품 또는 전시 상품이 이에 해당된다.
이춘만 지사장은 용산전자상가에서 일하는 지인에게 부탁하여 이런 텔레비전을 이곳에 들여와 팔았다.
대당 매입 가격은 4만 원 선이다. 전자상가의 지인은 여기에 4만 원의 이윤을 붙여 이 과장에겐 8만원에 넘겼다.
이것을 배에 실어 보내면 거의 45일 만에 당도한다.
여기에 관세와 국영 통운비, 그리고 항구 사용료까지 더하면 들어가는 총 비용은 대당 16만 원 정도 된다.
여기까지는 적법 절차를 거치는 것이기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 문제는 마타디 항에 도착한 이후부터이다.
통관을 결정하는 사람은 노골적인 뇌물을 요구한다.
만일 이를 거절하면 갖가지 트집을 잡아 질질 끈다. 그러면 비싼 창고 사용료가 더 들게 되고, 벌금까지 부과된다.
그런데 창고 사용료와 벌금은 완전히 지들 마음대로이다. 물론 정해진 법이 있지만 그건 보여주지도 않는다.
남는 것은 자기들끼리 나눠 먹기를 한다.
오늘 이춘만 지사장은 LG, 삼성 텔레비전 50대씩을 수령하러 왔다. 그런데 대당 1,000달러씩 뇌물을 요구한다. 100대이니 10만 달러, 한화로 약 1억 원 이상을 요구한 것이다.
전에도 뇌물을 주고 빼오곤 했다. 그때는 대당 10달러 정도를 줬다. 대수도 얼마 되지 않아 기껏해야 30대 정도 되니 300달러, 즉 30만 원 정도를 뇌물로 준 것이다.
그런데 오늘 통관 절차를 밟기 위해 왔더니 담당자가 바뀌었다. 뚱뚱하고 느물느물하게 생긴 놈이다.
통관 때문에 왔다고 하자 송장을 들여다보더니 이 과장을 부른다. 그리곤 대당 1,000달러를 요구했다.
처음엔 100대 전부에 1,000달러를 요구하는 줄 알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니란다. 그러면서 언제든 돈이 마련되면 오라고 했다.
이춘만 지사장이 콩고민주공화국의 권력자들과 아무런 연줄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모양이다.
이 과장은 이번 화물에 1,000만 원 이상을 들였다. 통관 절차까지 다 마치고 운송비까지 지불하면 2,000만 원쯤 들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뇌물 1억을 요구한다.
들어주지 않고 상부에 항의를 하면 컨테이너를 바다 속에 잠깐 담갔다 꺼내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고의적으로 화물을 못 쓰게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밤에 이루어질 일이기에 증거도 없다.
화물 운송 책임보험을 들었지만 하역 작업을 마친 뒤의 일인지라 배상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뇌물을 주지 않으려면 화물을 포기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 지사장은 홧김에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만취 상태가 된 것이다. 모든 내용을 파악한 현수는 술집 주인에게 돈을 주고 지사장을 내실 쪽에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