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그때부터 무려 세 시간이나 기다린 것이다.
‘하여간 권력자들이란! 그리고 그 밑에서 설설 기는 놈들이란! 에이, 쉬펄! 슬슬 짜증나려 하네.’
모르긴 해도 청장은 현수를 보고 싶다는 말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꼭두새벽부터 닦달한 것이다.
과잉 충성의 극치이다.
“반갑네. 후조투 쿠아레이네.”
“네, 천지건설(주)의 김현수입니다.”
에어컨을 틀어놓아 춥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시원한 실내에 나타난 이는 경찰 정복을 걸친 킨샤사 경찰청 청장이다.
그의 뒤에는 비슷하지만 덜 화려한 정복을 걸친 사내 하나가 더 있다.
“여긴 내 동생 아델 쿠아레이네. 자네가 어제 구한 폴은 내 아들일세.”
“아, 안녕하십니까?”
“어제 위험으로부터 아이를 구해주어 고맙네. 아내가 미스터 킴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군. 그 때문에 옷을 다 버렸다고 들었는데 괜찮은가?”
권력을 쥐고 있어서인지 은인에 대한 태도가 아니다. 고압적이란 느낌이 든 것이다. 하나 발작하진 않았다.
“아, 네에. 뭐어… 세탁하면 되겠지요.”
현수가 치열을 드러내며 웃자 두 사내 역시 환한 웃음을 짓는다.
“자자, 자리에 앉지.”
청장의 안내로 소파에 앉자 비서로 보이는 여자가 시원한 냉커피를 가져온다.
현수는 특별히 할 말이 없기에 말없이 커피만 마셨다.
“미스터 킴, 천지건설(주) 직원으로 우리나라에 파견되었는데 이곳에서 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뭔가?”
“전 해외영업부 소속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이곳에서 공사를 수주해 오라고 보낸 겁니다.”
“그래서 공사를 수주했나?”
“아닙니다. 이곳에 지사가 개설된 지 올해로 3년이 된다는데 아직 한 건도 수주한 바 없습니다.”
“하하, 그렇군. 그런데 왜 하나도 못했지?”
“아시다시피 저희 회사는 해외에 있습니다. 따라서 일정 규모 이상의 공사를 수주해야 공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만한 일감을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수가 말끝을 흐리자 청장이 입을 연다.
“여기서 공사를 하려면 권력자와 선이 닿아 있어야 한다는 말은 들은 바 없나?”
“비슷한 말을 듣기는 했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려 노력했는가?”
“아니요. 그러지 않았습니다.”
“공사 수주를 하러 왔다면서 왜 쉽고 빠른 길이 있는데 택하지 않았나?”
“문제 발생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 무슨 문제를 말하는 겁니까?”
“권력자의 특혜로 공사를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공사 품질에 문제가 발생되었을 때 그 권력자에게 누를 끼칠 수 있다는 겁니다.”
“……!”
대꾸가 없자 현수가 말을 이었다.
“모처럼 공사를 하게 해줬는데 그분께 누를 끼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야… 공사를 제대로 하면 되지 않나?”
“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공사를 하려면 자재 수급이랄지 인력 동원이 적재적소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당연한 말이군. 근데 뭐가 문제지?”
“제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마타디 항만에서의 통관에 문제가 있더군요.”
“……!”
청장은 무슨 말인지 대강 짐작이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뇌물을 건네야 통관이 된다는 것 정도는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 아침엔 스무여 개의 컨테이너가 사라진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좋은 품질의 공사를 해드리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될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인력 수급에도 문제가 있는가?”
“네, 저의 지사장님의 말에 의하면 계속해서 값을 올리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하더군요.”
“흐음, 계속해서 값을 올린다고?”
“네, 처음엔 정해진 금액에 일을 시작하기는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으면 돈을 더 달라는 요구를 하는데, 그게 처음의 몇 배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무슨 소리인지 알았네.”
“네에.”
알아들었다는데 무얼 더 말하겠는가.
현수는 입을 다물고 커피만 마셨다. 그렇게 1∼2분 정도 지나자 청장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인이 일어나니 당연히 따라서 일어났다.
“미스터 킴, 어제 아들을 구해주어 고맙네. 이곳에서 하는 일이 잘 되길 비네.”
“네, 감사합니다.”
숙소로 되돌아온 현수는 넥타이를 풀며 중얼거렸다.
“그깟 일로 사람을 오라 가라야? 에이!”
다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니 지사장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왜 그러세요?”
“놈들이 내 물건을 빼돌렸어.”
“네에?”
“내가 수입한 텔레비전이 어제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하네.”
“……!”
“나쁜 자식들! 그게 지금 내 전재산이나 마찬가지인데. 뇌물 안 준다고 지들이 그걸 가로채?”
지사장은 점심나절도 안 되었는데 벌써 취해 있었다.
10장 사라진 컨테이너 스무 개
현수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춘만 지사장도 밖으로 나섰다. 교민들에게 사정하여 돈을 꿀 생각을 한 것이다.
놈들이 요구하는 대로 대당 1,000달러씩 뇌물을 쓸 생각은 없다. 파는 가격이 그것보다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당 100달러까지는 줄 용의가 있다. 팔면서 값을 조금 올리고 나머진 손해를 감수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얼마간의 이문은 남는다.
하여 돈을 빌리러 나선 것이다.
어젯밤 김 사장으로부터 컨테이너가 사라졌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 놈들의 수작이라 생각했다.
빨리 뇌물을 가져오라는 뜻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 식당 아카시아에 들렀을 때 청천벽력과 같은 소릴 들었다.
항만에 있던 컨테이너 스무여 개가 진짜 없어졌다는 것이다.
당연히 대경실색했다. 서둘러 확인해 보니 지사장의 물건이 있던 컨테이너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 같으면 즉각 항만 책임자가 사과하고 적절한 배상까지 해줄 것이다. 하나 이곳은 한국이 아니다. 항의 전화를 했더니 유감스럽다는 말이 전부이다.
자신들은 잘 보관하고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져서 사태를 파악하는 중이라고는 하는데 물어준다는 소리는 없다.
지사장은 놈들이 아예 내놓고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 짐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컨테이너가 있는 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경비원의 허가를 받지 못하면 접근조차 못할 곳의 물건들이 사라졌음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것이다.
마음 같아선 길길이 날뛰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치안이 좋지 못한 이곳에서 난동을 부리다간 자칫 총 맞아 죽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속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신 것이다.
같은 순간, 마타디 항구는 완전히 뒤집어져 있다.
지금껏 이런 일이 한 번도 안 일어난 것은 아니다.
몰래 화물을 가로채서 나눠 먹기를 한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럴 경우 이미 떠난 배에서 화물이 하역되지 않은 것처럼 서류를 꾸며 상부에 보고했다.
다시 말해 물건을 아예 받지 못한 것으로 처리한 것이다.
상부에서도 받아먹은 뇌물이 있기에 모르는 척 눈감고 묵인해 줬다. 하여 이번 일도 그런 일의 연장이라 생각하고 보고했다. 어떤 놈들이 빼돌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조만간 용돈 정도는 생길 것이란 생각에 오히려 희희낙락했다.
그런데 불벼락이 떨어졌다.
당장 모든 컨테이너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만일 찾아내지 못하면 항만 관계자 전원을 처벌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도 있었다.
항만청장이 직접 헐레벌떡 달려와 전직원을 집합시켜 놓고 누가 한 짓인지를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났어도 사태 해결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가져간 장본인이 따로 있으니 아무도 내가 했다는 소리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군인들이 등장했다. 거의 일개 중대 병력이 동원되어 온 것이다. 이들은 도착 즉시 항만 직원 하나씩 떼어놓고 개별 심문에 들어갔다.
“말을 해! 말을 하란 말이야! 바른 대로 말하면 용서해 줄 테니 말해! 이 자식이! 너 죽고 싶어? 엉?”
퍼퍽! 퍼억∼!
“크윽! 으으윽!”
심문하는 방마다 이런 소리가 나기에 항만 직원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특히 이 지사장에게 뇌물로 대당 1,000달러를 달라던 놈의 낯빛은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덩치만 컸을 뿐 겁이 많은 모양이다.
“말 안 해? 어쭈? 입을 다물어? 지금부터 뇌 속에 있는 걸 모두 꺼내놓는다. 실시!”
“이 자식이 뒈지고 싶어 환장했나? 한번 죽어볼텨?”
퍼퍽! 퍽, 퍽, 퍼퍼퍼퍽!
“으악! 케엑! 끄으윽! 사, 살려줘! 크윽!”
“평상시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한 놈이 있으면 지금 즉시 분다. 실시! 어쭈! 안 불어? 매가 부족해? 좋아, 너 오늘 한번 죽어봐라! 이잇!”
퍼어억!
“아아악!”
이날 이후 항만 관계자들 간엔 노골적인 반목이 발생됐다. 서로가 서로를 고발했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여 감시하는 체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편, 화물을 강탈당했다 생각한 화주들의 거센 항의가 있었다. 하나 없어진 화물을 어쩌겠는가!
군인들은 총으로 항의하는 화주들을 밀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킨샤사 거리를 오가면서 돈 될 만한 것을 찾았다.
“빌어먹을! 너무 가난한데다 기업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잖아. 이런 데서 뭘 수주하라는 거야? 나라에서 하는 공사 외엔 할 게 없는 데잖아. 에이, 퉤!”
핸들을 움켜쥔 손에 괜스레 힘만 주어보았다. 그렇게 거리를 돌다가 돌아온 것은 늦은 저녁이다.
“지사장님은?”
“술 먹고 뻗었어요.”
“마투바, 밥은 먹었어?”
“네, 전 먹었어요. 미스터 킴은 배고프죠? 조금만 기다려요.”
잠시 후 가져온 것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라면이다.
“이거 맛있어요. 미스터 킴, 먹어요.”
“마투바도 이거 먹어봤어? 매울 텐데?”
“나도 매운 거 잘 먹어요. 내 동생들도.”
보아하니 이춘만 과장이 각별하게 생각하여 도움을 주는 듯하다. 자기 욕심만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니 왠지 더 정이 가는 것 같아 현수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동생들 얘기 좀 해봐.”
“네, 동생이 셋 있는데 큰놈은 열 살, 둘째가 아홉 살, 막내가 여덟 살이에요.”
“마투바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네?”
“네. 근데 참 예뻐요.”
현수가 라면을 먹는 동안 마투바는 개인 신상을 줄줄이 공개했다. 엄마는 병에 걸려 죽었지만 아빠와 오빠는 반정부 시위를 하다 총에 맞아 죽었다.
또 다른 오빠가 하나 있는데 실종된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녀 가장이 되어 동생들을 보살피고 있다는 것이다.
마투바는 현재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 길에서 군인이라도 만나면 끌려가서 성폭행을 당하기 때문이다.
킨샤사에선 군인이 국민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강간한다.
며칠 전엔 일흔 살이 넘은 할머니와 임산부, 그리고 열여덟 살짜리 소녀를 포함해서 다섯 명의 여성이 같은 날 같은 지역에서 모두 군인들에 의해 성폭행당했다.
작년엔 마투바도 공격을 당했다. 운이 좋아 그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아예 외출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킨샤사에선 성폭행 때문에 오후 6시 이후에는 여성들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밤이 되면 화장실도 가지 못할 정도이다.
듣고 보니 불쌍하다. 그럼에도 구김살없어 보이는 것이 대견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힘내, 마투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힘 닿는 데까지 도와줄게.”
“네에, 고마워요.”
다음날 아침, 현수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의 일곱 번째 아침을 맞이했다.
새벽에 비가 내렸는지 습도가 높아 기분이 상쾌하지 못했다.
마투바는 별다른 말 없이 현수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시중들어 줬다. 설거지하러 그릇을 가져가자 물 잔을 끌어당겼다.
“마나여, 열을 가하라! 히팅!”
전자레인지보다도 훨씬 빠르다. 부글부글 끓는 물에 커피믹스 하나를 털어 넣었다.
그리곤 기분 좋게 커피를 마셨다.
“어라? 미스터 킴, 직접 물을 데웠어요? 내게 말하면 내가 해줄 텐데.”
“마투바는 설거지하느라 바빴잖아.”
“미스터 킴은 좋은 남자예요.”
“하하! 내가?”
현수가 환한 웃음을 짓자 마투바가 입을 연다.
“미스터 킴, 오늘은 일요일인데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부탁? 뭐지?”
“동생들 바람 좀 쐬게 해주고 싶은데 차 태워줄 수 있어요?”
“물론이야. 어딜 가고 싶은데?”
“콩고강을 구경시켜 주고 싶어요.”
“오케이. 나오라고 해.”
잠시 후 현수의 랜드로바가 달리기 시작했다.
킨샤사의 은질리 공항에서 북쪽으로 40∼50분쯤 달리면 콩고강을 볼 수 있는 유원지가 몇 곳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빠를 따라서 가보았는데 오늘 문득 거기 생각이 나서 동생들을 데리고 가고 싶었다고 한다.
현수는 운전을 하고 마투바는 조수석에 앉았다. 동생들 셋은 뒷좌석에 앉았는데 난리가 아니다.
온종일 집에 갇혀 있다시피 하다가 탁 트인 곳에 나오니 신나는 모양이다.
한바탕 신나는 구경을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사무실 입구에 쪽지가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