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47화 (47/1,307)

# 47

말을 마친 세실리아는 현수의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휴우, 무겁네요. 여기서 좀 쉬어도 되죠?”

세실리아는 늘 이런 일을 한다. 따라서 헤론찜 정도는 가뿐히 들고 다닌다. 그런데 짐짓 힘든 표정을 짓는다.

여인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내심을 짐작한 현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던지.”

“근데 어디서 왔어요? 여기 사람은 아닌데…….”

“알론이 올 때 같이 왔지. 알베제 마을에서 왔어.”

아무리 봐도 자신이 나이가 많기에 현수는 자연스레 하대를 했다. 세실리아는 이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없는 듯하다.

“우와, 알베제? 그 먼 곳에서 왔단 말이에요?”

세실리아의 눈이 커진다.

알베제라는 마을이 있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알론이 말하길, 너무 깊은 숲 속에 있어서 케이상단에서도 일 년에 딱 한 번 간다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것도 없는 알베제 마을에 대한 헛소문이 나돈 적이 있다. 그곳엔 엘프가 산다는 것이다.

뜬금없이 엘프가 산다는 소문이 나돈 건 알론이 가져온 활 때문이다.

소금과 물물교환해 온 알베제 마을의 활은 제법 높은 가치를 지닌다. 다른 활에 비해 사정거리가 길기 때문이다.

알베제 마을 인근에는 꾸지뽕나무 군락지가 있다.

이 나무는 낙엽이 지는 키 작은 나무로서 목질이 단단하면서도 질겨 활의 재료로 사용된다.

이 나무로 만든 활은 보통 활보다 대략 20보 정도 더 멀리 나간다. 탄성이 좋기 때문이다.

몇 사람 싸우지 않은 전장에서 사정거리가 20보 정도 더 긴 것은 어찌 보면 별 게 아닐 수 있다.

하나 국가 간의 전쟁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대규모로 맞붙었을 때 사정거리가 더 길다 함은 먼저 공격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한 번 더 공격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알베제 마을에서 만든 활이 유명하다.

그런데 말이 돌고 돌다 보니 숲의 수호자 엘프들이 만들었다는 소문이 난 것이다.

“흐음, 헤론찜 이거 맛이 좋은데?”

“호호, 그럼요. 우리 엄마 음식 솜씨인 걸요. 아마 여기 올테른에서 제일 맛있는 헤론찜일 거예요.”

“인정!”

현수는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났다. 생선 요리임에도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달착지근하면서도 담백하다. 게다가 간이 정확히 맞아 최상의 맛을 내고 있다.

“아이 참, 슬럼도 마셔가며 천천히 먹어요.”

현수가 헤론찜만 먹자 세실리아가 슬럼을 잔에 따라 들이민다. 주향이 느껴지는데 포도주 같다.

12장 항구도시 올테른에서

쭈우욱∼!

“으음, 이것도 맛이 괜찮은데?”

“당연하죠. 3년이나 묵은 거니. 매년 그걸 만드느라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이건 뭐로 만들었지?”

“당연히 슬럼이지 뭐예요? 안 그럼 슬럼주라 짓겠어요?”

“슬럼?”

“아, 이렇게 생긴 거 있잖아요.”

세실리아가 손가락으로 그리는 그림을 보니 포도가 아닌 딸기이다.

‘세상이 다르다 보니 과일의 맛도 다른 모양이군.’

현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헤론찜을 먹기 시작했다. 물론 간간이 슬럼주도 마셨다.

그렇게 5분쯤 먹었을 때다.

“어이, 세실리아! 생전 손님의 식탁엔 앉지 않더니 오늘은 웬일이야? 드디어 몸을 팔기로 마음먹은 거야?”

“뭐예욧?”

“그 허여멀건 놈이 마음에 들었나 보지? 그놈이 얼마 준대? 내가 그놈보다 1실버를 더 치를 테니 지금 당장 이쪽으로 후딱 오는 게 어때?”

“뭐예욧?”

세실리아가 발끈하며 일어났다. 가슴이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걸로 미루어볼 때 화가 난 듯하다.

하긴 이 상황에 화를 내지 않으면 이상하다.

현수는 대놓고 세실리아를 희롱하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서른은 약간 넘은 듯한 사내다. 굵은 팔뚝, 햇볕에 탄 얼굴, 여기저기 남아 있는 상처의 흔적이 보인다.

그의 곁에는 배에서 뽑아온 키가 보인다. 배의 방향을 조절할 때 쓰는 것으로 이것이 없으면 운항이 어렵다.

배를 도난당할까 싶어 뽑아온 듯하다.

이로 미루어 생긴 것은 용병처럼 생겼으나 어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실리아,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열두 살 꼬맹이 때부터 기다렸다구. 그러니 그 놈팡이 말고 나하고 처음 하는 거 어때?”

“뭐라고요? 아예 정신이 나갔군요. 지금 뭐라고 씨부리는 거예요? 미쳤어요?”

세실리아는 주점의 시선이 쏠려 있다는 것을 느끼곤 얼굴이 시뻘게졌다.

“나하고 결혼하자는 거야. 나, 너하고 결혼하려고 뼈 빠지게 일했어. 그래서 배를 샀다구. 너도 알잖아?”

“흥! 그런데요?”

“내 얼굴을 봐. 이 얼굴을 누가 스물세 살로 보겠어?”

지금껏 흥미있게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현수는 깜짝 놀랐다. 서른대여섯으로 보았던 사내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스물세 살이라 했기 때문이다.

“그놈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아양 떨지 말고 일루 와. 내가 예뻐해 줄게. 응? 내가 그놈보다 힘이 더 세서 더 잘할 수 있다구.”

“완전히 미쳤군요. 지금 나하고 뭘 하자는 거예요?”

“뭘 하긴, 하면 애 낳는 일을 하자는 거지.”

“뭐라고욧? 훤한 대낮에 지금 뭐라고 하는 거예요?”

“아, 깜박했다. 미안. 이따 밤에 하자.”

현수는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사내의 말주변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저래 가지곤 세실리아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화나게 하는 말만 골라서 쓰는데 어찌 여심을 사로잡겠는가!

자신에게 놈팡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기분이 나쁘다.

하나 같은 사내 입장에서 보면 애써 공들인 여자가 애먼 놈에게 홀려 있는 것으로 여겨진 때문일 게다.

그러니 그런 표현을 썼을 것이라 생각하곤 이내 관심을 끊었다. 세실리아가 사내와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았다.

물론 점점 더 화가 났기에 세실리아의 음성이 커지고 있었다. 현수는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그리곤 남은 헤론찜을 먹으려 포크를 들었다.

갑자기 소란스럽던 주점 안이 고요해진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니 사내 셋이 들어와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들의 중심에 있는 사내에게 쏠려 있다. 걸치고 있는 의복 등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귀족의 자제인 듯하다.

그 뒤의 두 사내는 시종 복장이다.

“모두 들어라. 세실리아가 누구냐?”

“네, 손님!”

허리춤에 두 손을 올려놓고 씩씩대던 세실리아가 나서자 사내가 위아래를 훑어본다.

“네가 세실리아라는 계집이야?”

“네, 손님. 근데 계집이라는 말은 좀 그러네요.”

세실리아가 살짝 이마를 찌푸렸으나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녀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그러면서 위아래를 계속해서 훑어본다. 특히 불룩 솟은 가슴과 엉덩이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흐음, 괜찮군. 이 집에서 제일 잘하는 음식이 뭐지?”

“헤론찜입니다.”

“헤론……? 그 맛대가리없게 생긴 생선?”

“네, 생긴 건 그래도 맛은 일품이에요.”

“흐음, 그래? 좋아, 그럼 그걸로 1인분. 아, 술도 알아서 가져오고.”

“네, 손님. 헤론찜은 3실버고 슬럼은 2실버입니다.”

“뭐야? 지금 내게서 돈을 받겠다는 거야?”

사내가 발끈하자 세실리아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주점은 뭐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아세요? 설마 돈이 없는 건 아니겠죠?”

“나 누군지 몰라?”

“제가 처음 보는 손님을 어찌 알겠습니까? 돈 없으면 가시고 있으면 얼른 주세요. 그래야 맛있는 헤론찜을 맛보지 않겠어요?”

“호오, 이 계집 봐라? 내가 정말 누군지 모른단 말이지?”

“물론이에요. 어느 댁 자제인지 미천한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니 얼른 돈을 내시거나…….”

세실리아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사내, 정확히는 이제 겨우 스물네 살쯤 된 애송이의 말 때문이다.

“테리, 이 계집은 물론이고 여기 있는 모두에게 내가 누군지 말을 해.”

“네, 공자님!”

얼른 허리 숙여 인사한 테리라는 사내는 주객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목에 잔뜩 힘을 줬다. 그리곤 입을 연다.

“모두 들어라. 여기 계시는 이 공자님은 이곳 올테른을 다스리는 총독 각하의 아드님이신 피어슨 마이스진 공자님이시다. 그러니 모두 예를 갖추도록 하라.”

“……!”

주점 안은 그야말로 적막 그 자체가 되었다. 방금 언급된 피어슨이란 이름 때문이다.

올테른의 총독 에릭 마이스진 백작에겐 오로지 딱 하나의 아들만 있을 뿐이다. 당연히 지극한 사랑을 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개차반이다.

피어슨은 열다섯 살 때 첫 살인을 했다. 시비에게 옷을 벗으라 했는데 말을 듣지 않자 칼로 찔러 죽인 것이다.

열여섯 살이 되어선 시비들을 강간했다. 그렇게 당한 여인만 스무 명이 넘는다. 열일곱 살이 되면서 본격적인 엽색 행각을 했다.

백작가의 시비들뿐만 아니라 여염집 처녀들까지 희생자가 되기 시작하였다.

나날이 피해가 발생되자 백성들은 백작에게 청원을 넣었다. 하나 백작은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자식이 하찮은 평민, 또는 노예 계집을 건드린 것이 무어 대수로운 일이냐고 생각한 것이다.

덕분에 더 많은 여인들이 피어슨에 의해 강제 추행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하여 올테른에선 피어슨만 나타나면 문을 잠그게 되었다. 당시 피어슨의 별명은 ‘술 취한 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피어슨이 떠났다. 전통에 따라 수도에 있는 아카데미로 유학을 간 것이다.

그리고 7년 동안 올테른엔 평화가 깃들었다. 그런데 오늘 그 평화가 깨질 모양이다. 술 취한 개가 귀환했기 때문이다.

“자아, 이런데도 돈을 내라고 할 것이냐?”

“물론입니다, 피어슨 마이스진 공자님. 5실버 주십시오. 그럼 헤론찜과 슬럼을 맛보실 수 있답니다.”

피어슨은 건방진 세실리아의 위아래를 다시 한 번 훑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손가락으로 테리를 불렀다.

“네, 공자님.”

“이 계집에게 10실버를 지불하도록.”

“저어, 10실버가 아니라 5실버인데요?”

피어슨은 세실리아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5실버는 네가 목욕하는 값이다. 가서 깨끗이 씻고 오도록. 내가 냄새나는 널 안을 순 없지 않느냐?”

“뭐라고요? 어디서 감히……!”

피어슨이 떠날 때 세실리아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그렇기에 피어슨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하여 겁도 없이 발끈한 것이다. 이런 행동이 피어슨의 관심을 더 끈다는 걸 알았다면 결코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크크크, 발끈하는 게 귀엽군. 좋아, 이따 침대에서도 지금처럼 팔팔 뛰도록. 크크, 자고로 생선과 계집은 싱싱한 것이 맛이 좋은 법. 오늘 밤을 기대하지. 그러기 전에 먼저 요리나 가져와라.”

“이이익!”

세실리아는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렸지만 여느 때처럼 주먹을 뻗어내진 않았다. 상대가 귀족이기 때문이다.

잘못되면 자신 하나로 불행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일궈 여관을 차린 부모에게도 화가 미친다.

그렇기에 냉랭한 시선으로 째려보고는 획 돌아섰다. 그런 그녀의 눈에 습기가 배어 있다. 너무도 화가 나서 눈물이 나온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어슨은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하! 크하하하!”

오늘은 피어슨이 아카데미를 마치고 고향에 온 첫날이다.

부친에게 인사를 마치자마자 올테른 전체에서 가장 팔팔하고 싱싱한 계집이 누군지를 물었다.

물론 인물은 반반해야 하고 나이는 자신보다 어려야 한다. 이에 테리라는 시종이 세실리아를 강력히 추천했다.

그래서 백작가의 외동아들이 서민들이나 드나드는 선술집인 이곳 세실리아 주점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수행원 가운데 백작가의 식솔이라 할 수 있는 남작이나 자작, 또는 기사들이 없는 것엔 이유가 있다.

남몰래 계집 후리러 나가면서 누가 내놓고 나가겠는가!

그래서 시종만 데리고 몰래 나온 것이다.

아무튼 테리는 세실리아에게 눈독을 들인 바 있다. 하나 늘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추천한 것이다.

피어슨은 수도에 있는 아카데미에 재학하는 동안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자신보다 쟁쟁한 집안의 자식들이 즐비한데 어찌 게서 잘난 척을 할 것이며 발작할 수 있겠는가!

왕국의 제4왕자와 5왕자, 그리고 2공주도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다. 공작가와 후작가의 자식도 여럿 있었다.

백작가의 자손은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곳이 아카데미이다. 게다가 그곳에서 찍히게 되면 작위를 계승받아도 귀족 사이에서 왕따당한다.

그렇기에 아주 얌전하고 올곧은 청년 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난봉질이 몸에 밴 피어슨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남들이 볼 때는 착한 척, 예의 바른 척했다.

하나 고학년이 되면서 심야가 되면 몰래 아카데미를 빠져나가 사창가를 전전했다. 당연히 모든 비용을 지불했다.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기 때문이다.

그때 사용한 이름은 노스럽(Nosraep)이다. 본명인 피어슨(Pearson)의 철자를 뒤집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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