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현재 테리안 왕국의 수도 체노빌에는 노스럽에 관한 전설이 전해진다. 하룻밤에 아홉 여자를 상대하여 모두 기절시킨 초절정 정력가의 이름이다.
어쨌거나 피어슨에게 죄어져 있던 족쇄는 완전히 풀렸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상 부친 유고 시 작위를 물려받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게 된 것이다.
고향으로 귀환하는 내내 피어슨은 작심했다. 장차 작위를 물려받으면 본처 외에도 스물네 명의 첩을 두겠다고.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피어슨은 색욕에 미친놈이다.
그런데 세실리아는 방금 그런 놈에게 찍혔다.
아주 먹음직스럽고 맛있어 보이는 먹잇감으로!
잠시 후, 헤론찜이 나왔다. 물론 슬럼도 따라 나왔다. 피어슨은 세실리아에게 앉아서 술 따를 것을 요구했다.
하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다음엔 보란 듯이 현수 앞에 앉는다. 그리곤 시키지도 않았는데 술을 따라준다.
피어슨이 발끈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데 웬일인지 아무런 발작도 하지 않고 묵묵히 헤론찜과 슬럼을 마신다.
현수는 그러거나 말거나 술과 안주를 즐겼다. 잔이 빌 때마다 세실리아가 술을 따라주는 것이 조금 거슬렸을 뿐이다.
시비의 빌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거의 다 먹어갈 때쯤 테리가 다가온다.
“따라와라. 공자님께서 부르신다.”
“……!”
“이곳은 올테른이고 공자님은 백작님의 하나뿐인 아들이시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곤란할 거야. 그러니 순순히 따라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테리라는 시종은 서른 살이 조금 넘어 보인다. 그런데 말하는 싸가지가 밥맛이다.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다른 짐승을 놀라게 한다는 뜻이다. 비유적으로 남의 권세를 빌려 허세 부림을 이르는 말이다.
지금의 테리가 딱 그러하다. 마치 자신이 백작가의 자손인 양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반말로 내뱉는다.
현수는 기분이 상했다. 하여 인상을 찌푸렸다.
“어허! 평민 따위가 어디서 감히! 죽고 싶은 거냐?”
“평민? 그러는 네놈은 평민은 되는 거냐?”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이다.
테리의 싸가지 없는 발언에 화가 난 현수가 나직이 되물었다. 분노가 느껴지는 저음이다.
“당연하지. 이 몸은 평민이시다.”
“그래? 그런데도 평민 따위라는 말을 쓰는 거냐?”
“그건……!”
자신의 말에 어폐를 느낀 테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가서 네놈의 주인인 저놈에게 일러라. 까불다간 뒈지는 수가 있다고.”
“뭐라고?”
테리가 소리를 지르자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한편 세실리아는 백작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밝혔음에도 개의치 않는 현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바보 아니면 백작가를 평범히 볼 수 있는 신분일 것이다. 둘 중 대체 뭔가 싶었던 것이다.
“테리!”
피어슨의 부름에 테리는 후다닥 그의 곁으로 갔다. 그리곤 뭔가 보고를 한다. 보나마나 부풀려 말했을 것이다.
“뭐라고?”
피어슨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부르르 떠는 것을 본 현수는 피식 실소를 베어 물었다.
잠시 후, 테리가 다시 왔다.
“운 좋은 줄 알아라. 공자님께서 조용히 따라오기만 하면 너그럽게 용서하신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즉시 일어나 나를 따라오도록!”
점입가경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의 상황이 바로 그러하다.
테리라는 놈은 시종인 주제에 대체 뭘 믿고 그러는지 본인이 귀족인 양 군다.
이런 놈은 조선 500년을 통틀어 최고의 탐관오리라 할 수 있는 고부군수 조병갑12)의 휘하에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던 이방 같은 놈일 것이다.
“너도 가서 전해라. 좋은 말로 거절할 때 그냥 꺼지라고.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야.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입을 열면 최하 옥수수 열 개는 각오해야 할 것이야.”
“옥수수? 그게 뭐냐?”
“흐음, 한 번 더 입을 열었지만 내 말을 못 알아들어 그런 거니 이번은 용서하지. 지금처럼 한 번만 더 내게 말을 지껄이면 다시는 입 놀리기 힘들게 이빨을 부숴놓겠다는 뜻이야. 그러니 이만 꺼져!”
멀린은 은과 원이 확실한 사람이다. 그의 제자인 현수 역시 은원이 분명하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나직하면서도 왠지 스산하게 느껴지는 현수의 음성에 압도되었는지 테리는 두말없이 돌아갔다.
“뭬야?”
우당탕탕!
피어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의자가 쓰러졌다. 이를 본 현수는 피식 웃음 지었다.
이제 놈은 겁도 없이 도발할 것이다. 그러면 아예 박살 내줄 생각을 한 때문이다. 물론 테리도 포함된다.
싸가지없는 놈들에겐 매가 보약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자신은 이곳 테리안 왕국의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백작이니 어쩌니 하는 것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다만 스승이 건국한 아드리안 공국에서만큼은 지킬 것은 지켜줄 생각이다. 그런데 여긴 아드리안 공국도 아니다. 그러니 피어슨을 두들겨 팰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피어슨과 두 시종이 다가왔다.
“네 이놈! 네가 감히 어디다 대고! 테리! 뭐해? 이놈을 꼼짝 못하게 잡아!”
“네에. 이봐, 너도 같이…….”
테리의 말에 지금껏 아무 말 없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짝 내디뎠다.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죽일 수도 있다.”
현수는 분명 경고했다.
그런데 테리라는 놈이 겁도 없이 허리춤의 대거(Dagger)를 뽑아 들었다. 그리곤 한 발짝 다가섰다.
그 순간이다.
“파이어 애로우!”
쉐엑! 퍼억∼! 챙그랑!
“아아아악! 아악! 뜨거워! 으아아악!”
테리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파이어 애로우에 가슴을 맞았다. 그 결과 갈비뼈 세 대가 동시에 부러졌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통증이 느껴져 비명을 지른 것이다.
게다가 옷에 불이 붙었다. 머리카락 그슬리는 냄새가 나자 본능적으로 뒹굴며 불을 끄려는 것이다.
“어때? 너도 생각 있어? 죽여줄까?”
현수의 물음에 다가서던 다른 시종은 얼른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뒤로 물러선다.
“끄으응, 마법사였어?”
피어슨의 물음에 현수는 시선을 돌려 그를 째려보았다.
“죽일 수도 있었지만 봐준 거다. 네놈도 생각이 있으면 덤벼. 특별히 네놈은 고자가 되게 해주지.”
현수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피어슨은 얼른 물러선다. 죽을지언정 사내가 어찌 고자 되기를 바라겠는가!
“너, 너어… 이름이 뭐냐?”
“내 이름은 알아서 뭐하게?”
“좋아, 오늘은 이만 물러서지. 그러나 조심해야 할 거야. 이곳 올테른에선 모든 게 쉽지 않아질 테니.”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 그리고 앞으론 아무나 보고 까불지 마. 그러다 뒈지는 수가 있으니.”
오늘 이곳에서 피어슨은 건방을 잔뜩 떨고 세실리아에게 치욕스런 말을 했다. 하나 죽을 정도로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말로써 겁만 준 것이다.
“어쨌든 이름을 가르쳐 줘.”
“…하인스다.”
“좋아, 하인스. 두고 보자.”
“멍청한 놈, 두고 보긴 뭘 두고 봐?”
“하여간. 이만 가자.”
“네.”
명령을 받은 시종은 기절한 테리를 들쳐업었다. 그리곤 서둘러 사라졌다.
“마법사님이셨어요?”
“그래.”
“어휴! 멋져요. 호호, 기분이에요. 제가 술 한 병 더 드릴 테니 마셔요.”
“그러던지.”
세실리아가 술을 가지러 간 사이에 한숨을 쉬는 사내가 있다. 스물세 살이지만 30대로 보이는 어부이다.
조금 전 세실리아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서지 못했다.
그랬다간 작살 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수가 나서서 멋지게 해결했다. 게다가 마법사란다.
어부와 마법사!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나이도 현수가 어려 보인다. 키도 크다. 비교할 게 없어진 어부는 낙담한 듯 긴 한숨을 쉬었다.
현수는 웃음이 나왔다. 하여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마법사님?”
“마법사님이 아니라 허여멀건 놈팡이라네.”
“아이고, 마법사님. 아까는 마법사님인지 몰라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덜퍼덕 무릎을 꿇고는 애원한다.
현수는 이 세상의 마법사라는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하고 다니기에 이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어나서 자리에 앉게.”
“아닙니다. 소인이 어찌…….”
“어허! 어서 말을 듣게.”
“네.”
어부는 찍소리 않고 공손한 표정으로 앉았다.
“스물세 살이라고 했지?”
“네.”
“내가 자네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으니 말을 놓겠네.”
“아이고, 그러셔야죠. 당연히 그러셔도 됩니다.”
“좋아, 자네에게 충고 하나 하지.”
“말씀만 하십시오.”
“자네, 세실리아를 좋아하지?”
“네……? 아, 네에. 하지만 마법사님이 마음에 드신다면 백 번이고 양보하겠습니다. 다만 세실리아는 아직 처녀이니 조심스럽게……. 헉, 잘못했습니다. 마법사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현수의 시선을 받자 어부는 화들짝 놀라며 움츠러들었다.
“난 세실리아를 어찌해 볼 생각이 없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그리고 세실리아의 마음을 잡고 싶거든 백 마디 말을 하기보단 확실한 행동을 한 번 보여주게. 알았나?”
“네, 알았습니다요.”
“좋아, 이만 가보게.”
“네,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말을 마친 어부는 자기 자리로 갔다. 그리곤 잔을 비우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이날 어부는 세실리아로부터 따귀를 맞는다. 그리고 세실리아의 부친에게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는다.
주점을 나선 어부는 몰래 세실리아의 방에 들어가 홀딱 벗고 기다렸다. 그리곤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온 세실리아를 다짜고짜 덮쳤기 때문이다.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한 행동 한 번’이라는 말을 어부는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자아, 여기 슬럼이요. 이건 특별히 드리는 서비스이니 돈은 안 내셔도 되요.”
어부가 나가자 세실리아가 방긋 웃음 지으며 나타난다. 언제 갈아입었는지 화사한 빛깔의 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고마워.”
현수는 반 병 더 마셨다. 그래도 취하지 않는다. 워낙 오염되지 않은 환경이라 그런 것이다.
그때 알론이 들어온다.
“아아! 아직 올라가지 않으셨군요.”
“그래. 음식이 맛있어서…….”
“입에 맞는다니 다행입니다. 여긴 저희 케이상단 제7지부 지부장이신 말링코입니다.”
알론의 곁에는 살짝 대머리가 까진 40대 사내가 있었다.
“반갑습니다, 마법사님. 말링코입니다.”
“흠, 반갑네. 하인스라 하네.”
“먼저 이전에 저희 상단을 보호하여 무사히 상행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셨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별일 아니었으니 크게 개의치 말게.”
“무슨 말씀을. 도움을 받은 게 분명하다 들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저희 지부를 들러주시면 합당한 비용을 지불해 드리겠습니다. 아, 이곳에서의 비용도 저희 상단이 댈 것이니 지불하지 말고 이용해 주십시오.”
“그러도록 하지.”
사양해 봐야 소용없는 상황인 듯하다. 말링코의 시선에 극도의 존경심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알아봐 달라는 건 어찌 되었지?”
“저어, 그게… 죄송합니다. 올테른에서 아드리안 공국으로 가는 배편은 모두 끊겼다고 합니다.”
“……?”
“아드리안 공국을 침공한 미판테와 쿠르스, 그리고 엘라이 왕국이 모든 배편의 입국을 불허한다고 합니다.”
“그럼 배로는 갈 수 없다는 것인가?”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현재로선… 저희 상단에서 편의를 제공해 드리려 알아봤지만 어느 누구도 아드리안으로 가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보이는 족족 침몰시킨다 하니 사공들이 겁을 먹은 모양입니다.”
“아니네. 죄송할 게 무어 있는가? 케이상단이 그런 게 아닌데. 으음! 그렇다면 여기서 아드리안 공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뭐지?”
“네, 여길 잠시 봐주십시오.”
알론이 품에서 꺼내 펼친 것은 지도이다. 현대의 지도가 아니라 대강대강 윤곽만 그려놓은 아이들 장난 같은 것이다.
하나 이것으로 케이상단은 상행을 다닌다. 따라서 장난으로 그려 놓은 그림이 아니다.
“현재 있는 테리안 왕국의 알테른은 바로 여깁니다. 이 강을 건너 미판테 왕국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가시면 아드리안 공국이 나옵니다.”
“미판테 왕국을 가로지르는 거리는 어느 정도 되지?”
“대략 1,000㎞ 정도 될 겁니다.”
“으음, 열흘이면 되려나?”
“네에? 열흘이라니요? 석 달은 족히 걸릴 겁니다. 마법사님이 마법을 쓰셔도 그 정도는 걸립니다.”
“왜지? 곧장 가로지르기만 하는 건데?”
“미판테 왕국의 주요 수출품은 목재입니다.”
“갑자기 수출품 이야긴 왜……?”
현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알론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는다. 그리곤 설명을 이었다.
“미판테 왕국은 산림의 나라, 사막의 나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호수의 나라라고도 하지요.”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