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너는 그림의 떡이란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대체 무슨 소린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한 피어슨은 멍한 표정만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마친 현수는 천천히 계단을 딛고 올라갔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런데 눈동자 이외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신위에 얼어버린 것이다.
“야, 이 병신 같은 개새끼들아! 니들이 감히 날 배신해? 니들이 그러고도 병사야? 뭐해? 어서 기사들을 들쳐업어! 이 멍청하고 비겁한 병사 새끼들아! 빨랑!”
현수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피어슨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고통을 못 느껴서 그런지 겁을 상실한 모습이다.
잠시 후, 썰물 빠지듯 병사들이 물러갔다. 하나 주점은 주점이라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너무도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던 것이다. 하나 딱 한 명, 세실리아만은 그렇지 않다.
‘호호, 드디어 신랑감을 찾았어. 아암, 이 정도는 돼야 날 지켜주지. 호호, 기다리세요. 침대보 바꿔 드릴게요.’
세실리아는 잽싼 발걸음으로 린넨룸을 향해 달렸다.
이곳은 타월, 냅킨, 시트, 담요, 유니폼, 커튼, 도일리14)를 보관하는 곳이다.
잠시 적막했던 주점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시끌벅적해졌다. 비틀거리며 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허기를 메우기 위해 들어서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게 대략 30여 분 정도 지났을 때엔 이실리프 마탑의 대마법사가 다시 나타났으며 현재 올테른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번진 뒤였다.
사람들의 화제는 완전히 개쪽을 판 피어슨에서 이실리프 대마법사로 추정되는 현수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이름은 점점 더 포장되어 가기 시작했다.
현수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상대했던 몬스터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마법의 위력도 동반해서 상승했다.
두 시간이 지난 뒤 도시 구경을 위해 나섰던 현수는 자신이 점차 신이 되어가고 있음에 실소를 터뜨렸다.
오우거는 새끼손가락으로 짓눌러 죽였고, 오크 부락은 손짓 한 번에 잿더미가 되었다.
허공을 훨훨 날아다니며, 비, 바람, 번개, 구름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어떤 때는 눈빛만으로 트롤 서른 마리를 죽였다.
“해도 너무하는군. 그나저나 내일 일찍 떠나야겠군.”
현수는 아실리프의 마법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보고 빨리 떠나야 함을 깨달았다.
수백 명의 환자와 보호자들이 현수를 찾아 맹렬한 기세로 정보를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올테른은 항구도시라 물산의 이합집산이 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어업과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당연히 고정 인구가 많다. 알론이 말하기론 약 12만 명이 산다. 이외에도 유동인구가 3만 정도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 15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환자가 있겠는가!
이들에게 발목 잡히면 꼼짝없이 몇 달을 지내야 함을 알기에 아예 일찍 떠날 생각을 한 것이다.
아무튼 현수는 올테른을 돌아다니면서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그러면서 궁금한 것은 묻기도 했다. 그 결과 아르센 대륙의 풍습을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구로 치면 중세 유럽 정도 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다.
거친 음식은 식이섬유가 다량 함유된 건강식이라 생각하면 된다. 평민들이 입는 올 굵고 성근 의복은 바람이 잘 통하니 자연주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최상의 의복이다.
하지만 악취는 견디기 힘들었다.
길을 가다 보면 위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때 얼른 피해야지 머뭇거리다간 오물을 뒤집어쓸 우려가 있다.
물론 버리는 사람이 피하라는 소리를 하긴 한다.
어쨌거나 그 결과 길바닥이 질척거린다. 소변을 아무 데나 버리기 때문이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 발언으로 유명해진 ‘똥 덩어리’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나마 이것들은 금방 사라진다.
배고픈 똥개들이 버려지는 즉시 허겁지겁 주워 먹기 때문이다. 안 그렇다면 그 악취는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일 것이다.
“날씨가 따듯해지거나 장마가 지면 전염병이 창궐하겠군.”
나직이 중얼거리며 이 거리 저 거리를 구경하느라 시간이 늦어졌다. 해가 떨어질 무렵이 되자 현수는 길을 물어 세실리아 여관으로 돌아왔다.
“하인스 마법사이십니까?”
“그렇소만?”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나서서 묻는 이는 귀족가의 시종 복장을 하고 있다.
나이는 대략 60 정도 되며,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올테른의 총독이신 에릭 마이스진 백작님께서 마법사님께 접견을 청하셨습니다.”
‘으음! 피어슨 이 자식이 그새 일러?’
현수는 피어슨을 징계한 일 때문에 만나자는 것으로 생각하고 슬쩍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제 곧 밤늦은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만…….”
“백작님은 원래 늦은 시간에 만찬을 즐기십니다. 그러니 조금 늦는 것 정도는 괜찮습니다.”
“……!”
“모셔오라고 백작님께서 마차를 보내셨습니다. 그냥 타시기만 하면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상당히 정중하다. 그리고 전혀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뭐야, 이거?’
어떤 상황인지 가늠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케이상단의 말링코 지부장과 알론 서기도 접견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지금쯤 도착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동행하지요.”
“네, 이쪽으로.”
시종의 안내를 받으니 장미 문장이 그려진 호화스런 육두마차가 서 있다.
이 정도면 백작 본인이 외출할 때 타는 것인 듯하다.
마차는 제법 안락했다. 하나 흔들림이 심해 오래는 못 타겠다는 생각을 했다. 멀미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킨샤사에서 지프를 타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대마법사 체면에 뭐라 할 수 없어 트집 잡진 않았다.
“한데 어떤 일로 나를 만나자고 한 건지 혹시 아십니까?”
“아, 말씀 낮추십시오, 대마법사님.”
시종의 말을 듣는 순간 현수는 어찌 된 영문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알론이 소문을 냈고, 백작이 흥미를 느껴 초청한 것이다. 현수는 마음이 한결 편해짐을 느꼈다.
“어서 오십시오. 올테른의 총독이자 영주인 에릭 마이스진 백작입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법사 하인스 킴입니다.”
“오오! 귀족이셨습니까?”
무슨 뜻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현수는 굳이 아니라 하지 않고 슬쩍 웃어만 주었다.
“과연…‥. 역시 이실리프 마탑의 진전을 이은 분이시니 보통의 마법사완 달라도 확실히 다르시군요.”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평민 출신이다.
귀족 출신도 있기는 하지만 극소수이다. 굳이 고난의 길을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평민들이 마법사가 되길 원하는 이유는 신분 상승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백작의 태도는 더욱 정중해졌다.
현수가 몇 써클 마법사인지는 알 수 없다. 새파랗게 젊으니 아직 고써클에 도달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마탑이라 불리는 이실리프 마탑 출신이라면 흔히 볼 수 있는 저써클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 4∼5써클 정도는 될 것이다. 나이 이십에 4∼5써클이면 대단한 성취이다.
4써클 이상이라면 제국에서도 귀족의 작위를 내린다.
4써클은 자작, 5써클은 백작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현수는 이실리프 마탑 출신이라고 한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5써클 마스터에 근접한 실력자이다.
그렇다면 최하가 백작이고, 최고 후작까지도 가능하다.
왕국의 백작과 제국의 백작은 분명 차이가 있다. 게다가 이미 귀족 신분이다. 그렇기에 아주 정중히 접대한 것이다.
만찬은 아주 그럴듯했다. 온갖 음식이 다 나왔다.
현수는 백작과 더불어 담소를 나누며 식사했다.
백작은 자기 자식을 영구히 고자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웃으며 떠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백작은 이실리프 마탑과의 인연을 맺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초청한 것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법이다. 현수는 정중하면서도 지극히 우호적인 백작에게 그저 좋은 말만 해줬다.
마지막으로 만찬을 마치고 다과를 나눌 때 세실리아 여관에 대해 언급했다.
비록 하루의 인연이지만 새침하면서도 활달한 세실리아가 한 많은 세상을 살지 않도록 배려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현수의 청은 곧바로 수용되었다.
누구든 세실리아 여관에 해코지를 하면 즉시 현황 파악을 하여 처벌하겠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친김에 아드리안 공국까지 가는 배편을 물어봤다. 그런데 그건 총독의 권한으로도 어려운 일이라 한다.
선주들이 목숨 건 운항을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란다.
대신 아드리안 공국을 침공한 세 나라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백작 성을 나올 때 백작은 질 좋은 와인을 선물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현수는 향수 한 병을 주었다.
인터넷에서 15,000원 정도 하는 ‘살바도르 델리 아구아 베르데’라는 요상한 이름의 향수이다.
딱히 이게 좋아서 준 게 아니다. 아공간엔 상당히 많은 향수가 있다. 그중 용량이 컸기에 이걸 골랐다.
다른 것들은 크지 않은 병에 담긴 것이다.
이런 건 줘봐야 얼마 못 쓴다. 백작의 몸에서 악취가 나기 때문이다. 아마 씻는 걸 싫어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100㎖짜리를 골라서 주었다.
이것은 투명한 유리로 만든 사각 병에 연두색 향수 액이 담겨 있고, 꼭지를 누르면 소량씩 나오도록 되어 있다.
뿌리는 시범을 보여주면서 사용법을 가르쳐 주자 대단히 좋아했다.
달콤한 향기도 향기지만 유리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상당히 놀라워한다. 이곳에선 유리도 보석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말하길, 역시 이실리프 마탑은 뭐가 달라고 다르다고 한다. 그리곤 일 년에 딱 한 번 쓰고 가보로 남기겠다고 했다.
현수 입장에선 그러거나 말거나 웃어주고 말았다.
백작이라는 사람이 고작 15,000원짜리에 감격하는 모습이 웃겼던 것이다.
만찬이 끝나고 일행이 모두 돌아간 뒤 백작은 가신들로부터 보고를 들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온 아들이 인사를 하자마자 민정을 살필 목적으로 나갔다고 했을 땐 흐뭇한 기분이었다.
망나니가 드디어 정신 차렸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그런데 평민들이 우글거리는 선술집에서 계집 하나 때문에 개망신을 당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기사 여섯 명이 기절했다. 특히 수석기사 데이몬은 갈비뼈 세 대가 나가는 중상을 입었다.
당연히 노발대발할 일이다. 감히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기사들을 부상시켰으니 당연한 일이다.
끝까지 아들 편을 들지 못한 병사들에겐 군장을 메고 연병장 300바퀴를 도는 벌을 받도록 했다.
어쨌거나 아들을 위협했다는 자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그런데 충돌했던 인물이 바로 이실리프의 대마법사라고 한다.
백작은 즉시 피어슨을 불러들였다. 그리곤 다짜고짜 매타작을 시작하였다. 피어슨은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는 것이었다. 하여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다시는 여염집 여자들을 탐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수십 번이나 반복했다. 사실 피어슨은 이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다.
그것도 아주 오래도록.
그렇게 빌었는데도 백작은 봐주지 않았다. 철없는 아들 때문에 하마터면 멸문지화를 당할 뻔했기 때문이다.
피어슨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그러던 중 자신이 욕하고 대들었던 상대가 바로 소문 자자한 이실리프 마탑의 대마법사라는 말을 듣고는 멍청이가 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 여섯이 달려들어야 오우거 한 마리를 간신히 처리한다. 그것도 둘이나 셋쯤은 심각한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 상대는 그런 오우거를 새끼손가락 하나로 죽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기절한 데이몬을 비롯한 다섯 명의 기사가 왜 그렇게 힘없이 당했는지 이해가 갔다.
이 대목에서 피어슨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봐주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벌써 차디찬 시신이 되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마법사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매 맞는 내내 ‘그림의 떡이 대체 무슨 뜻이지?’를 반복해서 되뇌었다.
현수는 절로 깨닫게 될 것이라 하였지만 피어슨은 오래도록 이 말의 의미를 모르게 된다. 아무튼 병적일 정도로 여자를 밝히던 피어슨은 이날 이후 수도승처럼 지내게 된다.
피어슨 본인은 심리적 충격 때문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무분별한 욕정 때문에 가문 자체가 멸문될 뻔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수에 대한 어떠한 원한도 없다. 결과적으로 가장 좋은 결말이 되는 것이다.
하나 마이스진 백작의 생각은 다르다. 아들의 태도 변화를 결국 이상히 여기게 된다. 하여 원인을 찾았고, 그 결과 하인스 마법사의 뒤를 쫓는 그림자들이 생겨난다.
그 가운데에는 테리안 왕국 최고의 어쌔신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이름은 놀런 테이실이다.
『전능의 팔찌』 제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