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그리곤 주민등록증을 꺼내 건넸다.
“어라, 이게 뭡니까?”
경비병은 얄팍한 주민등록증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다. 좌측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있고, 우측 상단에는 조그만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조그만 그림엔 눈앞 자유기사의 얼굴이 축소되어 있다. 어떻게 이렇게 작게, 그리고 어떻게 이토록 생생하게 그릴 수 있는지 놀랄 지경이다.
“그건 내가 태어난 제국의 신분증이네.”
“아……! 그렇습니까? 실례지만 어느 제국이십니까?”
“흐음, 코리아 제국이라 하네.”
“코, 코리아 제국이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그럴 것이다. 아르센과는 다른 대륙에 있는 나라니까.”
“근데 거기선 평민들에게도 이런 신분증을 만들어줍니까?”
“내가 평민처럼 보이나?”
한국은 능력 또는 재력이 신분의 척도이지만 이곳은 태생 자체를 굉장히 중요시하는 세상이다.
방금 현수는 주민등록증을 내놨다.
지구가 아닌 이곳에선 이토록 정교한 신분증명서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카이엔 제국을 비롯한 모든 나라가 그렇다.
그런데 이것을 평민 신분증이라 하면 누가 믿겠는가!
하여 평민이 아니라는 것을 내비쳤다. 그러자 경비병은 얼른 차려 자세를 취한다.
“핫……!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작위는 어찌 되십니까?”
“흐음, 백작일세.”
뻥을 치려면 제대로 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의 결과이다.
“아……! 그러시군요. 근데 여기 있는 이 붉은 건 뭡니까?”
“그건 우리 제국 황제 폐하의 직인이라네.”
“통과하십시오. 그런데 백작님의 성함은 어찌 되십니까?”
“그냥 하인스 백작이라 부르면 되네.”
귀족들은 평민에게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 평민 따위가 귀족인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빕니다, 하인스 백작님!”
“쉬잇……! 그런데 말일세, 난 재미 삼아 여행 중이네. 내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주게.”
“네, 걱정 마십시오. 저와 경비대장님, 그리고 영주님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게 하겠습니다.”
“고맙네.”
“아이고,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어서 가십시오.”
귀족으로부터 감사의 뜻을 들으니 경비병은 황송해했다.
그러고 보니 참 허술한 관문이다.
하나 이건 현수에 국한된 이야기이다. 실제 이 관문은 제대로 된 신분증이 없으면 절대 통과 못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쉽게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제작한 주민등록증이 워낙 희한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귀해 보이는 물건이고, 이곳에선 결코 만들 수 없는 것임을 졍비원도 알기에 현수의 말이 그대로 통용된 것이다.
관문을 통과한 현수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가며 테세린이란 항구도시를 구경했다.
올테른 못지 않게 활달한 도시인지라 제법 볼 것이 많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테세린이 더 깨끗하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오물을 길에다 버리지 않았고, 길바닥에 쓰레기가 나뒹굴지도 않는다.
‘위생에 대해 아는 인물인 모양이군, 여기 영주는…….’
조금 더 있으면 저녁때이다. 현수는 어차피 밥을 먹어야 하니 세실리아 여관을 찾기로 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되었다. 세실리아 여관이 무려 다섯 개나 있다는 것이다.
이름이 다 똑같은데 이 동네 사람들은 어찌 구분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뚱뚱한 세실리아, 늙은 세실리아, 코찔찔이 세실리아, 새끈한 세실리아, 그리고 늘씬한 세실리아라고 한다.
현수는 늘씬한 세실리아 여관이 어딘지를 물었다. 선장이 좋아할 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갔다.
물어 물어 찾아갔건만 아닌 듯하다. 타고 왔던 배의 이름을 댔는데 잘 모르는 눈치이다.
그래서 다른 곳을 찾았다. 이번엔 새끈한 세실리아 여관이다. 근데 그곳도 아니다. 결국 네 번 만에 찾을 수 있었다.
현수가 길바닥을 헤매는 동안 선장은 엘리터 세 마리를 처분하고 코찔찔이 세실리아 여관에 도착해 있었다.
“아이고, 이거 누구십니까? 우리의 영웅 하인스 기사님, 어서 오십시오. 자자, 이쪽으로……!”
현수는 이런 대접을 받으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공치사를 하니 어쩌겠는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잡았다. 선장과 코다일, 그리고 젭센이 있는 탁자이다.
다시 말해 최상석을 차지한 것이다.
같이 배를 타고 왔던 사람 대부분이 자리하자 선장이 술잔을 들고 일어났다.
“오늘 우리가 무사히 이곳에 올 수 있도록 공을 세운 세 사람이 있습니다. 코다일과 젭센, 그리고 자유기사이신 하인스 기사님을 위하여!”
“위하여……!”
왁자지껄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술잔을 비웠다.
처음 듣는 곡식으로 만들었다는 술은 독하지 않았다. 맥주보다도 도수가 떨어지는 듯하여 꽤 많은 양을 마셨다.
술자리가 끝나고 선장은 엘리터를 처분한 돈 가운데 일부를 선원들에게 나눠주었다.
현수에게도 적지 않은 돈을 준다고 했으나 고사했다. 그러자 이곳에 머무는 동안 숙식비만큼은 내주게 해달라고 한다.
딱 하루만 머물고 떠날 생각인지라 현수는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깊은 밤,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던 현수는 이내 돌아 나왔다. 빈대, 이, 벼룩은 물론이고 쥐까지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도 술을 마시던 선장은 왜 나왔느냐고 묻는다.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을 알기에 바람이나 쐬겠다고 했다. 선장은 술기운 때문에 그러는지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는 인적 드문 호젓한 길을 천천히 걸었다.
‘이곳에 온 지 이틀째군? 그런데 다시 지구로 가봐야 하나? 왜 이렇게 불안한 마음이 들지?’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스레 마음이 답답한 느낌이 든 때문이다. 다시 상념이 이어진다.
‘흐음! 지사장님, 혼자 있을 텐데 본사에서 사람들이 오면……. 열흘쯤 걸린다고는 했지만 워낙 큰 공사라 금방 올지도 모르는데. 으으음……! 어떻게 하지?’
이춘만 지사장이 혼자 있을 때 본사에서 사람들이 오면 내무장관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데 애로사항이 있을 것이다.
첫째는 직통 전화번호를 모른다.
둘째는 내무장관이 이춘만에겐 전혀 호감을 느끼지 않기에 일이 잘못될 수도 있다.
결국 완전한 계약이 체결될 때까지는 현수가 킨샤사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제길……! 오랜만에 여길 왔는데 금방 가야 하나? 여긴 시원해서 좋은데 푹푹 찌고, 땀이 줄줄 흐르는 그곳으로……. 제기랄!’
속으로 투덜거리던 현수의 뇌리로 문득 스치는 상념이 있다.
“아……! 맞아. 여기와 지구의 시간차를 안 따져봤어.”
나직이 중얼거린 현수는 마을을 벗어났다.
아예 숲으로 들어가 텐트를 치거나 적당한 장소에서 차원 이동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때 누군가 뒤를 따르는 느낌이 들었다.
‘응……? 누구지?’
현수는 얼른 기감을 넓혀 주위를 살폈다. 생각에 몰두하느라 미처 알지 못했는데 네 명이나 따르고 있었다.
“흐으음, 여긴 날 아는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아……! 이곳의 영주가 보낸 사람들이군.”
상대의 신분을 짐작한 현수는 천천히 걸어 다시 코찔찔이 세실리아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리곤 아공간에서 빈대와 벼룩 퇴치를 위한 연막소독약을 꺼냈다. 틈이 많아 이것을 메우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리곤 지체없이 연막을 터뜨렸다.
한 시간쯤 지난 뒤 방으로 돌아간 현수는 새로운 침구를 꺼냈다. 있는 게 냄새나고 너무 지저분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이쪽 세상에 적응되지 않은 것이다.
짹짹! 짹짹!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깨어난 현수는 우물가로 향했다. 이틀간 샤워를 못해 그런지 머리가 간지러워 머리를 감으려는 것이다.
두레박으로 물을 떴는데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갑다.
하여 히팅 마법으로 따끈하게 데웠다. 그리곤 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샴푸를 쓰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아르센 대륙의 환경보호!
“어휴……! 시원하네. 응……? 넌 누구니?”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던 현수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열 살쯤 된 여자아이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저씨, 그거 뭐예요?”
“응……? 그거라니? 뭘 말하는 거니?”
“아까 아저씨가 손으로 문질렀던 거요. 그건 초록색인데 왜 머리에 하얀 게 생기는 거죠? 그리고, 킁킁……! 이 냄새, 이거 너무 좋아요. 그거 세실리아 줘요.”
“아……! 네가 코찔찔이 세실리아구나?”
금발의 세실리아는 아주 귀여운 소녀였다.
“네, 제가 세실리아예요. 근데 지금은 코 안 찔찔거려요.”
“하하, 그렇구나.”
현수는 머리 말리던 동작을 멈추고 주저앉아 세실리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세실리아도 그거로 머리 닦으면 안 돼요?”
“너도 머리 닦고 싶어?”
“네, 근데 나도 그걸로 머리 닦으면 냄새 좋아져요?”
“그럼……! 좋아, 머리를 감자. 자, 이쪽으로 와서 앉아.”
“네에.”
세실리아가 머리를 숙인다. 아이의 머리를 감기려던 현수는 동작을 멈췄다.
“잠깐만, 세실리아.”
“왜요?”
현수는 머릿니를 처음 보았다. 서캐라 불리기도 하는 이것은 사람의 머리에서 피를 빨아먹고 산다. 그리곤 머리카락에 알을 낳아 번식하는 기생충이다.
머릿니의 알은 모근 가까이에 붙어 있어서 작고 하얀 점같이 보인다. 요놈은 심한 가려움을 유발시킨다.
현수는 아공간을 뒤져 참빗과 머릿니를 없애는 샴푸를 꺼내 들었다.
먼저 참빗으로 머리를 빗어 내리려 했는데 도저히 안 된다. 머리가 기름기로 떡져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세탁비누로 두 번이나 머리를 감긴 뒤에야 샴푸로 감겼다. 그리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거의 말랐을 즈음 참빗으로 빗어보았다.
인라지 마법을 시전하고 보니 머릿니의 알이 매우 많다. 그것들이 모두 없어질 때까지 빗어주었다.
“아……! 정말 머리가 시원해요. 그리고 너무 향기로워요.”
기름기가 빠진 세실리아의 머리는 붉은 기가 감도는 밝은 금발이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자라 있다.
현수는 이발 가위를 꺼내 대강 정리해 주었다.
군대에 있을 때 이발병이 제대하는 바람에 한 서너 달 후임들의 머리를 깎아준 적이 있다.
모처럼 그때의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마지막은 머리를 잡아주는 나비 모양 머리집게의 등장이다.
“야아, 이러고 보니 세실리아 참 귀엽네.”
현수는 인형 같은 세실리아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악취가 코를 찌른다.
‘으윽! 이게 무슨……?’
이 세상엔 휴지라는 게 없다. 비데도 당연히 없다. 그러다 보니 볼일을 보고 이를 위생적으로 처리할 수 없다.
겨울이라 목욕도 자주 안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용변 후 그냥 눈에 뜨이는 것으로 문질러 닦거나, 아니면 그냥 일어서야 한다. 그런데 빨래비누가 없다.
그러니 얼마나 냄새가 심하겠는가!
“세실리아, 너 아무래도 목욕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이잉… 저저번 달에 했는데 또요?”
“뭐어……? 여관 집 딸이면서 목욕한 지 석 달이나 되었어?”
“아빠가 목욕 자주하면 병난다고 해서 넉 달에 한 번씩 한단 말이에요.”
‘어휴! 더러워…….’
차마 말을 할 수 없던 현수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랬구나. 하지만 오늘 좀 씻으면 안 될까?”
“알았어요. 잘 생긴 아저씨가 씻으라니까 씻을게요.”
세실리아는 뽀르르 달려가서 나무토막들을 주워온다.
“그건 뭐하게?”
“물을 데우려면 불을 때야 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언제 씻어?”
“이따 저녁 때……!”
여관 뒤뜰엔 무쇠로 만든 커다란 통이 있다.
짐작으로 보아 2톤 가량 물이 들어갈 것 같다. 여기에 물을 붓고 하루 종일 불을 때야 비로소 따뜻해지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 사람들은 아침에 씻질 않는다고 했다.
하루에 딱 한 번 잠자기 전에 대강 먼지나 털어내는 게 전부이다. 이빨은 당연히 안 닦는다.
비위생의 극치이다.
‘흐음, 여기 있는 동안엔 계속해서 쫓아다닐 텐데 어쩌지? 에라, 모르겠다.’
현수는 지구 문물의 혜택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안 그러면 세실리아의 악취를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세실리아, 목욕하려면 어떻게 하지?”
“여기서 더운 물을 만든 다음에 길어다 써요.”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현수의 말에 세실리아는 귀를 쫑긋 세운다. 그런데 말해놓고 보니 조금 이상하다. 자신이 쓰는 방에 딸린 작은 목욕통에 물을 부어넣고 거기서 씻으라고 한 것이다.
잘못 들으면 로리타 성향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다. 세실리아 가족만이 사용하는 목욕통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목욕 중에 세실리아의 부모가 오면 안 된다. 낯선 손님이 나이 어린 딸을 목욕시키는 장면을 어찌 보겠는가!
다행히 이들 둘은 손님들이 아침을 모두 먹기 전까지는 주방과 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목욕통이란 걸 보았을 때 현수는 기함할 뻔했다.
때가 덕지덕지 묻은 지저분한 나무통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철수세미를 꺼내 오물들을 긁어냈다.
그리곤 찬물을 부어 여러 번 헹궜다. 그제야 말끔해진다.
다시 물을 부어넣고 히팅 마법으로 데웠다. 세실리아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불을 때고 있던 중이라 별일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