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물이 가득 차자 허브 중에서도 상쾌한 향이 나는 라벤더향 거품 입욕제를 넣었다. 그리곤 혼자서 씻도록 했다.
어린 아이지만 때까지 밀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세실리아가 목욕하는 동안 벗어놓은 옷은 세탁비누로 세탁을 했다. 그런데도 냄새가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악취에 찌든 때문이다. 히팅 마법으로 말려보니 여전히 풍기는 괴상한 냄새 때문에 눈을 찡그려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헹구는 물에 락스를 조금 넣고 헹구어냈다.
과연 탁월한 효과이다. 게다가 갈색이었던 옷이 원래 색인 아이보리 색으로 변해 있다.
이걸 말렸다. 이번엔 악취가 확실히 덜하다.
하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헹구는 시간이 짧았고, 워낙 악취에 찌들어 있었던 때문이다.
문득 페브리즈를 생각해 냈다. 악취를 없애는 한편 좋은 냄새가 나게 해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곰팡이나 바이러스 같은 세균들을 박멸해 준다고 광고했던 제품이다. 즉시 아공간을 뒤져 이것을 찾았고, 뿌리니 진짜 좋은 냄새가 나기는 한다.
좋아할 세실리아를 떠올린 현수는 흐뭇한 기분이 되었다. 하여 잘 말린 옷을 욕실 앞에 놓고 나왔다.
새벽의 공기는 신선하면서도 상쾌했다.
기지개를 켜고 관절을 풀어주는 몸 풀기를 마친 현수는 천천히 걸었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테세린의 이모저모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에서만 보던 중세 유럽의 풍경이 새삼스레 다가온 때문이다.
새들만 지저귀는 새벽의 테세린은 모든 것이 고요하다.
그런데 문득 아침 짓는 연기 냄새가 희미하게 풍긴다.
어린 시절 시골 외가집에서나 맡을 수 있었던 아련한 추억 같은 그 내음이다.
기분이 좋아진 현수는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꼬리가 붙어 있다. 어제 그 녀석들인 모양이다.
‘여길 뜰 때까지 따라다닐 건가? 그럼 조금 불편한데.’
이곳은 현수의 목적지인 아드리안 공국과 현재 적대 관계가 형성된 미판테 왕국의 영토이다.
따라서 자신의 행적이 드러나면 날수록 불편할 수밖에 없다.
자칫 국경을 넘을 때까지 어쌔신들의 끊이지 않는 추격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 저잣거리엔 엘리터를 단칼에 베어버린 자유기사 하인스에 관한 소식이 파다하였다.
백성들이 아는 것은 이것뿐이다. 하나 테세린의 영주인 로니안 자작에겐 보다 상세한 정보가 전해졌다.
자유기사 하인스가 본시 코리아 제국이란 곳의 백작이며, 수행원 없이 당도한 것으로 보고되어 있는 것이다.
입국 목적은 알려진 바 없다.
이에 로니안 자작은 미행을 붙였다.
제국의 백작씩이나 되는 고위 귀족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것도 혼자서 다른 나라를 여행하겠는가!
현수는 천천히 걸으며 향후의 계획을 정리했다.
“흐음! 이대로 계속되면 불편하겠군. 후후, 할 수 없지.”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을 정한 현수는 천천히 뒤로 돌았다. 따라오던 인영들은 즉시 은신할 곳을 찾아 숨어들었다.
“너희 넷은 이곳 영주가 보냈는가?”
“……!”
대답이 없다. 현수는 그냥 말을 이었다.
“그대들의 영주가 면담을 하고 싶은 모양이군. 좋다. 만나줄 용의가 있으니 내 뜻을 전하고 그 답을 가져오게,”
“……!”
“아다시피 난 세실리아네 여관에 있네. 내 아침 산책을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물러가 주게.”
“……!”
미행자들은 여전히 대답이 없다. 하나 현수는 안다.
잠시 머뭇거리다 모두 물러섰다는 것을……!
“흐음! 그럼 이제부터 천천히 둘러볼까?”
한 식경 동안 테세린의 저잣거리를 돌아다닌 현수는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아르센 대륙은 중세 유럽의 문명 이상을 넘지 못했다. 과학이라는 것은 태동 단계에도 못 미쳐 있다. 대신 마법만은 상당히 발전되어 광범위하게 이용되며, 응용되고 있다.
마법 무구나 스크롤을 파는 마법 상점이 상당히 여러 곳 있었기에 알아차린 것이다.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나름대로 홍보라는 것을 한다. 마법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 벽에 그림을 그려서 시선을 끄는 것이다.
이를 보고 추측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여관으로 돌아온 현수는 세실리아 부모가 만든 음식을 맛보았다. 사슴과 비슷한 동물의 고기로 만들었다는 스튜가 주메뉴였다. 맛은 괜찮았지만 누린내가 난다.
현수는 이럴 걸 대비하여 가방에 넣어두었던 후춧가루를 꺼냈다. 적당량을 뿌리니 한결 먹을 만해진다.
하여 막 먹으려는데 다른 사람들이 재채기를 한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모르는 척하고 먹었다.
거의 다 먹었을 즈음이다.
“저어… 기사님!”
“왜 그러는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현수는 부러 말을 놓았다.
그게 아르센 대륙의 예법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제가 감히 기사님께 여쭤봐도 되겠는지요?”
사내는 상당히 조심스러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평민과 기사 사이엔 넘을 수 없는 신분 격차가 있기 때문이다.
기사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간 단칼에 목이 베여 죽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건 것이다.
“물어봐? 내게……? 좋아, 그게 뭐지?”
“네, 조금 전에 기사님께서 스튜에 넣으신 그 가루가 뭔지 알고 싶은데 혹시 말씀해 주실 수 있는 건지요?”
“아, 이거……? 후춧가루라는 거네.”
“후춧가루요……?”
“그렇네. 내 고향에서 쓰는 건데 음식에서 냄새가 날 때 이걸 조금 넣으면 그 냄새가 많이 완화되지.”
“저어, 죄송하지만 제가 그걸 조금 맛볼 수 있을까요?”
30대 중반쯤 된 사내는 세실리아의 아빠인 듯하다. 현수는 이 사내가 왜 이러는지 의아했지만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러지. 가서 자네 스튜를 가져오게.”
“네, 감사합니다. 잠시만요.”
후다닥 갔다 온다. 조금 웃겼지만 현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후춧가루를 쳐줬다.
후르르르릅! 쩝쩝, 후르릅! 쩝쩝, 후르르르릅! 쩝쩝쩝!
“햐아, 정말……!”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만드는 동안 나는 냄새에 질리게 마련이다. 하여 자신이 만든 걸 잘 못 먹는다.
그런데 냄새가 바뀌자 맛도 달라진 듯하다.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후딱 해치운 세실리아의 아빠는 현수의 식탁에 놓인 후춧가루 병을 보았다.
위는 노란색이고, 아래엔 붉은 색 바탕에 흰색 문자 비슷한 게 보인다. 그 아래엔 나뭇잎사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오뚜기식품에서 만든 20g들이 후춧가루 병이다. 식료품점에서 1,000원 주면 살 수 있는 것이다.
“저어, 기사님……! 말씀드리기 외람스럽지만 혹시 이거 더 있으시면 제게 팔지 않겠습니까?”
사내는 말을 하면 무릎까지 꿇는다.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일 것이다.
“이걸 팔아? 자네에게……?”
“네. 사실 저희 집사람이 아기를 가졌는데 요즘 음식을 통 못 먹습니다요. 먹으려 하면 냄새가 난다고 해서요.”
세실리아에게 동생이 생길 모양이다.
한국에서도 임신한 여자들이 입덧을 심하게 하면 음식을 잘 못 먹는다는 이야길 들은 바 있다.
사실 현수에게 있어 후춧가루는 널리고 널린 평범한 물건이다. 그렇기에 까탈스럽지 않게 대꾸했다. 하나 약간의 장난기를 섞었다.
“좋네, 팔지! 한데 값은 얼마나 쳐주겠나? 이건 내 고향에서만 나는 특산물인지라 여긴 이런 게 없을 텐데…….”
짐짓 해보는 소리였다.
“네에, 저도 생전 처음 보는 물건 맞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쳐드려야……. 제가 넉넉하지 못해서 그러는데 혹시… 10실버쯤 드리면……. 아, 아닙니다. 기사님께서 값을 부르십시오.”
현수는 케이상단의 알론과의 대화를 통해 이곳의 화폐 가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둔 바 있다.
이곳에서 1쿠퍼는 한국에서 약 100원이다.
100쿠퍼가 1실버이니, 1실버는 1만 원 가치가 있다.
이런 실버 100개가 있어야 1골드가 된다. 따라서 1골드는 100만 원의 가치가 있다.
현수의 아공간에 원래부터 있던 금화는 10골드짜리였고, 은화 역시 10실버짜리이다.
이곳은 1쿠퍼, 10쿠퍼, 1실버, 10실버, 그리고 1골드, 10골드짜리 화폐가 통용되는 세상인 것이다.
세실리아의 아빠인 얀센은 후춧가루 한 병에 10실버, 한화로 약 10만 원을 불렀다.
1,000원의 딱 100배 정도 되는 값을 부른 것이다.
“흐음! 10실버라…….”
고민하는 척하자 몸이 달아오른 얀센이 값을 올린다.
3장 하인스상단을 만들다.
“더 달라면 더 드리겠습니다. 15실버… 아니 20실버 어떻겠습니까? 제 아내에게 꼭 필요한 물건인 것 같습니다. 이걸 제게 팔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름이……?”
“얀센입니다, 기사님!”
“좋아, 얀센! 우리 따로 이야기할까?”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 있기에 불편했던 것이다.
얀센은 즉시 내실로 안내했다.
“먼저, 이곳에서 여관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나?”
“네……?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묻는 것이네.”
“아, 네에. 다음 달이 되면 딱 2년이 됩니다.”
“전엔 무엇을 하였지?”
“스페른상단의 지부에서 일을 했습죠.”
스페른상단이란 미판테 왕국 전역에 걸쳐 영업을 하는 거대 상단의 명칭이다.
‘역시……!’
현수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생각을 했다. 얀센은 아무리 보아도 식당 주인을 할 얼굴이 아니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게서 무슨 일을 했는가?”
“저는 지부 서기였습니다. 상단 지부의 대소사를 다 맡아서 처리하는 업무를 맡았습죠.”
“그런데 왜 그만두었지?”
“아이가 태어나서……. 그리고 지부에 있으면 늘 상행을 나가야 하기에 자주 집을 비우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불한당 하나가 아내에게 자꾸 집적거려서…….”
“흐음! 그랬군. 어쨌거나 자네는 이 후춧가루 한 병의 가치가 어느 정도라 생각하나?”
현수가 후춧가루 병을 내밀자 얀센은 새삼스레 이모저모를 자세히 살폈다. 병의 재질은 보석인 유리이다.
노란색 뚜껑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톡 쏘는 냄새를 맡아보니 이게 아까 그건가 싶다.
하지만 확실히 음식에서 나던 냄새가 사라졌다.
“흐음! 솔직히 말씀드려 이건 값을 매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엔 20실버까지 내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제가 가진 게 그거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자네가 보기에 이 물건의 가치는?”
“이건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건입니다. 그런데 이를 포장한 용기가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혹시 귀족이십니까?”
얀센은 어찌 평민이 이처럼 귀한 물건을 들고 다니겠는가 싶었다. 하여 말투가 보다 정중해졌다.
현수는 대답 대신 말을 약간 더 낮췄다.
“그럼 이것은 얼마만 한 가치가 있지?”
이번에 꺼낸 것은 양철통으로 만들어진 네모진 후춧가루 통이다. 역시 대한민국의 오뚜기식품에서 만든 것이다.
“이건……?”
“통의 재질은 얇은 철판이네. 내용물은 방금 전에 본 것과 똑같은 것이지. 하나 양은 약 5배가 들었네.”
얀센은 현수의 말에 자세를 바로 잡았다. 단순히 하나를 팔려는 것이 아님을 느낀 것이다.
“기사님……!”
“그걸로 장사를 해볼 생각 없나?”
“저어, 죄송하지만 이 여관을 사느라 돈을 다 써서 제게 여유가 없습니다.”
욕심은 나지만 잘못되면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알기에 얀센은 솔직하게 말한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나? 물건은 내가 대주지. 팔리면 그때 이익금을 나누는 것으로 하면 어떤가?”
“하면……!”
얀센의 표정은 금방 상기되었다. 침체되어 있던 얼굴에 생기가 도는 듯한 느낌이다.
“얀센이라 했지?”
“네. 기사님!”
“자네가 값을 매겨보게. 자넨 이걸 얼마에 팔 텐가?”
“먼저, 이 유리병에 든 것의 가격은 50실버, 아니, 1골드까지는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더 큰 이것은 4골드가 적정하구요.”
“귀족들이나 쓸 수 있다 생각하는가?”
“그렇습죠. 우리 같은 평민에겐 과분한 물건이지요.”
얀센의 표정은 어느새 차분해져 있었다.
‘흐음! 한 병에 1골드라……. 1,000배 장사군. 아니다! 도매로 사면 훨씬 저렴할 테니 더 많이 남겠군.’
현수는 갑자기 왜 장사할 생각이 났는지 알 수 없지만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천지건설에 왜 다닌 것인가?
혹자는 성취감을 이루기 위해 직장에 다닌다고 할 것이다. 하나 현수는 순전히 돈 벌기 위해 회사를 다녔다.
목구멍이 포도청만 아니었다면 남의 밑에서 굽실거리며 회사를 다닐 이유가 없다. 박진영 대리의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참아낸 것도 매달 받는 월급 때문이다.
그렇기에 돈을 버는 이야기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게다가 킨샤사에 머무는 며칠 동안 돈을 벌어볼 생각을 했다. 마땅한 것이 없어 그러지 못했을 뿐이다.
“얀센……! 내가 자네를 믿어도 되나?”
현수의 물음에 얀센은 즉각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단 자네를 시험해 보겠네. 그래도 좋은가?”
“네, 얼마든지…….”
“좋네, 일단 똑같은 것으로 100개씩 맡겨보지.”
“네에……? 100개씩이나요?”
500골드면 5억 원이다. 한국에서도 큰돈이지만 미판테 왕국에선 더 크게 느껴지는 액수일 것이다.
그렇기에 얀센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어려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