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로니안 자작은 당년 45세로 작고한 부친으로부터 15년 전에 작위를 물려받았다.
검술에 관심을 가졌지만 현재 소드 익스퍼트 하급 수준이다.
부인인 세실리아 자작부인은 40세로 사치가 심하다.
젊어서 미인으로 소문이 났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늙어가기 때문이라 한다. 얼굴 꾸미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그런데 진짜 흔한 게 세실리아라는 이름인 모양이다. 하여 현수는 자작부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내심 실소를 지었다.
아들 둘은 현재 모두 수도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수학 중이라 한다. 딸이 하나 있는데 로잘린이다.
올해 19살이 되었는데 통 시집갈 생각을 안 해 부모의 속을 끓이는 중이다. 로잘린의 취미는 정원 가꾸기이다.
쿵, 쿵, 쿵―!
현수가 등장하자 흰 장갑을 낀 시종이 대리석 바닥을 예식용 스태프로 두들기며 엄숙한 음성으로 소리친다.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멀린 백작님 드십니다.”
현수는 하인스 킴이라는 이름이 이실리프 마법사로 알려졌을 것이라 짐작했기에 멀린의 이름을 차용했다.
“어서 오십시오. 미판테 왕국 테세린의 영주 데니스 로니안 드 테세린 자작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멀린 백작입니다.”
“저의 초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은 제 아내인 세실리아 로니안 드 테세린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화려한 드레스의 양쪽을 잡고 살짝 고개를 숙이는 세실리아는 매우 우아했으며 아름다웠다.
현수는 문득 예전에 보았던 영화배우 하나가 떠올랐다.
‘대통령의 연인’이라는 영화에 출현한 ‘아네트 베닝’이라는 여배우다. 지적이며 우아한 모습을 연기했었다.
세실리아 자작부인이 바로 그렇다.
귀족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자작부인으로 사는 동안 자연스럽게 몸에 밴 우아함과 고상함이 느껴진 것이다.
나이 40이라 그런지 숙였던 고개를 들자 눈 밑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보인다. 제 아무리 미인이라 하더라도 흐르는 세월은 못 속이는 것이 분명하다.
“이쪽은 제 딸아이인 로잘린이라 합니다.”
“처음 뵙습니다. 하인스 백작님!”
“반갑습니다. 로잘린 양!”
19살 로잘린은 엄마와는 달리 수수한 차림이다. 하나 옷차림이 아름다움을 감출 수는 없는 모양이다.
현수는 로잘린을 처음 보는 순간 ‘로마의 휴일’에 나온 발랄한 ‘오드리 헵번’6)을 떠올렸다.
“자아, 우선 자리에 앉지요.”
로니안 자작의 안내로 착석을 했다. 길이가 15m는 넘는 긴 식탁이다. 이 정도면 버스 한 대 길이이다.
양쪽 끝에 앉으니 상대가 보이지 않는다. 중간 중간 촛대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로니안이 식사를 하기 위해 냅킨을 집어들 때이다.
“험험, 로니안 자작님!”
“네, 백작님.”
“우리 코리아에선 식사를 할 때 가깝게 앉습니다. 그래야 친밀감이 더 생기니 말입니다.”
“아……! 그럼 자리 배치를 바꾸실까요?”
무슨 뜻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로니안 자작은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멀린이라는 백작을 보다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오찬에 초대했다.
그런데 귀족의 예법에 따라 손님을 앉혀놓고 보니 멀다.
대화를 하려면 목에 힘을 줘야 할 상황이다. 하여 마음에 들지 않던 터였다. 그건 현수도 마찬가지이다.
이곳은 아드리안 공국과 가장 먼 곳에 위치한 미판테 왕국의 도시이다.
이런 도시의 영주와 친해두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게다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일이긴 하지만 하인스상단의 본점이 있을 자리이다. 그렇기에 보다 많은 대화를 위해 자리를 바꾸자고 청한 것이다.
“그래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시종들이 달려들자 자리가 금방 바뀌었다.
자작의 좌우에 자작 부인과 로잘린이 앉았다. 현수는 당연히 맞은편에 앉았다.
“요리장의 솜씨가 형편없더라도 욕하지 마십시오.”
“무슨 말씀을……. 오는 동안 시종에게 듣자하니 솜씨가 일품이라 하더군요. 그래서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하, 그래요? 사실 백작님을 모시고 온 시종이 요리장의 남편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한 듯 하군요.”
“하하……! 그렇군요.”
현수는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듣자하니 시종도 없이 혼자 강을 건너오셨다고요?”
“네, 여행의 참맛이란 어느 누구의 간섭도 없어야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한데 정처없는 여행은 아닌 듯한데 무슨 특별한 목적이라도 있는지요?”
“아아, 정치적인 목적은 손톱 끝만큼도 없습니다. 미판테 왕국을 염탐하러 온 것도 아니구요.”
“어이쿠, 별 말씀을…….”
로니안 자작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백작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아……! 그렇군요. 정말 유감입니다.”
자작은 현수가 부친상을 당해 작위를 물려받은 것으로 오해하는 모양이다. 이걸 굳이 아니라 할 필요가 없겠다 싶어 대꾸 대신 제 할 말을 했다.
“이제 평생토록 정무(政務)에 시달릴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전에 세상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싶었습니다.”
“아……! 이해합니다.”
로니안 자작 본인도 정무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뭔 놈의 일이 그렇게 많은지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는다.
그걸 평생토록 할 생각을 하면 끔찍할 것이다. 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이토록 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슨 말씀을……! 제국의 백작님이시니 당연히 모셨어야지요. 여기를 집처럼 여기고 편히 머무십시오.”
“네에,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대화하는 동안 음식이 나왔다. 예상과 다를 게 없다.
강 근처에 있어 생선 요리도 많았지만 그보다 육류가 더 많았다. 그런데 거세7) 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누린내가 심하게 난다. 억지로 먹어보려 했으나 견디기 힘들어 포크를 내려놓았다.
“왜 그러십니까? 음식이 입에 안 맞습니까?”
스테이크를 썰던 자작의 물음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법대로라면 아무리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인상조차 찌푸리지 않고 맛있는 척하며 먹어야 한다. 그런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여기는 우리 코리아와는 조리 방법이 다른 모양입니다. 잠시 실례를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조금 언짢은 표정이다. 하긴 초청받은 손님이 음식 타박을 했는데 어찌 안 그렇겠는가!
세실리아 자작부인도 로잘린도 표정이 좋지 않다.
아무리 제국의 백작이라 할지라도 초면인 자리에서 이러면 안 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후춧가루를 꺼내 스테이크에 뿌렸다. 그리곤 나이프로 썰어서 먹었다.
다른 종류의 음식을 먹을 때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표정이 다르다. 아까는 눈살을 찌푸리며 먹던 것을 멈췄다. 그런데 뭔지 알 수 없는 것을 뿌리고 나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잘만 먹는다.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하여 로니안 자작이 물었다.
“백작님! 그게 뭡니까?”
“이건 후춧가루라는 건데 고기에서 나는 누린내를 없애주는 효과가 있는 겁니다. 한번 경험해 보시겠습니까?”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그래주시면 좋겠습니다.”
“두 분도 드릴까요?”
“네에. 저도 주세요.”
세실리아와 로잘린에게도 후춧가루가 갔다.
이럴 걸 예상하고 이곳에 오기 전에 겉에 있던 비닐 포장을 벗겼다. 또한 안에 있던 노란 마개 역시 제거한 상태이다.
“으으음……! 어떻게 이런……!”
“어머……! 냄새가 안 나요.”
“어라……? 어떻게 이런 일이……?”
썰어놓은 스테이크에 후춧가루를 뿌리고 포크로 그것을 찍어 입에 넣은 셋은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후후, 얀센! 자네 이제 곧 부자 되겠네.’
현수는 싱긋 웃음 지었다. 개구쟁이의 웃음이다.
“쩝쩝……! 백작님. 이건 대체 뭡니까?”
“아, 그건 후춧가루라는 겁니다. 코리아 제국에서만 나는 식물의 일종이지요.”
“으음, 이걸 뿌리니 정말 냄새가 확 가시는군요. 아아, 알겠습니다. 백작님이 왜 조금 전에 못 먹겠다고 말씀하셨는지.”
비교할 요량으로 후춧가루를 뿌리지 않은 것을 냄새를 맡아본 로니안 자작의 말이다.
“자작부인께서도 그렇게 느끼십니까?”
현수의 물음에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고기가 들어 있어 대답하기 곤란했던 것이다.
대신 곁에 있던 로잘린이 대답한다.
“정말 탁월한 제향 효과군요. 백작님 덕분에 안목을 높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쭈……! 19살이라고 들었는데 제법인데?’
현수는 당당한 로잘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보면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뜻일 것이다.
식사를 마친 넷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갔다.
그리곤 밤이 이슥하도록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하나 특별한 알맹이는 없는 대화였다.
응접실에 당도해 보니 소파 비슷한 것이 있는데 크고 화려하긴 하다. 하나 솜도 없고, 스펀지도 없는 곳인지라 앉아보니 약간 딱딱하다는 느낌이었다. 나무 의자 위에 옷가지 같은 것을 얹어놓고 적당한 천으로 감싼 정도이다.
우지스 시종이 와서 뭔가를 내려놓았는데 그냥 맹물이다. 아르센 대륙엔 차라는 것이 없거나 아주 귀한 모양이다.
현수는 이들과 친해둬서 손해 볼 일이 없겠다는 생각에 마법 배낭에서 유리병에 담긴 사과 주스 세 개를 꺼냈다.
“백작님, 그건 뭡니까?”
“아! 이건 본국 특산품인 사과 주스라는 겁니다.”
“사과 주스요?”
현수가 병을 돌려 사과 그림을 보여주었다.
“어라! 그건 요카라는 과일입니다만…….”
“코리아 제국에선 이걸 사과라 합니다.”
동네가 다르면 부르는 이름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로니안 자작은 별다른 이의 제기가 없었다.
“그래요? 근데 시고 떫기만 한 이걸 왜……?”
보아하니 모양은 비슷한데 맛은 다른가 보다. 현수는 싱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 특별히 여자들에게 좋은 겁니다. 노화 방지와 피부 미용에 탁월한 효과가 있음이 밝혀졌거든요. 뿐만 아니라 소화에도 좋고 다양한 질병의 위험도를 낮춰준다고 합니다.”
“정말이에요?”
당연히 세실리아 자작부인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다. 로잘린 역시 흥미 있다는 듯 눈빛을 빛냈다.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현수는 사과의 효능 하나를 더 이야기했다.
“사과엔 피부 트러블, 특히 얼굴에 무언가가 나는 것을 감소시켜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한번 드셔 보시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어서 맛보고 싶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럼 잠시만…….”
싱긋 미소 지은 현수가 잠깐 흔들었다가 뚜껑을 비틀어 따자 경쾌한 소리가 난다.
딱―!
“자아, 한번 드셔보십시오. 로잘린 양도.”
딱―!
“난 안 줍니까?”
“하하, 그럴 리가요? 자작님도 한번 드셔보십시오.”
딱―!
꿀꺽―! 꿀꺽―! 꿀꺽―!
“어머나! 세상에 이런 맛이라니……. 너무 달고, 너무 향기로워요. 그리고 너무 부드럽구요.”
세실리아의 말에 현수는 한 병을 더 따서 줬다.
“그래요? 그럼 한 병 더 드십시오.”
딱―!
꿀꺽―! 꿀꺽―! 꿀꺽―!
“흐으으음……!”
세실리아는 귀족부인의 체통을 잊었다는 듯 온몸으로 사과 주스의 맛을 표현하고 있었다.
처녀답게 엄마와 달리 조금씩 얌전히 맛을 보던 로잘린 역시 처녀라는 허울을 벗은 듯 원샷했다.
“백작님, 저 한 병만 더 주시면 안 돼요?”
로잘린은 염치를 무릅쓰고 한 병 더 청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에 완전히 매료된 탓이다.
결국 자작 일가는 모두 3병씩 마셨다. 식사를 한 직후라 그렇지 안 그랬다면 적어도 10병씩은 더 마실 기세였다.
“덕분에 정말 귀한 것을 맛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원, 별 말씀을……. 덕분에 고기 맛을 보지 않았습니까?”
“아이고, 비교할 게 따로 있지……. 이렇듯 귀한 것을……!”
한국이라면 초등학교 급식 후에 간식으로 나올 사과 주스 9병에 귀족 일가의 반응치고는 너무도 열렬하다.
“그나저나 유람은 얼마나 하셨습니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여기저기 며칠씩 찔끔찔끔 머무른 게 전부입니다.”
“그래요? 그냥 여기저기 다니신다고요?”
로니안 자작은 코리아 제국의 귀족 하인스 멀린 백작에 대한 보고를 왕궁에 보내야 한다.
그렇기에 물은 것이다.
한편, 현수는 식사하는 내내 미판테 왕국을 방문한 목적을 구상했다. 그럴 듯해야 하기에 여러 생각을 해야 했다.
“흐음, 솔직히 이번 여행은 이국의 문물을 경험하는 동안 반려(伴侶) 될 사람을 찾아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반려라면……?”
“제가 백작위를 물려받은 이후 제국의 귀족가에서 많은 초청을 받았습니다. 제 영지에 특산물이 제법 많기에 이를 노린 정략혼 때문이지요.”
“사과 주스나 후춧가루 모두 백작님 영지의 특산물인가요?”
“그렇습니다.”
“으으음! 충분히 그렇겠습니다.”
로니안 자작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진다. 이곳 미판테 왕국에선 여자 나이 열여섯이면 결혼을 한다.
그래서 로잘린이 12살이 되던 해부터 끊임없는 청혼이 있었다. 왕국의 관문 가운데 하나인 이곳 테세린의 부유함을 노린 청혼이다.
누구든 로잘린과 결혼을 하게 되면 막대한 지참금을 얻을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로니안 자작에게 딸이라곤 로잘린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로니안은 딸이 결혼할 때를 대비한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