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소문처럼 막대하지는 않지만 웬만한 영지 하나는 충분히 부흥시킬 만한 돈이다.
당연히 빗발치는 청혼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거절되었다. 당사자인 로잘린이 싫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틀에 한 번 꼴로 결혼하고 싶다는 청년들이 영주관의 정문 앞에 줄을 섰다.
테세린 최고의 미녀인 로잘린과 엄청난 지참금 두 가지 모두를 얻기 위함이다.
가장 마지막으로 청혼한 사람은 왕자이다. 이를 위해 왕국의 시종장이 직접 이곳 테세린을 방문했다.
국왕의 직인이 찍힌 청혼서를 들고서……!
이 청혼을 받아들이면 풍습상 로니안 자작은 한 계급 승차하여 백작위를 제수받는다. 왕자의 장인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 이마저 거절했다.
아직 결혼에 뜻이 없다며 정중히 고사한 것이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왕실에서 이에 대한 징계를 준비하던 무렵 아드리안 공국에 대한 침공이 결정되었다.
눈치 빠른 로니안은 즉각 2만 골드를 왕궁에 헌납했다.
1골드가 100만 원 가치를 지녔으니 200억 원이나 되는 거금이다. 하여 간신히 무마된 것이다.
왕자의 청을 거절한 이후 빗발치던 청혼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뚝 끊겼다. 그도 그럴 것이 청혼을 했다가 이를 받아들이면 왕가에 대한 모독이 된다.
누가 이런 위험 또는 불이익을 감수하려 하겠는가!
덕분에 테세린은 평화로운 영지가 되었다.
로니안 자작은 이런 상황을 겪었기에 하인스 백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한데 왜 코리아 제국에서 반려를 찾지 않고 이렇듯 타국을 다니시는지요?”
“살아보니까 어느 누구를 반려로 선택하기가 쉽지만은 않더군요. 아시지요? 세력간의 균형이란 말을…….”
로니안 자작은 현수가 하는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긴 몰라도 코리아 제국 역시 미판테나 다른 왕국과 마찬가지로 귀족들 간의 알력이 있는 듯하다.
하인스 멀린 백작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기에 어느 한 곳을 선택하면 다른 곳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모양이다.
그렇기에 선택의 어려움을 겪는다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현수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코리아 제국에도 미녀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제 반려가 되었으면 하는 여인은 드물었지요. 그런데 누군가 그러더군요. 세상은 넓고 여자들은 많다고…….”
현수는 과거 대우그룹을 일으켰던 김우중 회장의 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를 교묘히 각색했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로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을 돌아보고 있는 중이지요. 참, 자작님께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들어주실 수 있는지요?”
“무슨 부탁이십니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리지요.”
로니안 자작은 상당히 협조적인 자세가 되었다. 현수가 마음에 든 까닭이다.
“아시다시피 저는 타국의 귀족입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의 목적은 경험도 경험이지만 반려를 얻고자 함이 더 크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분을 증명할 때마다 여러 이야길 해야 합니다.”
“아……! 저도 경비대장으로부터 보고 받았습니다. 아주 특이한 신분증을 가지고 계시다고요.”
“네, 이것이 본국의 귀족 증명서이지요.”
현수는 천연덕스럽게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로니안 자작은 정교함에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실리아 자작부인과 로잘린도 놀라는 표정이다.
사방 2㎝ 정도 되는 크기 안에 실물과 똑같은 그림을 정교하게 그려놓았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대단한 기술력입니다. 이건 어떤 마법으로 만들어지는 겁니까? 그리고 이것의 재질은 뭡니까?”
플라스틱을 어찌 설명하겠는가!
현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를 기밀 누설 여부로 고심하는 듯 느낀 자작은 말없이 기다렸다.
“사실 이 증명서의 재질은 드래고니안의 비늘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이 귀족 증명서는 고위 마법사가 심력을 기울여 제작한 것이지요.”
“네에……? 드, 드래고니안이라고요?”
셋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미판테 왕국의 중심부엔 라수스 협곡이란 곳이 있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두 산맥 사이를 일컫는 말이다.
이 산맥들은 국토를 양분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넘나드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여 예전엔 라수스 협곡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미리엄 왕국과 이판테 왕국이 그것이다.
600여 년 전, 이판테 왕국의 국왕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미리엄 왕국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곤 남쪽 바다를 이용한 침공을 시도했다.
결국 미리엄 왕국은 패망했다.
이후 전쟁에 진 왕국의 모든 것을 차지하기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왕국의 이름을 변경했다.
이판테(Ipante) 앞에 미리엄(Mirium) 왕국의 이니셜인 M을 추가한 것이다. 하여 미판테라는 해괴한 이름이 된 것이다.
어쨌거나 이 협곡은 사람들의 발길을 거부한다.
누구든 발을 들여놓으면 한 줌 혈수로 녹아내리거나 몬스터의 먹이로 전락했다.
포악한 성품인 레드 드래곤 라이세뮤리안과 그가 처녀들을 납치하여 낳은 아이들, 드래고니안 때문이다.
왕국에선 이들을 격멸하거나 퇴치하기 위해 많은 병사들을 투입했다. 그 과정에서 소드 마스터 셋을 잃었다.
왕자 하나의 목숨도 사라졌고, 많은 기사와 병사들 또한 세상을 떴다. 그럼에도 임무엔 실패했다.
드래고니안들은 난공불락의 성을 쌓고 그 안에 머문다.
그리곤 라수스 협곡을 침입하는 모든 존재를 말살시키고 있다. 따라서 드래고니안에 대한 것을 가장 잘 아는 곳이 바로 미판테 왕국이다.
그런데 그런 드래고니안의 비늘로 만든 귀족 증명서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7장 자작부인 목욕시키기
“설마 코리아 제국에서 드래고니안들을 사냥한 겁니까?”
“왜 그리 놀라십니까?”
“드래곤의 보복은 없었습니까?”
“드래곤이요……? 우리 코리아 제국엔 드래곤이 없습니다. 모두 멸종당했거든요.”
“네에? 드, 드래곤이 멸종당했다구요?”
“세, 세상에……!”
자작 부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까지 창백해졌다.
“백작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 누가 드래고니안과 드래곤을 사냥한 겁니까?”
로잘린이 물었다. 현수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야, 병사들이 나서서 제거를 했지요.”
“네에……? 병사들이요? 기사들이 나선 게 아니구요?”
“흐음, 기사들도 몇몇 나서긴 했지요. 하지만 대부분은 병사들이 처리했습니다.”
말을 하면서 현수는 K―2 소총과 대전차로켓 RPG―7VR로 공룡을 사냥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놀랍군요. 코리아 제국이라는 나라는…….”
로잘린의 큰 눈은 더욱 커졌다. 그런 그녀의 시선 속에 현수가 담겨 있다. 당연히 존재감이 더욱 커진 상태이다.
“제가 자작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건 평민이라도 좋으니 이곳의 신분증을 하나 얻었으면 합니다.”
“네에……? 왜요?”
“저는 제국의 백작입니다. 조금 전에 맛보셨던 사과 주스와 후춧가루로 제 영지는 부유합니다. 그런 제가 아내를 얻기 위한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알면 누구나 저와 밀접한 관계가 되기를 바랄 겁니다.”
로니안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님은 어떠십니까?”
“솔직히 그렇습니다. 우리 영지도 백작님과의 인연이 조금 더 밀접해지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한데 전 그게 불편합니다. 제가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미천한 신분이라 할지라도 저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아아아……!”
현수의 말이 끝날 즈음 로잘린이 신음 같은 소리를 낸다.
신분은 제국의 백작!
그가 속한 나라는 병사들만 나서도 드래곤을 사냥해서 죽일 정도로 강력하다. 그런데 젊고, 잘 생긴데다, 부유하기까지 한 귀족 사내가 아내를 얻기 위해 여행을 한다고 한다.
참으로 로맨틱하지 않은가!
여린 가슴을 뒤흔들기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췄다.
수학에선 명제와 그 역이 모두 참일 때 이렇다 한다.
다시 말해 ‘A이면 B이다’가 참이고, 거꾸로 ‘B이면 A이다’가 모두 참일 때, A에 대한 B, B에 대한 A를 일컫는 말이다.
이는 두 개의 명제 모두 근본적으론 같다는 뜻이다.
현수는 상대의 반응을 보아하니 자신의 뜻대로 될 것만 같다 느꼈다. 하여 편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만들어주실 수 있다면 신분증 하나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평민의 것으로……!”
“네, 물론입니다. 당장 만들어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그에 대한 답례로 부인과 영애께 자그마한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허락해 주실 수 있는지요?
“네? 선물이요……?”
선물 싫어하는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세실리아 자작부인과 로잘린의 눈은 금방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로니안 자작을 보고 있었다.
여인들과 눈을 맞추면 안 될 것만 같아서이다.
“백작님의 호의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을 마친 현수는 마법 배낭에서 두 가지를 꺼냈다.
하나는 ‘이자녹스 링클 디클라인 엠엑스 280’이라는 제품이다. 가격표를 보니 30㎖에 16,500원이라 쓰여 있다.
“이건 눈가의 주름을 없애주는 효능이 있는 겁니다. 어느 정도 효능이 있는지 보여 드릴 테니 손등을 보여주십시오.”
현수의 말에 세실리아 자작부인은 즉시 손을 내밀었다.
“자아, 한쪽에만 이걸 바를 것이니 양쪽 손등을 잘 비교해 보십시오.”
아주 조금 짜서 손등에 묻히고는 살짝 펴 발랐다.
“어머나!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양쪽 손등을 비교하던 세실리아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달라도 너무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건 자작부인께서 쓰십시오. 주름 개선 효과가 있는 겁니다. 주의할 점은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아주 조금씩만 쓰시라는 겁니다.”
“네, 고맙습니다. 백작님!”
“로잘린 양은 젊으니 향수를 드리지요.”
“향수요……? 그게 뭔가요?”
현수가 꺼낸 것은 왕관 모양으로 생긴 것이다. 안에는 연한 초록빛 액체가 출렁인다. 라벨엔 바닐라향이라고 쓰여 있다.
양은 많지만 가격은 얼마 안 되는 것이다. 하나 이곳은 브랜드를 따지지 않는 곳이다.
“이건 이렇게 쓰는 겁니다.”
자세한 설명 대신 시범을 보이려 로잘린의 손목 안쪽에 향수를 뿌렸다.
“냄새 한번 맡아보세요.”
“어머나! 이 향기……! 너무 달콤해요. 아아아……!”
귀족이기에 코찔찔이 세실리아 여관의 세실리아보다는 냄새가 덜 날 것이다. 하나 휴지가 없고, 비데가 없으며, 생리대가 없기는 밖이나 여기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비누도 없고, 샴푸도 없으며, 질 세정제인 지노베타딘도 없다. 그렇기에 향수를 선물할 생각을 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하하, 자작님이 조금 서운하신 듯합니다.”
“아, 아닙니다. 벌써 귀한 물건을 많이 내놓으셨습니다.”
자작은 짐짓 사양했지만 표정은 아니다.
“자작님께는 비누라는 걸 선물하지요.”
“비누요?”
“설명해 드릴 테니 손 씻을 물을 떠오라 해주십시오.”
조금 전 식사하는 동안 자작은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기도 했다. 포크는 고기 찍어먹을 때만 쓰는 모양이다.
그때 현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하긴 셰익스피어가 지은 햄릿, 오셀로, 로미오와 줄리엣, 리어왕을 읽어보면 스푼과 포크, 그리고 나이프에 관한 구절이 없지. 그 시절엔 그런 게 없었으니까. 그럼 그 시절엔 엘리자베스 여왕도 맨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뜻이야.’
이곳도 포크의 출현이 얼마 되지 않았다면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일이 부끄러운 것은 아닐 것이다.
비위생적이라는 것만 문제일 뿐이다.
잠시 후, 시종이 물을 떠왔고 로니안 자작은 자기 손에서 나온 때 구정물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세실리아나 로잘린도 마찬가지이다.
현수로부터 자세한 사용법을 들은 세실리아는 즉시 목욕물을 데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마법 배낭에서 꺼낸 비누의 숫자는 10개이다.
이건 합법적인 평민 신분증을 위한 대가이다. 또한 미판테 왕국에서의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너무 많이 줘도 문제가 되고, 너무 적으면 섭섭해할 것이기에 고심 끝에 꺼내 놓은 것이다.
세실리아와 로잘린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현수는 합법적인 평민 신분증을 얻었다. 이름은 하인스이다.
자작은 혹시 모른다면서 준남작 신분증 하나를 더 만들어주었다. 로니안 자작가의 기사 신분증이다.
이름은 역시 하인스이다.
예상치 못한 배려에 대한 답례로 현수는 세실리아와 로잘린을 위한 세탁비누 몇 장을 꺼냈다.
로니안은 이것으로 둘의 의복을 세탁해 보라는 명을 내렸다. 현수는 하녀에게 세탁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하녀마저 나간 이후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로니안의 태도는 전보다 더 정중하면서도 친근해졌다.
처음엔 현수가 사기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 비누와 향수 같은 귀물을 어찌 일개 사기꾼이 가지고 다니겠는가!
그렇기에 제국의 백작이라는 것을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한편, 현수는 얻고자 하는 것들을 모두 얻어 편한 마음이 되었기에 로니안 자작의 궁금증을 풀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