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그런데 자꾸 발을 비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발이 간지러우면서 가려워 미치겠다고 한다.
틀림없는 무좀이다!
신발을 벗기니 악취가 장난이 아니다. 물집과 진물 때문이다. 즉시 물이 대령되었고, 세탁비누로 발을 닦게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아공간을 뒤져 무좀약 3가지를 꺼냈다.
모두 연고 형태이다. 코리아 제국의 마법사가 만든 귀한 치료약이라 설명했다.
하나를 다 바르고 난 다음에 다음 것을 바르는 방법으로 3개를 다 쓰면 괜찮아질 것이라 하니 얼굴이 환해진다.
그런데 조금 전에 벗었던 그 신발을 도로 신으려 한다.
하여 등산화 한 켤레를 내놓았다. 가벼우면서도 공기는 잘 통하고 발이 편하다고 광고해서 현수도 가진 것이다.
부수적으로 등산 양말까지 따라 나왔다.
자작은 너무도 가볍고 편한 신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귀한 물건은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자작은 화수분처럼 온갖 귀한 물건들이 튀어나오는 마법 배낭이 탐나는지 유심히 바라본다.
사실 이건 마법 배낭이 아니다.
평범한 가죽 가방일 뿐이다. 현수는 이 속에 손을 넣은 상태에서 아공간을 열어 안에 담긴 것을 꺼내는 것이다.
마법사라는 것을 감추기 위한 계책의 일환이다. 어쨌거나 로니안 자작의 입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현수는 얻을 것 다 얻었으니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극구 붙잡는다. 무좀 치료하는 동안 모녀에게 목욕을 권했다. 그런데 아직 세실리아와 로잘린의 목욕이 끝나지 않았으니 나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것이다.
이유는 본인 입으로 반드시 감사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순간, 세실리아와 로잘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첫째, 목욕통의 물에서 고린내가 난다.
둘째, 사용한 목욕통에 시커먼 때가 둥둥 떠다닌다.
시비들이 현수가 준 이태리타월로 모녀의 몸을 문지르는데 밀어도 밀어도 끝없이 때가 나온다.
피부의 노폐물이 다 없어지면 더 이상 안 나온다고 했는데 계속 때가 나와 목욕을 마치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다리다 지친 현수는 영주성의 곳곳을 구경시켜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로니안 자작이 직접 안내를 하겠다고 나섰다.
귀빈이 그냥 가버릴까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하여 애써 떨구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대신 수석시종이 붙어다니며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현대에 살던 현수에게 있어 영주의 성은 별로 볼 게 없다. 그저 몇 가지 색뿐이고, 모든 재료는 돌 아니면 나무뿐이다. 치운다고 치웠지만 지저분하고 우중충하다.
특별하게 관심 기울 것이라곤 별로 없다.
한 바퀴 돌고 돌아오니 자작도 목욕하러 들어갔다고 한다. 하릴없어진 현수는 서성이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서재를 들어가 보았는데 읽을 만한 책이 없다. 멀린의 레어에 있을 때 너무 많이 읽은 탓이다.
그러다 발견한 게 자작이 벗어놓은 옷이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뭔가 꾸물거리는 것이 보인다.
빈대다! 빈대는 먹이를 먹기 전의 몸길이는 6.5∼9㎜이고, 몸 빛깔은 갈색이다. 그러나 먹이를 먹으면 몸이 부풀어오르고 몸 빛깔은 붉은색이 된다.
현수는 붉은 빛을 내는 빈대를 보곤 혀를 찼다.
“쯧쯧! 쯧쯧쯧……!”
귀족이 이러니 평민은 어떻고, 농노나 노예의 삶은 어떠하겠는가! 어린 세실리아의 머리에 서캐가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별로 이상할 일이 아니다
아무튼 빈대는 연막으로 잡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는 해충이다. 물론 연막은 넉넉하게 있다.
백두마트 창고에 제법 많은 재고가 있었던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남의 집에다 마음대로 연막을 피울 수 있겠는가!
현수는 꼬물거리는 빈대를 잡아 죽였다. 그런데 한두 마리가 아닌가 보다. 또 다른 놈들이 꾸물거리고 있다.
“흐음……! 심각하군. 이럴 때 일정 범위 내의 모든 생명체를 박멸시킨다는 익스터미네이션(Extermination) 마법을 만들어 쓸 수 없으니…….”
현수는 아직 마법을 창조해 낼 수 없다.
더구나 현수가 생각하는 박멸 마법은 9써클 파워 워드
킬(Power Word Kill)의 축소판이다. 7써클 마스터가 어찌 9써클 마법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아무튼 목욕을 마치고 나온 세 식구는 너무도 상쾌해했다.
“아아……! 개운해.”
“엄마! 이런 기분 처음이에요.”
“그래, 정말 상쾌하지?”
“하하! 시원하셨나 봅니다.”
“아……! 하인스 백작님, 그렇지 않아도 드릴 말이 있습니다.”
“네에? 뭐죠?”
“이거 파세요.”
“뭐라고요?”
“비누랑 향수랑, 사과 주스랑 후춧가루 등등이요. 백작님이 가지신 물건들 전부 파시란 말씀입니다.”
“……?”
“써보니까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런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팔릴 겁니다. 안 그렇소, 부인!”
“그럼요. 비누를 써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몸에서 향기가 막 샘솟는 것 같아요.”
“네에. 전엔 목욕을 해도 이렇게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았었어요. 근데 달라요. 너무 시원해요.”
평생에 묵은 때를 벗겼으니 개운하긴 할 것이다. 현수는 충분히 이런 기분을 짐작하기에 빙그레 미소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조만간 팔게 될 겁니다. 우선은 후춧가루부터 팔게 될 겁니다.”
“어딥니까? 후춧가루를 파는 곳이?”
“하인스상단입니다.”
“하인스상단이라면……? 백작님 소유의 상단입니까?”
“뭐, 그런 셈이 되지요. 하인스상단의 본점은 이곳 테세린에 두고 싶은데 허가해 주실 거죠?”
“아이고, 무슨 말씀을……! 당연한 겁니다. 근데 어디에 점포를 마련하셨는지요?”
“흐음! 아직 점포까지는…….”
“백작님! 저잣거리에 자그마한 건물 하나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그걸 쓰시면 어떻겠습니까?”
“아, 그래요? 크기는 얼마만 하며 임대료, 아니, 그걸 파시면 얼마나 받으시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섭섭합니다. 그냥 제 성의입니다. 쓰시고 싶으실 때까지 그냥 써주십시오.”
“하하, 자작님께서 이렇게 신경 써주시니……. 감사합니다. 고맙게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굳이 주겠다는 것을 거절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장소는 별 문제가 안 된다. 필요한 사람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크기도 상관없다.
후춧가루 200개가 자리를 차지하면 얼마나 차지하겠는가!
품목이 늘어나면 더 짓거나 옆 건물을 사들이면 된다.
현수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로잘린이 말을 건다.
“혹시 장부를 정리할 서기는 필요없나요?”
“로잘린 양, 방금 장부 정리를 말씀하신 겁니까?”
“네, 팔린 물건값의 5%는 세금으로 내야 하니 기장을 해야 하잖아요. 저, 그거 되게 잘하는데 저 시키시면 안 돼요?”
귀족가의 시집도 안 간 영애가 상단 서기를 하겠다고 나선다. 이쯤 되면 부모가 나서서 따끔하게 야단쳐서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로니안 자작도 세실리아 자작부인도 아무 말 없다. 오히려 ‘넌 잘 할 수 있어!’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고 보니 로잘린이 아까완 다르다. 아까는 글자 그대로 맨얼굴이었다. 게다가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약간 엉클어졌던 머리는 빗겨져 있고, 뭘 바른 모양인지 얼굴에 빛이 난다. 화사한 색깔의 드레스뿐만 아니라 귀걸이나 목걸이 같은 장신구까지 모두 갖추고 있다.
현수가 준 향수도 뿌렸는지 은은한 향기까지 난다.
줄 때는 아무 거나 골라서 준 것이다. 향수에 대해 현수가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냥 용기가 예쁜 걸 고른 것이다.
그런데 이 냄새는 천지건설의 업무지원팀 강연희 대리에게서 가끔 나던 향기이다. 당연히 호감이 간다. 이 호감은 현수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허락하는 말을 하게 만들었다.
“로잘린 양, 일은 잘 하실 수 있겠습니까?”
“호호, 물론이지요. 근데 저 월급은 얼마 주실 거예요?”
신세대들이 당돌한 것은 아르센 대륙이나 대한민국이나 다를 바 없는 모양이다.
“월급……!”
“호호, 월급은 무슨……. 로잘린! 백작님께서 널 고용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렴.”
“어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노동을 제공했으면 당연히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지요. 그렇죠? 백작님!”
“그, 그럼요.”
“근데 월급은 선불인가요? 후불인가요?”
대한민국에도 월급을 선불로 주는 회사는 없다. 하나 이곳이 어딘가! 아르센 대륙의 미판테 왕국이다.
월급을 선불로 줘야 하는 것이 불가능한 곳이 아니다.
“흐음! 열심히 하라는 뜻에서 선불로 주고 싶은데…….”
“그런데요?”
현수의 말을 자른 로잘린은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다. 이때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잠시만…….”
말을 멈춘 현수는 마법 배낭에 손을 넣었다.
‘분명 어딘가에 있는데……. 어디 있지? 아, 찾았다.’
아공간을 자주 쓰다 보니 전에 모르던 기능을 알게 되었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원하던 것을 찾아 꺼내던 중 잠시 멈췄다.
‘이거 갖고는 너무 약소하지? 암……! 한 달 일할 월급인데. 뭐, 얼마나 열심히 할지는 모르지만……. 에라, 모르겠다.’
내친 김에 몇 가지 더 꺼낸 현수는 그중 하나를 내밀었다.
“어머, 이건 뭐예요?”
“그건 빗이라 하는 것이오.”
“빗이요? 뭐에 쓰는 물건이죠?”
“그것으로 머리를 한번 빗어 보십시오.”
“이, 이렇게요?”
“잘 하시는군요.”
젊은 시절 오드리 헵번을 닮은 여인이 머리를 빗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어찌 사내의 가슴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그런대로 정리되어 있었던 머리가 아주 정갈하게 변하는 모습에 현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같은 순간, 눈빛을 빛내는 인물 하나가 있다. 물론 세실리아 자작부인이다.
“백작님, 저 빗은 백성들이 나무로 만든 것과는 많이 다른데 재질이 무언지 여쭤봐도 될까요?”
세실리아가 정체를 물은 것은 마트에서 파는 플라스틱 도끼빗이다. 그런데 몹시 탐내는 눈빛이다.
“이건 드래고니안의 비늘을 이용하여 만든 것입니다.”
현수는 플라스틱이나 비닐 종류는 전부 드래고니안의 비늘을 쭈물딱거려서 만든 것이라고 우기려 마음먹었다.
그렇기에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세상에……! 드래고니안의 비늘로……!”
자작 내외가 놀라든 말든 로잘린은 제 머리를 빗기에 여념이 없다. 이때 현수가 또 한 가지를 내놨다.
“로잘린 양, 안 보이는 상태에서 빗는 것보다는 이걸 보면서 빗는 것이 더 좋을 것이오.”
이번에 내놓은 것은 거울이다. 마트의 앤틱(Antique) 상점에서 파는 것으로 일부러 골동품처럼 만든 것이다.
타원형인데 가로 40㎝, 세로 60㎝짜리쯤 되는 것이다.
몸통은 우아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상당히 고풍스러우면서도 비싼 값을 가진 듯한 모습이다.
“헉……! 이, 이건… 미, 미스릴……?”
로니안 자작은 받침대의 빛깔이 은색이라 미스릴로 착각한 듯하다. 사실 이것은 주석에 은을 도금한 것이다.
하나 현수는 이를 바로잡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모녀는 거울 자체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어머나, 이게 뒤집어지네.”
“네, 어머니! 근데 이렇게 놓으니까 제가 조금 더 크게 보이는 것 같아요. 어머, 어머! 얼굴의 솜털까지 다 보여요.”
“어디……? 어디, 나도 한번 보자.”
거울 쟁탈전을 지켜보던 현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자, 머리를 다 빗었으면 흘러내리는 머리는 이걸로 잡아 보십시오.”
이번에 건넨 것은 헬로 키티 머리핀이다. 현수가 자신의 머리에 직접 시범을 보인 뒤 세 개를 건네 주었다.
도끼빗은 하나에 1,000원, 거울은 하나에 15,000원, 헬로키티 머리핀도 하나에 1,000원짜리이다.
로니안 자작의 하나뿐인 딸이자 너무 너무 사랑받는 로잘린의 한 달 월급이 18,000원으로 결정되는 순간이다.
“백작님! 도대체 이런 진귀한 물건은 어디서……?”
“후후, 이것들은 모두 제 영지의 특산물입니다.”
거짓말이라는 것이 처음에 한 번 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현수는 어느새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이러면 ‘이제 출세할 기본은 갖췄다’고 말을 한다.
착하고 마음 여린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고, 교활하며 거짓말에 능숙한 놈들이 출세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예 이런 놈들만 우글우글 모여 있는 곳이 있다.
대한민국 국회이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부정축재는 기본이고, 성추행 발언을 예사로 한다.
춘향전이 ‘변사또가 춘향이 따먹으려다 실패한 소설’이라고 한 놈도 이곳 출신이다.
이렇듯 권력을 이용하여 온갖 부정한 일에 개입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국회이니 나라꼴이 엉망인 것이다.
어쨌거나 현수의 거짓말에 로니안 자작이 깜박 넘어간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코리아 제국에서 드래고니안을 얼마나 잡으셨는지 알 수 없지만 비늘의 수량은 분명 제한적일 겁니다. 또한 미스릴로 받침대를 만든 거울이라니요?”
“뭐, 별거 아닙니다.”
짐짓 거들먹거려 보았다. 하나 로니안 자작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한 술 더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