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아하암! 아아, 개운해!”
기지개를 켜던 이춘만 차장은 흐뭇하다는 웃음을 지었다. 수북한 현금 때문일 것이다.
약방은 예상보다 훨씬 더 장사가 잘된다. 어제 하루 순수입이 한화로 500만 원 이상이다.
하긴 서울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따라서 약품을 취급하는 약방은 대단히 많다. 문제는 거의 대부분이 주술사들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확인되지 않은 민간요법제를 파는 곳이다.
효능이 입증된 서양 의약품을 파는 곳은 이춘만 차장의 약방을 포함하여 겨우 열한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부로 아홉 곳이 되었다. 이러니 장사가 안 되면 이상할 것이다.
“오늘도 가게 문 좀 열어주겠나?”
“그러지요.”
가게 문을 열려고 나가보니 벌써 긴 줄이 형성되어 있다. 본격적으로 소문이 번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약도 더 많이 필요하고, 사람도 더 많아야 하겠구나.”
문을 열자마자 사람들이 들이닥친다. 하나 질서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인상 험악한 주렙을 비롯한 네 명의 덩치들이 선글라스를 낀 채 문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현수는 이 차장이 아침을 먹을 때까지 약을 팔았다.
그러는 사이에 교민 부인들이 왔다. 말을 들어보니 직원으로 채용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원주민 몇이 더 온다.
허드렛일과 심부름을 하기 위함이다.
현지인들을 더 고용하지 못하는 것은 약품 설명서가 한글과 영어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임무교대를 한 현수는 어젯밤 여자아이들을 데려다 놓았던 부근을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할머니가 아이들을 거둔 듯하다.
복잡한 시내를 한 바퀴 휘돌고 돌아오니 이 차장이 부른다.
“김현수 씨! 본사에서 팩스가 왔는데 귀국하래.”
“귀국이라구요? 제가요?”
“그래. 당장 들어오래.”
“본래 해외근무는 최소가 6개월이잖아요.”
“그건 그래. 한데 이건 특별 케이스야. 이번 공사 수주에 공이 많다고 표창장 준다고 들어오라는 거야.”
“아! 그래요? 근데 저 혼자요?”
“아니, 나도 같이 가. 고맙네, 자네 덕에 만년 과장에서 차장으로 진급하게 되었네.”
“에이, 고맙긴요.”
“마침 잘되었어. 예상보다 약이 잘 팔려서 어쩌나 했는데 이번에 들어가면 거래처 좀 뚫어놔야겠어.”
“네에. 그리고 여기도 개인사업자가 아닌 법인으로 바꾸셔야 할 것 같은데요? 수입이 점점 많아지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네.”
“그럼 이제부턴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이고, 그렇게 부르지 말게. 쑥스러우니.”
“하하,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네에게 말할 게 있네.”
“뭔데요?”
“허가받을 때 자네와의 관계를 팔았네.”
현수는 허가 과정에 자신과 내무장관의 친분이 작용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면 어떤가! 손해 볼 일도 아니다.
“그랬군요. 그럼 어떻겠습니까?”
“고맙네. 모든 게 자네 덕이네.”
“고맙긴요. 잘되면 좋은 거지요. 근데 언제 출발이에요?”
“내일 출발하세. 그렇게 하려고 비행기 표 끊어두었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아니지만 자넨 본사로 발령 날지도 모르니 소지품 다 챙기게.”
“그건 아마 아닐 겁니다. 내무부장관과 협의할 일이 앞으로 얼마나 많겠어요. 안 그래요?”
“하긴… 하여간 짐이나 챙기게.”
“네에.”
12장 표창장 수여식
“어휴! 역시 공기가 탁하구나.”
인천공항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온 현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청정 지역에서 오염 지역으로 이동한 것과 마찬가지로 공기가 탁했던 때문이다.
“일단 집으로 가자.”
지하철과 버스, 그리고 택시를 타고서야 집에 당도할 수 있었다. 번호를 눌러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아주 조용하다.
“어머니……! 어디 계세요? 어머니!”
“아니? 현수야! 너, 언제 왔어?”
“네, 회사에서 들어오라고 해서요. 지금 공항에서 바로 오는 길이에요. 그런데 그간 별일 없었지요?”
“그럼! 너는 어땠니? 몸은 괜찮은 거냐?”
“하하! 네에, 멀쩡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행이구나. 어디 보자, 우리 아들!”
어머닌 어디 이상한 데라도 없나 찾으려는 듯 현수의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근데 아버지는요? 어디 가셨어요?”
“그래. 오늘은 공방에 출근하시는 날이야. 그나저나 먼 길 오느라 애썼는데 씻고 나서 좀 쉬거라. 참, 배는 안 고프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러고 보니 조금 배가 고프네요. 샤워하고 나올 테니 라면 하나만 끓여주세요.”
“얘! 몸에 좋지도 않은 라면은 왜……? 뭐든 말만 해. 엄마가 금방 만들어줄게.”
“아이, 아니에요. 진짜로 라면이 먹고 싶어서 그래요. 거긴 그게 없거든요.”
“그래? 하긴 아프리카엔 라면이 없겠구나. 알았다. 후딱 씻고 나오너라. 너 좋아하는 라면 끓여놓으마.”
라면이 없기는 왜 없는가! 아공간 속에 1,400만 봉지나 있다. 그럼에도 라면을 청한 것은 번거롭게 하기 싫어서였다.
화장실로 들어간 현수는 마음이 푸근해짐을 느꼈다.
‘역시 집이 최고야!’
라면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퇴근하셨다. 생활 걱정이 없어서 그런지 두 분 모두 얼굴이 피신 듯하다.
다음 날, 차를 몰아 천지대학교로 향했다. 이 학교는 서울에 소재한 사학으로 천지그룹이 설립한 대학이다.
회사에도 강당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하나 오늘은 과장급 이상 전원이 집합하는 사상 초유의 날이다.
그런데 그 인원이 만만치 않기에 이곳을 빌린 모양이다.
현수는 표창장 수여식의 장본인인지라 정장을 입었다.
군살 하나 없는 체격이라 그런지 감색 슈트가 잘 어울린다는 느낌에 기분이 매우 좋았다.
차를 주차장에 대고 강당의 위치를 물어보니 조금 더 걸어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말하길 이따 나갈 때 사원증을 보여주면 주차비가 무료라 한다.
오늘은 2013년 4월 23일 수요일이다. 킨샤사로 떠났던 그날로부터 석 달쯤 지난 날이다.
학교 내에는 많은 학생들이 오가고 있다. 젊고 발랄한 표정이 보기에 좋았다.
그러고 보니 천지대학교의 캠퍼스 방문은 오늘이 처음이다.
그렇기에 이리저리 둘러보고 느긋하게 걸었다. 모이라는 시간보다 거의 두 시간 빨리 당도해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학교 건물들은 상당히 복합적이다. 현대적인 빌딩도 있지만 고딕이나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들도 섞여 있다.
정성 들여 가꾼 수목들이 저마다 따사로운 햇살을 더 많이 받겠다는 듯 잎사귀들을 돋아내는 중이다.
현수는 오른쪽에 위치한 도서관 건물을 보고 있었다.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 건축물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이 건물에 대한 이야길 본 적이 있다. 움베르트 에코라는 작가가 쓴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의 무대가 된 멜크 베네딕트 수도원을 본떠 지은 건물이다.
‘으음, 정말 대단하구나!’
사진으로만 보던 건물을 실제로 보니 크기가 대단하며, 상당히 많은 공이 든 건축물이라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바로 그 순간이다.
다다다다, 쿠웅 !
“아이쿠!”
“으윽!”
넋 놓고 건물 구경을 하다 갑작스런 충격을 받아 몸이 휘청거렸다. 그 순간 누군가가 쓰러진다.
얼른 손을 내밀어 잡으려 했지만 벌써 엎어진 상태이다. 머리가 긴 것을 보니 여대생인 듯하다.
“아가씨, 괜찮아요?”
“미, 미안해요. 제가 너무 급한 일이 있어서. 미안해요.”
바닥에 쓰러지면서 무릎에 상처를 입었는지 피를 흘리고 있다. 하나 그런 것엔 아랑곳하지 않고 얼른 미안하다고 하곤 가방을 들고 후다닥 뛰어간다.
불과 4∼5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현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쏜살처럼 달려가는 여학생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여대생이 흘리고 간 지갑이 보인다. 충돌 순간 가방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다.
“아가씨! 아가씨……!”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지나가던 학생들이 바라보고 있다. 얼른 뒤따라가서 돌려주지 않고 뭐하냐는 표정이다.
“에구……!”
할 수 없이 여대생의 뒤를 따라갔다.
달려가는 곳을 보니 학교 앞 병원인 듯하다. 물론 천지대학교 부설 대학병원이다.
여대생은 응급실로 뛰어들어 간다.
‘으음, 그래서 그랬구나.’
부지런히 걸어 응급실로 들어갔다. 멀지 않은 곳에 간호사와 이야기하는 여대생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니 둘의 대화가 들린다.
“지금 당장 수술을 받으셔야 해요. 그러니 먼저 접수부터 하고 오세요.”
“접수요?”
“네, 저 문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돌면 접수 창구가 있어요. 거기 가서 이 종이에 환자 인적사항 같은 걸 써서 제출하시고 접수하고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서두르셔야 해요. 빨리 수술해야 하거든요.”
“네, 알았어요.”
대화하는 동안 병상에 눕혀진 환자를 보았다. 70살쯤 된 할머니이다. 형편이 어려운지 입고 있는 옷이 낡아 보인다.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피를 흘리고 있고, 기절한 상태이다. 간호사들이 세 명이나 달라붙어 각종 기기들을 붙이고 있었다.
병상 아래로 늘어진 손을 보니 고생을 많이 한 손이다. 손톱 밑에는 시커먼 때가 끼어 있다.
환자를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여대생이 황급히 뛰어갔기에 현수는 또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창구 앞에 당도해서 가방을 뒤지던 여대생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지갑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 지갑……! 내 지갑이 어디에 갔지?”
“그 지갑, 여기 있습니다.”
현수가 불쑥 지갑을 내놓자 얼른 받아 들며 고개를 든다. 갸름한 얼굴에 긴 생머리를 기른 예쁜 여대생이다.
“어머! 내 지갑……. 근데 누구시죠?”
“조금 전 도서관 앞에서 충돌했던 사람입니다. 이걸 떨어뜨리고 갔어요. 그래서…….”
“아아,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말을 마친 여대생이 서둘러 지갑을 열고 안에 있던 카드를 접수 창구에 건넸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저어, 이 카드에 있는 금액으론 부족한데요?”
“뭐라고요?”
“접수 비용에 못 미친다고요.”
“아! 그래요? 잠깐만요. 전화 좀 하고 올게요.”
말을 마친 여대생은 당황한 나머지 카드를 돌려 받을 생각도 않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공중전화를 찾는 듯하다.
현수는 접수 창구에 있던 카드를 받아 들었다. 창구직원은 동행인 줄 아는지 별말이 없다.
여대생에게 다가간 현수가 전화기를 내밀었다.
“급하신 모양인데 이 전화 쓰세요.”
“저, 정말요? 고맙습니다. 딱 한 통화만 하고 돌려드릴게요.”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전화를 받아 든 여대생은 얼른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곤 버튼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현수는 말없이 기다렸다. 그런데 잠시 후 여대생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왜 그러나 싶다.
“마나여, 대화를 엿듣게 하라. 이브즈드랍(Eavesdrop)!”
엿듣기 마법이 구현되자 통화 내용이 들리기 시작한다.
“엄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엄만 신용불량자라 신용카드가 없어. 돈도 없고……. 어떻게 하지? 할머닌 많이 다치셨니?”
“엄마, 당장 수술 받아야 한대. 그런데 돈이 없으면 수술을 안 해주나 봐. 어떻게 하지? 작은 아빠에게 전화해 볼까?”
“작은 아빠……? 관둬라.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이잖아. 내가 여기서 어떻게 돈을 마련해 볼게.”
“안 돼. 지금 당장 접수를 해야 한다고…….”
“그럼 어떻게 해? 응……?”
“내가 작은 아빠에게 전화해 볼게. 그리고 빨리 와, 엄마.”
여대생은 얼른 전화를 끊고 가방 속의 수첩을 꺼내 전화번호를 찾는다. 잠시 후 컬러링이 들린다.
“여보세요. 작은 아빠……? 저, 은정이에요.”
“은정이? 네가 웬일이니?”
“작은 아빠! 우리 할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근데 뺑소니 사고라 가해자를 찾을 수 없대요.”
“뺑소니……? 그래서?”
“여기 천지대학병원 응급실인데 지금 당장 수술을 해야 한대요. 근데 돈이 없어요. 엄만 신용불량자라 카드도 없구요. 그러니 작은 아빠가 돈을 좀 빌려주시면 제가 나중에…….”
갑자기 전화 끊기는 소리가 난다.
“……!”
은정이란 여대생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작은 아빠라는 인간 때문일 것이다. 현수는 실성한 사람인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은정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할머니 수술이 급한 듯하군요. 제가 카드를 빌려 드릴게요.”
“네……? 아저씨가 왜요?”
“급하지 않아요?”
“그, 급하지요. 근데 제가 잘 모르는 분이시잖아요.”
“그런 건 나중에 따지고 일단 접수부터 해요. 자아, 카드!”
“고마워요. 염치 불구할게요.”
카드를 받아 든 은정이 접수창구로 달려갔다. 그리곤 카드를 내민다. 잠시 후 뭔가가 입력되는 소리가 들린다.
“접수되었으니까 이 서류를 응급실로 가져가세요. 그럼 수술 시작될 거예요.”
“네, 알았어요.”
은정은 현수에게 시선을 주고는 응급실로 달려간다. 또 따라갔다. 창구에서 돌려 받은 카드를 들고 간 때문이다.
은정이 간호사들과 대화하는 동안 현수는 할머니에게 갔다.
나이도 많은 분이신데 교통사고까지 당한 것이 측은했던 때문이다.
‘이런……! 실혈을 너무 많이 하신 것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