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저쪽으로 가죠.”
“네. 근데 잘하는 집인가 봐요. 손님들이 이렇게 많으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손만두를 주문하고 몇 마디 말도 나누기 전에 손님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한다.
“빨리 먹고 가야겠네요.”
“그러네요.”
잠시 후 만두가 나왔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속된 말로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이 좋아 별다른 대화 없이 식사를 마쳤다.
“점심은 은정 씨가 샀으니 차는 제가 사죠.”
새로 생긴 커피 전문점은 한산한 편이다.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니 따로 할 말이 없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 경황도 없고 그런데 옆에 계셔주셔서 정말 큰 도움이 되었구요.”
“별말씀을……! 저하고 부딪쳤는데 하도 달려가기에 뭔 일인가 했네요. 근데 지갑이 떨어져 있어서…….”
“네에. 제가 지갑 흘리길 잘했나 봐요. 그래서 도움을 받았잖아요.”
“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요? 어쨌든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네에. 근데 하나 여쭤볼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뭐든 말씀만 하세요.”
“그날 커튼 안에서 할머니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신 거예요?”
“네……? 뭘 말씀하시는 건지요?”
“그날 김현수 씨가 할머니에게 파란 빛을 보냈다고 했어요. 옆 환자를 따라온 꼬맹이가요. 그거 뭐였어요?”
“무, 무슨…….”
당황스러웠기에 말을 더듬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끼어든다. 얼굴을 보니 집주인 아저씨이다.
13장 무역회사를 차리다!
“아……! 김현수 씨, 언제 귀국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귀국하면 꼭 한번 만나려 했는데. 어머니가 말씀 안 하셨나?”
“아……! 안녕하세요?”
“고맙네, 자네 덕분에 마누라의 병이 다 나았어. 고마우이. 정말 고마우이. 이 말 말고는 정말 뭐라 할 말이 없네.”
“무, 무슨 말씀을……. 제가 한 게 뭐 있다고…….”
“아닐세. 자네가 준 그 약 말이네. 그거 어디서 구한 건가? 의사들도 포기한 말기암이 그걸로 싹 나았어.”
“그래요?”
“그렇네. 며칠 전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주먹만 하던 종양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하네.”
“그, 그래요? 다행입니다.”
현수는 말을 더듬으면서 은정의 눈치를 살폈다. 하필이면 이런 때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저어된 때문이다.
“자네, 그 약 어디서 파는지 알려주면 안 되나? 그거 정말로 효능이 좋았어. 부작용도 없고, 치료 효과도 좋고. 한 병에 천만 원도 좋고, 일억도 좋으네. 그걸 좀 구해주게.”
“저어, 죄송한데요. 그게 다였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또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래? 그렇구먼……. 내 친구 녀석도 암에 걸려서 고생하길래 큰소릴 쳐놨는데.”
“죄송합니다.”
“근데 말일세. 우리에게 준 그건 어디서 난 건가?”
“아! 그, 그거요? 그건 제가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
“네, 아프리카에 있는 지사에 파견 근무 나갔을 때 우연히 구한 거예요. 근데 그걸 판 사람이 누군지 기억도 못해요. 어디서 산 건지도 기억이 안 나구요. 술에 잔뜩 취했을 때 산 거거든요. 그러니 또 구할 수 있다는 장담을 할 수 없는 거예요.”
술과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는다고 했다. 지금의 현수가 딱 그렇다.
“흐음, 아쉽구먼……. 근데 아프리카의 그 나란 어딘가?”
“콩고민주공화국이라는 나란데 혹시라도 거길 가실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왜?”
“거기 치안이 매우 불안해서 자칫하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곳이거든요.”
“아! 그런가? 어쨌든 고맙네. 그나저나 내가 애인과의 시간을 방해한 모양이군. 내 일간 자네 집에 한번 들르겠네.”
“네……? 아, 네에.”
현수는 굳이 애인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꺼내면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구셨어요?”
“아, 저희 가족이 세 들어 살고 있는 집 주인이에요.”
“저분 부인께서 암에 걸렸었는데 김현수 씨가 준 약을 먹고 나았다고 한 거지요, 방금……?”
“에이, 설마 그걸 먹었다고 말기암이 낫겠어요?”
은정은 현수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눈치이다. 이럴 땐 화제를 돌리는 게 상수이다.
“그나저나 병원비는 작은 아빠라는 분이 도와주신 건가요?”
“누구요? 작은 아빠요……? 어휴, 그분 우리 아버지의 동생 맞는데 완전 자린고비예요. 왜, 찰스 디킨스가 1843년에 쓴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는 소설 있잖아요?”
“네, 그 소설 주인공이 아마 스크루지 영감인가 그렇지요?”
“맞아요. 그 스크루지가 사부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매몰차고 정없는 사람이 우리 작은 아빠예요.”
“그럼 그분이 병원비를 도와주신 게 아니에요?”
“도움은 무슨……. 코빼기 구경도 못했어요. 사돈이 뺑소니 사고를 입어 병원에 입원했다는데 전화 한 번 안 한 인간이에요. 그래서 다시는 안 볼 생각이에요.”
“으음,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있군요.”
“네. 참 지독해요. 완전한 이기주의자지요.”
“그렇군요.”
현수가 말을 끊자 은정이 잇는다.
“병원비는 엄마가 같이 일하시는 친구 분들에게 빌리셨어요. 신용불량자라 카드도 없거든요.”
“……!”
“엄만 아빠가 돌아가신 후 제 학비를 벌려고 안 해본 일이 없어요. 파출부도 하시고, 대학교에서 청소부로 일도 하셨어요. 근데 거기서 잘리는 바람에 지금은 갈비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계셔요.”
“……!”
“돌아가신 아빠가 빚만 잔뜩 남기셔서 할머니와 엄마는 신용불량자가 되었구요. 할머닌 제 학비를 돕겠다고 파지 주으러 다니셨어요. 그러다 뺑소니 차에 치이신 거구요.”
현수는 대꾸나 맞장구 대신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은정이 하는 이 말은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인 듯하기 때문이다.
몹시 어려운 상황임에도 남들에겐 말하지 않았다가 오늘 보면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이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라 여겨 털어놓는 모양이다.
“이제 한 학기만 더 다니면 졸업을 해요. 그럼 취직을 해서 돈을 벌게 될 거예요. 그럼 좀 나아지겠지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돈을 덜 쓰려고 핸드폰도 안 샀어요.”
“그럼 그날 사고 소식은 어떻게 들은 건가요?”
“할머니 목에 혹시나 해서 과사무실 전화번호랑 제 이름을 적어서 걸어드렸어요. 그걸 보고 누군가 전화를 해서 알게 된 거지요.”
“그랬군요. 근데 사고 낸 운전자는 잡혔답니까?”
“아니요. 하필이면 CCTV 사각지대에서 사고가 나서……. 진짜 재수가 없는 거죠.”
“흐음, 그랬군요.”
“다행인 건 병원비가 예상보다 훨씬 조금 나왔다는 거예요.”
“그래요?”
“네. 응급실에 갔을 때 간호사가 말하길 간이 파열되고, 척추에도 손상을 입어 대대적인 수술이 예상된다고 했었거든요. 게다가 골반 쪽도 이상하고 정강뼈도 골절된 것 같다고 들었어요.”
“그런데요?”
“간도 척추도 멀쩡하대요. 골반 뼈에도 이상이 없고, 정강뼈도 부러진 곳 없이 괜찮대요.”
“다행입니다.”
“의사들은 별다른 외상도 없는데 피를 많이 흘린 게 이상하다면서 온몸을 다 조사했어요.”
“그런데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외상이 한 군데도 없었대요. 멍든 곳만 조금 있구요.”
“다행입니다.”
“네, 정말 다행이에요. 근데 그 꼬마 이야긴 뭐죠? 김현수 씨가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니까 손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나와 할머니를 감쌌다고 했어요.”
“뭘 잘못 본 거겠지요.”
현수는 내심 뜨끔했지만 오리발을 내밀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근데 그 아이 엄마가 말하길 걔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라고 해요. 꾸며내거나 거짓말하는 경우도 없었다고 하고요.”
“그래요? 하여간 전 모르는 일입니다.”
“네에. 그랬군요.”
은정은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은인이다.
그럼 사람을 닦달할 순 없기 때문이다.
현수는 또 한 번 화제를 바꿨다.
“참, 저녁 땐 학교 앞에서 알바를 한다고 했죠?”
“거기 잘렸어요. 할머니 병실 지키느라…….”
“아……! 그렇군요. 안되었습니다.”
“네, 2학기 등록금 마련하려면 빨리 알바 자리를 찾아봐야 하는데 자리가 없네요.”
“잘 찾아보시면 은정 씨에게 적합한 자리가 곧 나올 겁니다. 힘내세요.”
“네, 고맙습니다.”
은정이 새삼스레 고개 숙여 감사 표시를 한다.
그러고 보니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기초 화장조차 못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아주 예쁜 얼굴이다. 드라마 허준이 방영될 때 공빈 김씨로 나왔던 박주미의 결혼 전 얼굴과 비슷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임에도 이 정도이니 잘 가꾸기만 하면 한 미모할 얼굴이다.
그런데 가난 때문에 그늘져 있음이 안타깝다.
하나 어쩌겠는가! 도울 명분이 없다. 그렇기에 아무런 내색 않고 그저 따뜻한 눈빛만 쏘아주었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아, 전화가 왔네요. 잠시만요. 여보세요.”
“김 과장, 나 지금 지하철 타고 이동 중인데 한 10분 후면 도착할 거 같아. 어디로 갈까? 워커힐 호텔로 들어가?”
“아, 아닙니다. 제가 차 가지고 나갈게요. 광나루역 3번 출구로 나오세요.”
“알겠네.”
전화를 끊고 나니 은정이 묻는다.
“약속이 있으셨군요.”
“미안합니다. 갑작스럽게 상사가 보자고 해서…….”
“어머, 아니에요. 제가 김현수 씨 시간을 뺏어서 오히려 미안하죠. 바쁘신 분인데.”
“바쁘긴요. 지금은 휴가 중입니다. 근데 오늘 이상하게 약속이 겹치네요.”
“네에. 그럼 이만 자리에서 일어날까요?”
“네. 아쉽지만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계산을 하고 차를 몰아 지하철역까지 가는 동안 이은정은 한마디 말도 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3번 출구에 내려 드리면 되나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저도 용무가 있어서 가는 건데요. 아무튼 할머니께서 얼른 쾌차하셨으면 좋겠네요.”
“네에, 외상은 없으니 곧 일어나실 거예요. 당뇨병이 있으셔서 좀 늦어지긴 하겠지만요.”
“당뇨병이요?”
“네, 한 30년쯤 되셨대요. 그거 때문에 더디 낫는다고 성화가 심하셔요.”
“그렇군요. 아무튼 조심해서 가세요.”
“네, 감사했습니다.”
은정이 차에서 내리는 동안 이 차장이 다가온다.
“어이, 김 과장! 감춰둔 애인이야? 상당한 미인인데?”
“아……! 차장님. 어서 오십시오. 그리고 저 아가씨, 제 애인 아닙니다.”
“그래? 그런데 왜 자네 차에서 내리지?”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점심 드셨어요?”
“난 아침을 늦게 먹어 생각이 없네. 자넨 먹었나?”
“네.”
“잘되었군. 그럼 그냥 근처 찻집 아무데나 가세.”
차를 댄 곳은 주차장이 있는 커피숍이다.
“어제 오늘 계속해서 약품도매상들을 만나보았네.”
“아, 가져가실 거 챙기신 거군요?”
“당연하지. 온 김에 가져갈 만큼 가져가야지.”
“네에. 많이 사셨어요?”
“물론이야.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자네를 보자고 했네.”
“말씀하십시오.”
“자네 혹시 무역회사 잘 아는 데 있나?
“무역회사는 갑자기 왜요?”
“왜긴? 내게 약을 보내줄 곳이 필요해서 그러지.”
“아무나 약을 사서 보내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게 그렇지 않네. 정상적인 루트를 밟아 수입수출을 해야 하는 거라 약간은 전문적이어야 하네.”
“그렇군요. 그럼 여기저기 알아보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
“남 좋은 일 시킬까 봐 그러는 거지.”
“그럼 회사를 하나 설립하세요.”
“알다시피 자네와 난 천지건설 직원 아닌가? 겸직이 허용되지 않네.”
“그럼 사모님 이름으로 내시면 되잖아요.”
“그 사람은 미국에 있네.”
“아, 그렇군요.”
“친구 녀석들에게 부탁할까도 생각해 보았는데 안 되겠더군. 전적으로 매달려서 이 일을 해줘야 하는데 가정이 있는 가장들에게 맡기기엔 마땅하지 않은 것 같네.”
“그런데 왜 절 찾으신 겁니까? 저도 차장님처럼 겸직을 할 수 없는데요.”
“솔직히 말해 자네 덕에 진급했고, 자네 덕에 약방을 차렸네. 근데 자네에게 가는 이득이 없어 미안해서 그러지.”
이 차장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아닐세. 여기서 약을 구해 킨샤사로 보내주는 건 자네에게 일임하고 싶네. 도매상으로부터 납품받는 가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네. 거기에 무리하지 않은 마진을 붙여 내게 약을 넘기는 회사를 하나 내게. 명의는 자네 편한 대로 하고.”
“제가요? 전 무역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요?”
현수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 보너스 받은 거 있지 않은가? 그걸로 무역회사를 하나 내게. 필요하다면 나도 투자할게. 그리고 자네가 믿을 만한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면 되지 않겠는가?”
“잠깐만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긴다고요?”
“그래. 약이 제법 많이 팔릴 것 같으니 한 10%만 마진을 붙여도 제법 쏠쏠할 것이네.”
이춘만 차장의 말이 맞다.
대한민국의 인구는 약 5천만 명이다. 그리고 매출 상위 28개 제약회사의 연간 총매출이 6조 3천억 원 정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