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발길 닿는 대로 가는 정처없는 여행이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내려가지요. 어디로 가면 됩니까?”
“아, 고맙습니다. 경북대병원 중환자실로 와주세요.”
“경북대병원 중환자실이요?”
“네, 김현수 씨의 도움이 너무도 간절해요. 꼭 와주세요. 꼭이요, 꼭……!”
세 번이나 꼭이라는 소리를 하는데 음성이 심상치 않다. 톡 건드리기만 해도 우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알겠습니다. 경북대병원 중환자실로 가지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현수가 대구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쯤 되었을 때이다.
“여기예요.”
“아, 권지현 씨!”
손을 흔들며 다가서는 권지현을 보며 현수는 짐짓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인천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던 것에 대한 보답이다.
“고마워요, 현수 씨! 먼길 오시느라 애썼어요.”
“네, 근데 왜 절 이리로 오라고 하신 겁니까?”
“말하자면 길어요. 일단 저리로 가요.”
지현이 가리킨 곳은 관목 사이의 벤치였다.
현수가 자리에 앉자 잠깐만 기다리라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다시 돌아온 지현의 손엔 캔커피 두 개가 들려 있다.
“마셔요.”
“네에. 근데 할아버님께 문제가 생긴 건가요?”
“아뇨, 할아버진 괜찮으셔요. 참,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드렸네요. 정말 고마웠어요.”
“에구, 고맙다는 뜻은 팩시밀리로 보내주셔서 벌써 들었지 않습니까?”
“그래도요. 이렇게 뵈었으니 다시 말씀드려야죠.”
“아무튼 건강하시다니 다행입니다.”
“네에, 근데 그냥 건강하신 게 아니에요.”
“네? 그게 무슨 소리지요? 무슨 문제 있어요?”
“아뇨, 그건 아니고……. 현수 씨가 주신 그 약 있잖아요.”
“네, 무슨 부작용이라도……?”
현수의 표정은 금방 어두워졌다. 집주인의 부인과 아버지에게도 같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조금 심각한 부작용이 있더군요.”
“그, 그래요? 어떤……?”
현수는 바싹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직접 정제하여 만든 회복 포션이 인체에 해를 끼치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런데 권지현의 얼굴에 잠시 웃음기가 감돈다.
“할아버지에게 발생된 부작용은 크게 두 가지예요. 하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다시 난다는 것, 그리고 빠졌던 이빨이 새로 나고 있다는 거예요.”
“네에? 그게 무슨……?”
말을 이렇게 했지만 현수의 뇌리로 스치는 상념이 있다.
반노환동(返老還童)이 그것이다. 늙은 몸이 점차 건강해지면서 젊은 시절의 몸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트롤의 피는 강력한 세포 복원력이 있다고 했어. 그럼 손상된 세포가 원상으로 회복되는 것 이외에 늙은 세포까지 다시 젊은 세포로 바뀌는 기능도 있나?’
“아무튼 할아버지께서 건강해지셨어요. 고마워요.”
“네에, 다행입니다. 그런데 왜 이곳으로 오라고 했는지요?”
“참, 제 정신 좀 봐요. 현수 씨!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요. 염치없지만 부탁드릴게요.”
“그러니까 무슨 부탁이냐구요?”
현수의 물음에 지현이 속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며칠 전, 지현의 부친인 대구지청장은 서울에서 열리는 회합 참석차 집을 비웠다. 그날 지현은 영화 한 편을 감상하곤 약간 늦은 시간에 귀가하였다.
집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서는 순간 괴한이 나타나 입막음을 했다. 당연히 발버둥을 쳤으나 연약한 여인이 어찌 사내의 억센 힘을 당해내겠는가!
지현은 침대에 내동댕이쳐졌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수건 하나로만 가리고 있던 터라 발가벗겨진 채이다.
사내는 음흉한 미소를 짓고는 핸드폰을 꺼내 지현의 나신을 찍었다. 손목을 결박당한 지현은 발버둥치는 것 이외엔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내는 지현을 질질 끌고 이곳저곳을 뒤졌다. 그리곤 캠코더를 찾아냈다.
사내는 그걸로 지현을 강간하는 장면을 녹화하겠다고 했다. 당연히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다시 침대로 끌려온 지현은 바들바들 떨면서 눈물을 흘렸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사내는 음흉한 웃음을 짓고는 허리띠를 풀었다. 그리곤 지현에게 다가서던 순간이다.
“꼼짝 마!”
“헉! 누구……?”
“야, 이 나쁜 새끼야!”
“이런 제기랄……!”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내와 괴한의 격투가 벌어졌다.
다행히 나중에 들어온 사내가 더 싸움을 잘하는 듯하다. 하여 괴한이 제압당하려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걸로 두 번째 들어온 사내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리곤 첫 번째 괴한과 세 번째로 들어온 사내가 밖으로 나갔다.
그러는 사이 지현은 이빨을 이용하여 손목의 결박을 풀었다. 그리곤 허겁지겁 벗어놓은 옷을 입었다.
이때 쓰러졌던 사내가 일어나더니 도주한 두 놈을 따라 뛰어나갔다.
황급히 뒤를 따라 나간 지현은 두 사내가 탄 검은색 승용차에 자신을 도와주었던 사내가 부딪치는 장면을 보았다.
부우웅! 끼이익! 쿠웅―!
“으으윽……!”
사내가 쓰러지자 승용차가 후진을 한다. 다시금 치고 지나가려는 듯하다.
“안 돼!”
지현이 소리를 쳤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다. 승용차는 맹렬한 속도로 쓰러진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쓰러졌던 사내가 얼른 몸을 일으킨다.
그리곤 열려 있는 조수석 창문으로 손을 집어넣어 괴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아아악! 놔라, 이 새끼야!”
“내려!”
잠시 멈춰 있던 차가 갑작스레 후진을 했다. 그와 동시에 비명이 들렸다.
“아아아아악!”
털썩―!
부우우우웅! 쿵―! 쾅―! 끼이이익! 쿵―! 쾅―!
부우웅! 쿵―! 쾅―! 부우우우우웅……!
설명은 길었지만 상황은 불과 몇 초 사이의 일이다.
승용차가 후진을 하자 조수석에 타고 있던 놈의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졌다. 당연히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머리카락을 쥔 사내가 쓰러졌다.
바로 다음 순간 후진했던 승용차가 달려들어 사내를 쳤다. 앞바퀴, 뒷바퀴 모두로 밟고 지나간 것이다.
다음 순간 승용차가 후진하면서 또 밟고 지나갔다.
그리고 또 다시 사내를 치고는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다.
지현은 황급히 쓰러진 사내에게 다가갔다.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이다. 어디선지 알 수 없지만 선혈이 샘솟는 듯하다.
너무도 끔찍한 상황인지라 응급조치를 취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얼른 집으로 들어가 119에 신고를 하곤, 곧장 경찰서에도 연락을 취했다.
잠시 후 119와 경찰이 거의 동시에 당도하였다.
지현은 얼른 상황을 설명하곤 쓰러진 사내의 손이 움켜쥐고 있는 머리카락을 증거물이라 하였다.
지현은 응급차가 돌아가고 난 뒤로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도 일이지만 눈앞의 끔찍한 상황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경찰은 피해자가 대구지청장의 외동딸이며, 법무부 5급 공무원이란 걸 알고는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지현은 택시를 타고 경북대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자신을 구해주려다 중상을 입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병원에 도착해 보니 이미 응급조치가 시작되어 있었다. 그래 봐야 상처 부위에 대한 지혈이 고작이다.
마침 응급실 의사 중에 고등학교 동창이 있다. 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X―ray 결과를 알려달라고 했다.
갈비뼈, 목뼈, 대퇴골, 팔뼈, 다리뼈 등 그야말로 안 부러진 뼈가 없을 정도로 온몸이 만신창이란다.
환자의 가족에게 알리기 위하여 소지품을 뒤지던 중 당뇨병 약이 있다. 하여 당뇨 검사를 했다고 한다.
불행히도 당뇨병 환자였다.
일반적으로 당뇨병에 걸려 있으면 수술하기가 어렵다.
수술 자체가 몸에 굉장한 스트레스로 작용하게 되고, 이로 인해서 당 조절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뇨 환자들은 당뇨 조절을 타이트하게 한 뒤에야 수술에 임한다.
혹시나 해서 검사를 해보니 고혈압까지 있다.
워낙 상처가 많은 데다 당뇨와 고혈압까지 있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깜깜하다고 한다.
경험과 실력있는 과장급 의사들은 전부 퇴근하여 없다.
실력 일천한 인턴과 레지던트로선 손 쓸 방법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래서 과장급 의사들을 긴급히 부르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워낙 상처가 심해 과장님들이 와도 손쓰기 힘들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때 환자의 가족들이 병원에 당도하였다.
열여덟, 열다섯, 열세 살짜리 아이들 셋이다.
환자의 신분은 대구 동부경찰서 형사계 소속 경사라 한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저녁식사 후 담배 사러 나간다고 나갔는데 의식불명인 상태가 되어 병상에 누워 있다며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2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 세 아이를 키운 것이다.
지현은 자신을 도우려던 경찰관이 졸지에 중환자가 된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응급실 의자에 앉아 아침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과장급 의사들이 출근을 해야 뭘 해도 할 수 있을 것이란 친구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이 되어 의사들이 출근했다. 그런데 과장급들도 뾰족한 수가 없는 듯하다. 상처가 워낙 여러 군데인 데다가 장기마저 손상된 듯하기 때문에 손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환자가 죽으면 졸지에 고아가 될 아이들이다.
자신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생각한 지현은 문을 꼭 잠그고 들어가지 않은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눈물을 떨궜다. 그러던 중 문득 현수가 떠올랐다.
뇌사 상태였던 오대준을 정상인으로 만들었다. 또한 암 환자인 할아버지를 젊은이 못지 않은 상태가 되게 만들어주었다.
둘 다 병원에서 손을 놓았던 환자이다.
그간 여러 번 전화를 했었다. 물론 현수가 킨샤사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마다 전화는 꺼져 있었다.
연줄 연줄하여 천지건설 킨샤사 지부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그런데 늘 팩시밀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전화를 걸면 ‘삐―’ 하는 소리만 들린 것이다.
이 차장은 자리를 자주 비웠다. 들여온 물건을 팔기 위함이다. 그런데 서울로부터 언제 화물을 부쳤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늘 팩시밀리로 전환해 놓았던 것이다.
하여 손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런데 답장이 없었다.
팩시밀리가 제대로 갔는지 여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너무도 답답했다. 그렇기에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받을 것이란 상상조차 하지 않은 전화였다.
그런데 전화를 받는다!
통화를 했고, 고속도로 위에 있단다. 부탁을 했고, 현수가 대구로 오겠다고 한 순간 이후 지현은 예전의 평정심을 찾았다. 오기만 하면 치료가 될 것이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황급히 중환자실로 끌고 가지 않고 상황설명을 했다. 자칫 현수가 거부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다시 말해 현수의 마음속에 경찰관을 구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해주어야 한다 생각한 것이다.
지현의 이런 생각은 적중했다.
“알겠습니다. 한번 가서 보지요. 하지만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제가 모든 병을 어쩔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네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흐흐흑!”
김태희처럼 예쁜 아가씨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이면서 눈물을 떨구는데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현 씨! 울지 마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본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쵸?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흐흑! 현수 씨! 현수 씨! 흐흐흑!”
심한 마음고생 때문인지 지현의 눈에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현수는 품에 안긴 지현의 등을 말없이 토닥였다.
그렇게 2∼3분 가량 흐느끼고야 눈물이 잦아든다.
“흐흑! 미안해요.”
“아닙니다. 자, 그럼 이제 앞장서세요. 일단 환자를 봅시다.”
“네에. 그럼……!”
지현은 행여 놓치면 안 된다는 듯 현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현수는 지현의 부드러운 손에 마나를 불어넣어 보았다. 신체가 접촉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결과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간에 있던 마나가 바들바들 떤다는 느낌이다. 노심초사가 간을 상하게 한다는 한방의 이론이 맞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동의보감 같은 의서들을 아직 안 읽었구나. 시간 내서 꼭 읽어봐야지.’
이런 생각을 하곤 마나를 더 불어넣어 지현의 간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바들바들 떨던 마나들이 사르르 흩어져 제자리를 찾았다.
“휴우……!”
긴 한숨을 쉰다. 다시 마나를 넣어 지현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생각이 많은지 뇌에서의 활동이 많았다. 그것 역시 쓰다듬어 풀리게 하였다. 또 한숨을 쉰다.
“휴우……!”
그렇게 하나하나의 장기들을 훑어보았다. 이윽고 자궁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머물고 있는 마나가 하나도 없다. 괴이하다 여겨 마나를 더 많이 불어넣고 살펴보았다.
있기는 있다. 그런데 거의 점 수준이다.
어젯밤 강간을 당할 뻔했다. 이에 대한 자위의식이 발동되어 자궁의 모든 마나들이 움츠러들었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부터 도망가고 싶다는 무의식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