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세실리아 여관의 문에는 사정이 있어 당분간 휴업한다는 쪽지가 붙어 있다. 문을 밀어보니 빗장을 질러놓은 듯하다.
건물을 빙 돌아 뒷문으로 들어갔는데 아주 조용하다. 또한 실내가 어두컴컴하다. 오랫동안 영업을 하지 않은 듯하다.
“흐음, 너무 어둡군. 마나여, 빛을 밝혀라. 라이트!”
사방이 환해지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쿵쿵! 쿵쿵쿵!
“이봐, 이봐! 왜 영업을 안 하는 거야? 이 술집은 왜 한 달째 문을 안 여는 거냐고?”
누군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모양이다.
쾅쾅! 쾅쾅쾅!
“문을 열어! 술 마시고 싶으니까. 어라? 이건 또 뭐야? 뭐라고 써놓은 거야?”
홀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에도 계속 문을 두드린다.
약간 짜증이 나 문을 벌컥 여니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처럼 생긴 텁석부리장한 하나가 서 있다.
“뭐야? 왜 문을 닫았……? 아니, 왜 닫았습니까?”
현수의 차림을 이제야 본 모양이다. 자유기사도 기사이다. 당연히 평민보다 높은 신분인 것이다.
“오늘은 영업 안 한다.”
“저어, 왜 그런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주인에게 사정이 생겨 장사 못한다고 했다.”
“네에. 알겠습니다.”
장한이 가고 난 뒤 문을 다시 닫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누군가가 또 문을 두드리고 똑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얀센, 이 친구는 대체 어디에 있기에……?”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으나 인기척이 없다.
쿵쿵! 쿵쿵쿵……!
누군가 또 문을 두드린다. 그런데 얀센 부부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듯하다. 아무런 기척도 없었던 것이다.
“에이, 휴업한다고 써 붙여놨는데 또 글을 못 읽는 건가?”
슬슬 귀찮아지려 한다. 10분에 한 번 꼴이었기 때문이다.
현수는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 문을 열며 물었다.
“누구시오?”
“어라? 누구세요? 전 세실리아예요!”
“응……? 세실리아구나. 뒷문으로 들어오지.”
“어……! 아저씨 언제 오셨어요? 와……! 반가워요.”
현수는 와락 달려드는 세실리아를 안아주었다.
“조금 전에 왔어. 그나저나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다 이제 와? 점심은 먹었어? 근데 이 아가씨는 누구지?”
세실리아 곁에는 묘령의 여인 하나가 서 있다.
나이는 스물을 조금 넘긴 것 같다. 이곳에선 보기 드문 짙은 갈색 머리카락의 미녀이다.
영화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함께 출연한 마스크 오브 조로(1998, The Mask Of Zorro)에서 엘레나 역을 맡았던 캐서린 제타 존스(Catherine Zeta―Jones)와 비슷한 스타일이다.
키는 166∼7㎝ 정도 되는데 몸매가 장난이 아니다. 다소 풍성한 상의를 걸쳤음에도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가슴골의 일부가 보이는지라 현수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그리로 향해 있었다. 현수 역시 남자가 분명하다는 뜻이다.
“세실리아, 이분이 네가 말한 그분이시니?”
“네, 우리 아저씨예요. 헤헤, 제가 말한 대로 정말 잘 생기셨지요? 이 다음에 크면 아저씨한테 시집갈 거예요.”
세실리아는 얼른 현수의 손가락 하나를 잡는다. 낯선 이 앞에서 친밀감을 자랑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아가씨는 누구십니까?”
“안녕하세요? 저는 이레나 상단의 미판테 지부를 맡게 된 카이로시아라고 해요.”
“이레나 상단의 카이로시아 씨……?”
“네, 저희 이레나는 아르센 대륙의 거의 모든 나라와 장사를 하는 상단이지요.”
“흐음,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잠깐 안에 들어가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
현수가 대답 대신 옆으로 비켜서자 카이로시아가 들어선다. 그런데 악취가 나지 않는다.
‘신기하군. 세실리아 자작부인이나 로잘린에게서도 냄새가 났었는데 일개 상인의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 킁킁, 내 코가 이상해진 건가?’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이로시아가 자리를 잡자 맞은편에 앉은 현수가 물었다.
“무슨 용무로 날 찾았는지를 먼저 말해주시오.”
“네, 하인스 기사님. 먼저 만나서 반갑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카이로시아 에델만 드 로이어가 인사 여쭙니다.”
“흐음! 반갑소. 한데 귀족이었소?”
“네, 아버지가 라이셔 제국의 백작이십니다.”
“흐음, 그렇군. 좋소. 그건 그렇고 용무는……?”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기사님을 찾은 이유는 세실리아라는 아이 때문입니다.”
“세실리아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이오?”
“그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일 때문이오?”
카이로시아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다.
오늘 카이로시아는 배를 타고 이곳 테세린에 당도하였다.
얼마 전까지 브론테 왕국 지부에서 일을 했는데 이곳으로 발령 났기 때문이다.
테세린 지부는 더 발전 가능함에도 수년간 정체되어 있는 지부였다. 매출이 늘지도, 줄지도 않는 상황이 유지된 것이다. 본점에선 이런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카이로시아를 파견했다.
오랜 항해 끝에 항구에 당도한 카이로시아는 새롭게 둥지 틀 테세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잠시 쉬는 동안 코찔찔이 세실리아가 친구들과 뛰노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현재 전쟁의 위험 속에 있는 아드리안 공국을 제외하곤 대륙 전체가 평화를 구가하고 있다.
그렇기에 아이들이 노는 모습은 일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여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곤 이내 예리한 관찰력으로 세실리아가 친구들과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첫째는 의복이다.
분명 평민의 아이이다. 그런데 의복이 지나치게 깨끗하다. 살펴보니 오랜 기간 동안 입었던 것이다.
여기저기 헤져 있음이 그 증거이다.
그럼에도 무늬랄지 색감이 새것처럼 생생하다.
둘째는 머리카락을 고정시키고 있는 머리집게이다.
처음엔 천으로 묶어 놓은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아닌 것 같다. 하여 놀고 있던 세실리아를 불러냈다.
그리곤 머리집게를 보자고 했다. 그런데 와락 울어버린다. 빼앗으려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얼른 다독이고는 딱 한 번만 보자고 했다. 물론 뇌물이 있었다. 평민들은 맛보기 어려운 설탕 약간을 준 것이다.
언뜻 보기엔 누리끼리하다. 그리고 약간의 끈적임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실리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맛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세실리아가 달콤한 설탕 덩어리를 입에 물고 있는 동안 카이로시아는 머리집게를 살펴보았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물건이다. 그런데 그 기능이 놀랍다. 움켜쥔 머리카락을 웬만해선 놓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디자인이 매우 아름답다. 나비의 날개 모양인데 표면에 작은 보석이 자잘하게 박혀 있다.
6장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
결코 평민의 아이가 가질 만한 물건이 아니다. 하여 출처를 물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온 것이다.
오는 동안 카이로시아는 이 물건의 가치에 대한 생각을 했다. 많은 장신구를 가져보았기에 웬만해선 마음 흔들리지 않는 자신조차 갖고 싶은 물건이다.
그렇다면 이건 대박을 낼 물건이다.
부피는 적고, 결코 상하지 않으며, 이익은 많은 물건이야말로 모든 상단이 바라마지 않는 상품이 아니던가!
카이로시아는 어떻게든 이 상품을 입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의 신분을 드러냈다.
그래야 상대로부터 신뢰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인스 기사님! 세실리아에게 주신 머리집게는 어디에서 구한 것인지요?”
“그건 왜 묻습니까?”
“저희 상단에서 그 물건을 취급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어디에서 구했는지를 알려주시면 후사하겠습니다.”
“흐으음…….”
현수가 잠시 말을 끊자 카이로시아가 재차 입을 연다.
“솔직히 말씀드려 머리집게는 상당한 이익을 창출시킬 상품입니다. 어쩌면 저희 이레나 상단이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해 줄 수도 있는 거지요.”
“……!”
“저희가 이 상품을 취급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카이로시아는 정중히 머리 숙여 절까지 한다.
자신은 분명 귀족이다.
세실리아에게 이야기 듣기로 하인스는 기사라 했다. 따라서 자신의 신분이 더 높지만 상단을 위해 고개 숙인 것이다.
현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말해줄 수 없소.”
“네……?”
“말해줄 수 없다고 했소이다.”
카이로시아는 설마 자신의 청을 거절할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는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하인스 기사님! 정말 말 안 해주실 건가요?”
“그렇소. 내가 굳이 그것까지 밝힐 이유가 없질 않소?”
“그, 그거야 그렇지만…….”
“더 이상의 용무가 없는 것 같은데 가주시오. 나대로 할 일이 있으니…….”
“네에, 오늘은 이만 물러가죠. 실례 많았어요.”
카이로시아가 가고 난 뒤 문을 닫았다. 그리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머리집게 같이 하찮은 물건도 이곳 대륙에선 비싼 값에 팔릴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흐음! 하인스 상단에서 취급해야 하겠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도울 세력을 만들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기에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아……! 하인스 백작님,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왔는지 수건으로 덜 마른 머리의 물기를 털며 들어서던 얀센이 반색한다.
“조금 전에 왔네. 잘 있었는가?”
“네에, 덕분에요! 별일 없으셨지요?”
얀센은 현수의 위아래를 훑어본다.
혹시 상처 입은 데라도 없나 살피는 듯하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렇네. 나는 괜찮네. 자네도 별일 없었지?”
“네에, 그럼요. 참……! 정말 고맙습니다. 백작님 덕분에 요즘 정말 개운한 기분을 느끼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때 얀센의 부인이 들어선다. 보아하니 그녀 역시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은 듯하다.
“어머, 오셨군요, 오랜만입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백작님!”
진심이 담긴 인사였다. 그러고 보니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배가 많이 나와 있었다.
이를 본 순간 현수의 뇌리를 스치는 상식 하나가 있다.
임산부에게 가장 결핍되기 쉬운 게 철분과 엽산이다.
철분이 부족하면 사산이나 조산의 위험이 있다.
엽산 부족 시엔 태아의 신경관 결손, 무뇌증, 지능 장애, 뇌성마비, 저체중아, 언청이 발생률이 높다.
따라서 철분과 엽산이 필요한데 음식만으론 충분치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별도로 복용할 필요가 있다.
현수는 아공간에서 이를 해결할 것들을 찾았다. 철분과 엽산 보충제, 그리고 임산부를 위한 종합비타민을 꺼낸 것이다.
“얀센, 자네 부인의 이름은 뭔가?”
“로사라고 합니다. 백작님!”
“로사, 이건 임산부에게 좋은 것이오. 한 번에 한 알씩 하루에 두 번 물과 함께 먹도록 하시오.”
“네, 네에……!”
주니까 받기는 했다.
귀족이 주는 것을 거절해도 죄가 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나 로사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 먹으면 아주 건강한 아기가 태어나오. 코리아 제국의 귀족 거의 모두가 사용하는 것이니 염려치 마시오.”
“아이고, 고맙습니다요. 백작님!”
“어허! 임산부가 어찌……. 게다가 목욕까지 했는데……. 어서 일어나시오.”
대강 청소는 했지만 바닥엔 여전히 흙먼지가 있다. 그런데 로사가 털썩 엎드려 고개를 조아린 것이다.
“아닙니다. 백작님! 이년이 남편에게 들었습니다. 백작님 덕분에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을요. 또한 세실리아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셨다는 것도 들었습니다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요. 그런데 어찌 이처럼 귀한 것을 또…….”
“얀센더러 열심히 일하라는 뜻에서 주는 것이오. 그러니 가르쳐 준 대로 매일 매일 먹으시오.”
“네, 고맙습니다요.”
로사는 비타민 등을 보물인 양 귀중하게 간수했다.
“로사, 괜찮다면 뜨거운 물을 만들어주겠소? 목이 컬컬하여 차나 한 잔 마시려 하오.”
“백작님! 차를 직접 만드시려 합니까?”
“흐음, 여러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니 가서 물이나 뜨겁게 데워오시오.”
“알겠습니다요.”
로사가 물러간 후 현수는 얀센을 자리에 앉히고 연막탄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후춧가루와 달리 잘못 사용하면 질식사를 유발할 수 있는 제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반드시 구멍들을 메워야 하는 이유도 설명했다.
“백작님, 여기 뜨거운 물 대령했습니다.”
“고맙네.”
로사로부터 물을 받은 현수는 아공간에서 세 개의 찻잔을 꺼냈다. 입술을 대는 부분은 금박이 입혀져 있고, 몸통엔 붉은 장미가 그려져 있는 아주 화사한 커피잔 세트이다.
다음에 꺼낸 것은 커피믹스와 녹차 티백이다.
“어머! 이 향기는……? 너무 향기로워요.”
“이걸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자네. 으음, 이것도 좀 그렇기는 하겠군, 아무튼 얀센과 로사는 이것을 마셔보게,”
“백작님, 이게 뭡니까?”
“녹차라 하는 것이네.”
“네에……? 그럼 수도에 계신 고위 귀족 분들도 가끔 맛보실 수 있다는 그 귀한 차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하여간 맛이나 보게.”
“아이고, 감사합니다.”
현수는 아르센 대륙에 온 이후 딱 한 번 커피를 마셨을 뿐이다. 그렇기에 뜨거운 물을 청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