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86화 (86/1,307)

# 86

“흐으음……!”

“오오오……!”

얀센과 로사는 비슷한 소리를 냈다. 생전 처음 마셔보지만 어찌 그 깊고 그윽함이 느껴지지 않겠는가!

현수 역시 커피 향을 느끼며 안락한 기분을 만끽했다.

“이보게, 얀센!”

“네, 백작님.”

“전에 주었던 후춧가루는 어찌 되었나?”

“그거 다 팔렸습니다.”

“뭐어? 그 많은 걸……?”

“네, 로잘린 영애와 자작님 덕분에 불과 며칠 만에 완전히 동이 났습죠.”

“그래? 그래서 얼마나 받았는가?”

얀센이 다소 흥분한 음성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병에 담긴 것은 2골드, 통에 담긴 것은 8골드를 받았다고 한다. 예상했던 금액의 딱 2배이다.

매출총액이 무려 1,000골드이다. 한화로 10억 원이다.

이 가운데 20%는 로니안 자작이 구매했다. 왕실과 중앙 귀족들에게 보낼 선물용이다.

판매대금은 안전을 위하여 로니안 자작에게 맡겼다고 한다.

서류를 확인한 현수는 얀센에게 100골드를 배당해 주었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1억을 번 것이다.

당연히 황송해한다.

아무튼 로잘린과 얀센은 개업 후 며칠 만에 곧바로 폐업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얼굴은 환했다.

얀센은 평생 동안 꿈도 못 꿀 액수를 받게 되어서 웃은 것이고, 로잘린은 장사가 너무 잘 돼서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니 물건을 더 주셔야겠습니다. 요즘도 날마다 로잘린 영애가 와서 백작님을 찾거든요.”

“하하, 알겠네. 더 주지. 참, 조금 전에 이레나 상단에서 사람이 왔다 갔네.”

“이레나 상단이요?”

“그렇네. 이곳 테세린 지부의 지부장이라는 여자였네.”

“여자가 지부장이라고요?”

얀센은 놀랍다는 표정이다. 상행위가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세실리아의 머리집게를 취급하고 싶다고 했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우리 상단에서 취급하면 어떠냐는 물음이네.”

“저어, 죄송하지만 그 집게가 많이 있습니까?”

“있기는 많이 있네.”

“혹시 제가 물건을 볼 수 있는지요?”

“그러지. 잠시만 기다리게.”

현수는 짐짓 자신의 방으로 가서 머리집게들을 꺼냈다. 백두마트 평촌점에서 팔려던 것이다.

“우와아, 세상에나……. 굉장히 화려하군요. 여기 박힌 것들 전부 보석이겠지요?”

얀센은 머리집게에 자잘하게 박힌 채 반짝이는 것들을 보석으로 여기는 듯하다. 아니라고 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그럴 것이네.”

잠시 상품들을 만지작거리던 얀센이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이 상품은 상당히 고가에 팔릴 물건이지만 우리가 취급하기엔 역부족인 겁니다.”

“이유를 설명하게.”

“이게 전부 보석이라면 우리보다는 더 큰 상단에서 취급하는 것이 맞습니다. 우린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아직 없으니까요.”

무슨 뜻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대부분의 상단은 스스로를 호위할 무력을 가지고 있는데 하인스 상단은 그런 게 없다는 뜻이다.

후춧가루는 괜찮지만 머리집게가 안 되는 이유는 식품과 보석이라는 차이 때문이다.

“흐음, 그런가? 그럼 이레나 상단은 어떤가?”

“신용있고 공정한 거래를 하는 상단으로 평가됩니다. 힘도 있구요. 믿고 맡겨도 된다는 거지요. 게다가 대륙 전체를 아우르기에 이런 상품을 취급할 능력이 충분합니다.”

“흐음, 그런가? 알겠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얀센이 부연설명을 한다.

“이레나 상단의 유통망은 대륙 전체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습니다. 훨씬 빨리 팔릴 것이고, 더 많은 값을 받을 겁니다. 또한 나중에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겁니다.”

“좋아, 알겠네. 그렇게 하지.”

“단, 너무 일찍 넘기지는 마십시오. 애가 닳아야 좋은 값을 받으실 수 있는 겁니다.”

과연 장사꾼다운 생각이라 여겼기에 현수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알겠네. 내 꼭 그리하도록 하겠네.”

다음날, 그리고 또 다음날에도 카이로시아가 방문했다.

물론 머리집게의 출처를 알기 위함이다. 현수는 얀센의 당부대로 고심하는 척하며 애만 태우게 했다.

그렇게 7일이 지났다. 카이로시아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저녁 세실리아 여관을 찾아왔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곧장 오는 모양이다. 그런데 꼭 저녁식사 시간에 오는지라 같이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도 왔다. 그간 일곱 번이나 저녁을 같이 먹었기에 이제 조금 편해진 사이가 되었다.

열심히 음식을 먹더니 식탁을 치우자마자 출처를 묻는다. 그런데 별로 기대하는 표정이 아니다.

한편, 현수는 오늘도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도 안 가르쳐 주실 건가요? 정말 너무하세요.”

새침한 표정을 짓는데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현수는 짐짓 어렵게 입을 뗀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출처를 밝히는 것은 어렵지 않소.”

“그래요? 어디죠? 그걸 구한 데가?”

카이로시아가 바싹 다가앉는다.

“그 머리집게는 코리아 제국의 물건이오.”

“네에……? 코리아 제국이요? 그런 나라도 있어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국가명에 카이로시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얼굴 고개 숙인다.

“아……! 죄송해요. 처음 듣는 국가명이라…….”

“아니오. 이곳 아르센 대륙엔 알려지지 않은 나라일 것이오. 바닷길로 20,000㎞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니까.”

현수는 짐짓 지구 둘레의 절반 길이를 댔다.

찾아갈 마음을 원천봉쇄하기 위함이다.

“네에……?”

카이로시아는 이제 틀렸다고 생각했다.

육지가 아닌 바다로 20,000㎞면 못 가는 곳이라 생각해야 한다. 바다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낙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아직도 머리집게를 상품으로 취급해 보고 싶소?”

“혹시 여분으로 갖고 계신 것이 있는 거예요?”

다시 생생해지는 표정이다. 그런데 참 아름답다.

‘로잘린도 예쁘지만 카이로시아라는 이 여인도 엄청 예쁘구나. 지구에 가면 단박에 할리우드로부터 러브콜을 받겠어.’

현수는 카이로시아의 미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집을 떠나 있는 동안 혹시 필요할까 싶어 가져온 것들이 조금 있소.”

“그, 그래요……? 얼마나 되죠?”

카이로시아는 다급한 마음에 환한 미소까지 지었다. 무릇 장사꾼이란 손해를 보든 이익이 남든 무표정해야 한다.

그래서 카이로시아는 ‘아이언 페이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철가면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게다가 허둥지둥이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다.

“그전에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소.”

“말씀하세요.”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이지만 다른 뜻이 있어 그러는 것이 아님을 먼저 말씀드리오.”

“……?”

“이곳 사람들은 몸에서 냄새가 나오. 그것이 의복에 배어 어떤 이는 악취를 뿜더이다. 일전에 이곳 영주성에 들러 영주부인과 영애를 만나고 왔소.”

“그런데요?”

“귀족인 그녀들에게서도 구리구리한 냄새가 났소. 그런데 카이로시아 양에게선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소. 그 비결은 뭐요?”

“네에……?”

카이로시아의 얼굴은 금방 빨개졌다.

사내가 자신의 체취를 맡았다는데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현수는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나 어쩌겠는가!

“다른 뜻이 있어 그런 건 절대 아니오. 아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데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아 묻는 것이오.”

“어머나, 그럼……!”

카이로시아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오늘 입은 옷은 가슴 부위가 푹 파져 있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오랜 항해를 해서 살이 많이 빠졌다. 당연히 옷이 크다. 그 결과 옆에서 보면 가슴의 절반 이상이 보인다.

그런데 옆에서 보았다고 하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게다가 약간 발끈하는 마음이 들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왔는데 하찮은 여인 취급을 받았다 생각한 까닭이다. 그렇기에 저도 모르게 쏘아붙였다.

“실례예요. 숙녀의 가슴을 훔쳐보는 건!”

“훔쳐보다니? 무슨 말을……. 아니오. 결코 카이로시아 양의 가슴을 훔쳐보지 않았소.”

“흥……! 아니긴요? 옆을 스쳐 지날 때 보셨을 거 아니에요.”

“아니오. 냄새에 신경 쓰느라 정말 못 보았소.”

“그래도 전 믿지 못하겠군요.”

카이로시아는 사내가 어떤 족속인지 너무도 잘 안다. 그렇기에 본능적으로라도 시선이 갔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보지 못하였소. 아니, 안 보았소.”

“그래도 사과하세요. 이성으론 보지 못했어도 본능으론 보았을 것이니…….”

현수는 카이로시아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들어서자마자 발달된 가슴부터 보았던 때문이다.

“쩝……! 미안하오. 하나 진짜로 본 것은 없소.”

“하인스 기사님, 사내답지 못하시군요. 실망했습니다.”

“허어, 이런……!”

꼼짝없이 치한으로 몰린 현수는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떤 말을 해도 상대가 믿지 않을 테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냄새가 나지 않는 이유를 알려주시오.”

“먼저 제 가슴을 훔쳐본 것에 대한 정중한 사과를 해주시면 흔쾌히 알려 드리지요.”

“끄으응……!”

현수가 나직한 침음을 내자 카이로시아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같은 순간, 현수는 져주는 게 이기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여자와 다퉈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아버지의 말도 떠올랐다. 그렇기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사과 한 번 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돈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지 않던가!

“좋소. 사과하지. 내 잘못이 크오.”

“조금 더요.”

모처럼 기선을 제압한 카이로시아는 일부러 도발했다. 상인으로서 주도권을 쥐기 위함이다. 현수는 앙큼 맞은 속셈을 눈치챘지만 짐짓 모르는 척했다. 아무리 그래도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숙녀의 가슴을 훔쳐보았소. 용서하시오.”

“좋아요. 이제야 사내답군요. 사과를 하셨으니 왜 냄새가 나지 않는지 알려 드리지요. 대신 제 가슴을 본 것은 영원히 잊어주세요.”

‘제기랄! 보지도 못한 걸 어찌 잊어? 한 번 보고나 이런 경우를 당하면 억울하지나 않지. 진짜 확 한 번 볼까?’

억울한 마음에 현수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으시네요.”

“알겠소. 깨끗이 잊겠소.”

“호호, 고마워요. 근데 제 가슴이 큰가요? 작은가요?”

“뭐요……?”

“호호, 농담이었답니다.”

상대의 허를 찔러 반응을 보려 했던 카이로시아는 교소를 터뜨리며 생긋 미소 짓는다.

눈이 반달처럼 둥글게 휘는데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에도 없었던 사과 몇 마디에 이처럼 즐거워하기에 현수의 마음은 조금 더 너그러워졌다.

“우리 가문의 영지인 로이어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땅은 척박하고 산에는 몬스터들이 많아 발전하기 어려운 영지이지요.”

카이로시아의 설명은 이어졌다.

로이어 영지는 상행위 이외엔 발전 가능성이 없는 곳이라 일찌감치 장삿길로 눈을 돌렸다.

아니면 먹고살기조차 힘든 땅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카이로시아가 어렸을 때가 가장 발전하던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카이로시아가 숲에서 길을 잃었다.

다섯 살 무렵이다.

길을 잃고 울고 있던 카이로시아 앞에 나타난 것은 오크 두 마리였다. 야들야들한 먹이를 앞에 둔 오크는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었다.

카이로시아는 겁에 질린 얼굴로 도망치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돌부리에 걸려 엎어졌다.

아픔을 무릅쓰고 일어나 달리려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정강이뼈가 복합골절된 것이다. 뼈가 피부를 뚫고 나온 상황이 되어 카이로시아는 일어설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꼼짝없이 몬스터의 먹이가 될 상황이다. 그때 위기에 처한 카이로시아를 구한 것은 숲의 종족 엘프였다.

화살 두 방으로 오크를 물리친 엘프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카이로시아를 데리고 갔다.

골절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엘프 마을은 인간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노인이든 절대 출입 금지이다. 하여 엘프 장로 하나가 마법으로 카이로시아를 낫게 하였다.

그리곤 곧장 영지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현수가 카이로시아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니까 엘프 장로의 마법 덕에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오?”

“현재로선 그게 가장 합리적인 답이에요.”

“흐음, 대체 어떤 마법이기에……?”

현수가 잠시 생각에 잠기자 카이로시아는 주점 내부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카이로시아가 묻는다.

“그런데 머리집게 말이에요. 그거 얼마나 가지고 계시죠?”

“제법 많이 있소.”

“그래요? 다행이군요. 근데 보여주실 수 있나요?”

“뭐 그럽시다. 잠시만 이곳에 기다리시오.”

“여긴 아무도 없어서 조금 그래요. 같이 가시지요.”

뭔가 다른 물건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 듯하다. 현수는 참 장삿속이 밝은 여인이라는 생각을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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