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저, 이거 다 마실게요. 네……? 그러니 이 찻잔과 티스푼도 제가 팔게 해주세요.”
‘커피를 다 마실 테니 달라고……? 아직 뜨거울 텐데? 뭐야? 개그 프로그램을 본 건 아닐 테고. 근데 커피를 다 마시는 게 뭐 어쨌다고? 흐음, 이상하군.’
카이로시아는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를 마셔서 순결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 거래를 성사시키겠다는 뜻이었다.
하나 현수가 어찌 이를 짐작이나 하겠는가!
그저 찻잔과 티스푼을 팔고 싶은 욕심에 아무 말이나 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쯤 되면 동상이몽도 이런 동상이몽이 없을 것이다.
“흐음, 일단 방에 가봐야겠소. 이제 곧 밤이 될 텐데 너무 어질러 놓았으면 자기 힘들 테니.”
“저, 이거 다 마시고 곧 따라서 올라갈게요. 먼저 가 계세요. 아셨죠?”
“뭐, 그럼 나야 좋지.”
현수는 카이로시아가 올라와서 정리하는 것을 도와준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나 카이로시아는 아니다.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를 다 마시고 올라와 순결을 바쳐주면 좋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현수가 올라가고도 한참 동안 카이로시아는 찻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시느냐 마시지 않느냐를 갈등한 것이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심하던 카이로시아는 어느 순간 결심했다는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곤 찻잔을 들어 올렸다.
현수의 물건만 독점할 수 있다면 이레나 상단은 대륙제일의 상단으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다.
이는 곧장 로이어 영지를 부유하게 하는 일이다.
부친인 에델만 백작의 꿈은 지상에서 가장 풍요롭고. 살기 좋은 영지를 운영하는 것이다.
이레나 상단이 창설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는 상황이지만 아직 꿈을 이루려면 멀었다고 했다.
로이어 영지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이 많기 때문이다.
만일 머리집게와 커피잔, 그리고 티스푼을 취급할 수 있게 된다면 아버지의 꿈은 보다 쉽고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다.
카이로시아는 가문의 일원으로서 가문의 발전을 위한 희생을 결심한 것이다.
진한 갈색 액체를 잠시 바라보던 카이로시아는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그리곤 커피잔 가까이 입술을 가져갔다.
순간, 어차피 마실 거라면 철저히 즐기자는 마음을 먹었다. 하여 폐부 깊숙이 향기를 먼저 들이마셨다.
헤이즐넛의 향기는 기분을 좋게 해준다.
하여 과연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라는 생각을 했다. 냄새만으로도 황홀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다음엔 한 모금 들이켰다.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맛이 느껴진다. 그런데 달고, 너무 맛이 좋다. 그래서 지긋이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음미하면서 커피를 마셨다.
‘아……! 너무 맛이 있어. 과연 마물은 마물이야.’
어쩌면 자신의 순결이 깨지게 할 물건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잔을 비웠다. 마침내 바닥이 보이자 카이로시아는 잊고 있었다는 듯 흠칫했다.
‘어쩌지……? 나도 모르게 다 마셔 버렸어. 어떻게 하지? 도망갈까……? 그런데 가다가 약효가 발휘되면 어쩌지?’
길바닥에 즐비한 평민이나 농노들을 떠올린 카이로시아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귀족의 일원으로 태어나 귀족으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귀족은 평민이나 농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언제든 자신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가축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밖에 나갔다가 약효가 발휘되면 그런 가축에게 순결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에 나갈 수 없다 생각한 것이다.
한참을 물끄러미 찻잔만 바라보던 카이로시아는 결심했다. 그리곤 그것들을 챙겨 들고 계단으로 올랐다.
똑똑!
“들어오시오.”
삐이꺽―!
“……!”
카이로시아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에 잠시 몸을 떨었다. 문을 열자 현수가 침대를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찻잔과 티스푼도 취급하고 싶다고 했소?”
“네, 백작님!”
“좋소, 취급하게 해주리다. 대신…….”
“……!”
현수가 잠깐 말을 끊자 카이로시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하룻밤 잠자리 시중을 들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어쩌면 이곳에 머무는 내내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런 요구를 한다 할지라도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을 한 카이로시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괜스레 눈물이 나오는 것 같더니 이내 방울져 떨어진다.
귀족의 딸로 태어나 비록 상행위를 하곤 있지만 이렇게 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한 일이 없다.
장사하느라 혼기를 놓치기는 했다. 하나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을 미모와 몸매, 그리고 학식과 교양이 있기에 좋은 남편감을 얼마든지 고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로이어 영지엔 카이로시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다는 청혼이 쇄도하고 있다.
이레나 상단이 점점 부유해지기에 이를 탐내는 무리들도 섞여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가!
평생 자신만을 사랑해 줄 신랑감만 찾을 수 있다면 그깟 욕심 따위는 용서해 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오늘 아무런 보장 없이 순결만 잃게 생겼다. 하여 괜스레 서러운 기분이 들어 눈물을 흘린 것이다.
하나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현수가 보고 기분 나빠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곤 시선을 맞췄다.
드디어 현수가 입을 열려고 한다.
“대신… 이 자리에서 판매 가격을 정하지 맙시다.”
“네에……?”
전혀 뜻밖의 말이기에 반문했다.
“물건은 공급해 주겠소. 대신 물건이 팔리면 팔린 가격을 기준으로 이익금을 나누자는 것이오.”
“그럼 어떻게……?”
“이레나 상단은 대륙 전체를 아우른다 하였소. 맞소?”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신용이 있는 상단 같아서 하는 말이오.”
“저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내놓을 찻잔이나 티스푼은 분명 비싼 가격에 팔려 나갈 것이오. 안 그렇소?”
“그렇습니다. 모두 고위 귀족가에 팔려나가겠지요.”
“그렇게 팔려 나간 값을 기준으로 이문을 나누자는 것이오. 먼저 말해보시오. 얼마면 되겠소?”
“……!”
“예를 들어 찻잔 하나에 10골드를 받았다고 칩시다. 물건은 내가 내놓았고, 판매는 전적으로 이레나 상단이 맡았소. 그럼 우리가 이를 얼마씩으로 나누는 것이 적합하겠느냐고 묻는 것이오.”
“아……!”
이제야 현수의 말을 알아들은 카이로시아는 눈빛을 빛냈다. 열정적으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할 때의 눈빛이다.
“비율로 정하는 것이 제일 편할 것이오.”
“제 생각엔 6대 4 정도면 어떨까 싶어요.”
“흐음……! 6대 4라면 조금 박한 느낌이 드는데.”
현수는 이레나 상단이 6, 자신이 4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한국에서도 상품을 만드는 사람보다 유통시키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번다.
예를 들어, 배추 농사를 지은 농부는 한 포기에 200원을 받고 밭떼기로 넘긴다.
이를 수매한 산지 도매상은 다른 도매상에 넘기면서 500원도 받고, 600원도 받는다. 배추가 자라는 동안 물 한 번 안 줬음에도 농부보다 더 많이 버는 것이다.
이게 가락동 농수산물 센터 같은 곳을 거쳐 일반 소비자의 손으로 들어가면 2,000원이 되기도 하고, 3,000원이 되기도 한다. 장사꾼들이 마진을 붙이기 때문이다.
농부들로선 배가 아플 것이다. 산지 가격의 열 배 내지 열다섯 배로 거래되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가끔은 이마저도 못 받아 애써 농사 지은 배추밭을 트랙터로 갈아 엎어버리는 것이다.
어쨌거나 카이로시아는 얼른 현수의 말을 받았다.
“그럼 7대 3으로 해요. 우리 이레나가 3, 하인스 백작님이 7. 이 정도면 어때요?”
“내가 7……?”
“네, 백작님 몫을 8까지 생각해 봤는데 운송과 세금 등을 고려해 보니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러니 7로 만족해 주시면 안 될까요?”
카이로시아는 현수가 꺼려하더라도 7대 3으로 고정시킬 자신이 있다. 이제 곧 침대에 같이 들어갈 텐데 그때 이 비율로 확정시키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베갯머리송사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이는 잠자리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바를 속살거리며 청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성사된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 청을 넣으니 들어주는 것이다.
카이로시아 역시 현수가 한창 기분 좋아할 때 속삭여 원하는 바를 이룰 생각을 한 것이다.
한편, 현수의 입장에선 많은 돈이 필요하던 터이다. 용병들을 고용하여 세력화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몫을 7까지 준다니 흡족하다.
하나 어찌 이를 겉으로 드러내겠는가!
그저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애를 썼을 뿐이다.
“이쪽으로 오시오.”
침대 정리를 끝낸 현수의 부름에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생각한 카이로시아는 입술을 잘끈 깨물고는 다가갔다.
이제 순결을 잃는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이 또 이상하다. 현수가 마법 배낭에서 찻잔과 티스푼을 꺼내 놓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 꺼낸 것들 역시 백두마트 평촌점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더 있지만 다 꺼내 놓으면 방이 꽉 찬다.
하여 나머지는 일단 보류한 것이다.
카이로시아는 현수가 내놓는 물건들을 보면서 연신 감탄사를 터뜨린다. 모두가 예술품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좋을 명품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현수는 모든 비닐 종류를 제거했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이…….”
결국 문을 열고 옆방까지 물건을 쌓아야 했다.
“자아, 이제 얼추 다 꺼낸 것 같소. 이 정도면 만족하오?”
수많은 물건들을 꺼내 놓고 들어서는 현수를 본 카이로시아는 너무도 기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낸다.
“백작님! 아흥……! 백작님!”
“어, 어어어……!”
현수는 와락 품에 안겨드는 카이로시아의 동체를 받아 안으며 당혹성을 터뜨렸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뭉클함 때문이다.
“백작님, 너무 멋져요. 아아, 백작님!”
쪼오옥―!
카이로시아는 현수의 입술에 뽀뽀를 했다.
느닷없는 입맞춤에 현수는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이로시아의 말이 이어졌다.
“이거 열심히 팔게요. 팔아서 백작님 점점 더 부자가 되게 해드릴게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나야 뭐……. 부자가 되게 해준다니 고맙소. 근데 언제까지 이렇게……?”
“에구머니나……!”
자신이 현수를 부둥켜안고 있음에 화들짝 놀란 카이로시아가 얼른 떨어져 나간다.
‘쩝……! 괜히 얘기했다. 조금 전에 좋았는데.’
미녀가 안아주는데 싫어할 사내가 누가 있겠는가!
“미, 미안해요. 팔 물건이 너무 많아서……. 너무 기뻐서…….”
카이로시아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과년한 처녀가 먼저 사내를 안고 뽀뽀까지 했다.
만난 지 이제 겨우 열흘쯤 되었고, 이름만 아는 사내이다.
어찌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험험! 아무튼 이걸 다 팔 수 있다니 대단하오.”
“네에…….”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카이로시아는 두 볼이 상기됨을 느끼고 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그때 문득 스치는 상념이 있다.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의 효과는 언제 나타나지? 설마 내가 나머지 다섯에 속하는 건가?’
오입쟁이의 향기라는 마물을 마시면 절로 몸이 배배 틀리고, 달뜬 호흡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때 사내의 손길이 닿으면 그가 누구든 무조건 상대하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몸이 배배 틀리지도 않고, 호흡도 정상이다.
“카이로시아 양!”
“네에.”
“출출한데 뭣 좀 먹으러 내려가겠소?”
‘역시……! 그래. 어쩌겠어? 어차피 언젠가는 잃을 순결이잖아. 그래, 그러자. 가문을 위하여……. 하인스 백작이라고 했지? 키도 크고 저 정도면 얼굴도 잘 생겼잖아.’
밥 먹고 나서 같이 밤을 보내자는 뜻으로 받아들인 카이로시아는 생각을 정리하곤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저도 백작님과 함께하고 싶었어요.”
‘뭔 소리야? 뭘 함께해? 아……! 밥을 같이 먹고 싶었다고? 하긴 혼자 먹는 건 조금 그렇지.’
“사람을 불러 물건부터 치워야 하지 않겠소?”
“물론이에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방 안에 어질러져 있던 물건들이 모두 치워진 것은 얀센과 로사 부부가 정성 어린 음식을 만든 뒤였다.
“어머……! 이 스테이크에선 냄새가 안 나요. 이거 어떻게 요리한 거죠? 특별한 고기인가요?”
카이로시아의 질문에 답한 이는 로사이다.
“아니에요. 백작님이 주신 후춧가루를 쳐서 그럴 거예요.”
“후춧가루……? 그럼 혹시 이것도……?”
카이로시아의 시선을 받은 현수는 싱긋 웃음 지었다.
“카이로시아 양! 후춧가루는 하인스 상단만의 품목이니 탐내지 마시오.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시오. 이쪽은 하인스 상단 테세린 지부 지부장인 얀센이오.”
“반갑습니다. 얀센입니다.”
“이쪽은…….”
현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카이로시아가 나섰기 때문이다.
“이레나 상단의 미판테 지부장을 맡고 있는 카이로시아 에델만 드 로이어라고 해요.”
“네! 이레나 상단…….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상당히 정직한 상단이지요.”
“좋은 평가에 감사드려요. 상인의 생명이 무어겠습니까? 신용과 정직이지요. 이레나는 이걸 철칙으로 여기고 있죠.”
카이로시아는 짐짓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