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그런데 후춧가루라는 건 뭐죠?”
“아! 그건…….”
현수 대신 얀센이 설명한다. 이제부턴 그가 전문적으로 팔아야 할 물목이기 때문이다.
“치이, 제가 백작님을 조금 더 일찍 만났어야 하는 건데……. 아깝군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축하드려요. 얀센! 이제 부자 되는 일만 남았군요.”
“하하, 네! 그렇습니다. 백작님을 만나서 벌써 제 팔자가 폈습니다. 제 생각에도 큰 부자가 될 것 같습니다.”
역시 상인이다. 후춧가루에 대한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얼마나 많이 팔릴지 감 잡는 것을 보면……!
현수는 새삼스런 눈으로 카이로시아를 바라보았다.
운이 좋아 귀족가에서 태어났고, 상단 운영에 참여하면서 경험을 약간 쌓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안목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식사를 하는 동안 거품입욕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카이로시아의 눈이 반짝인 것은 당연지사이다.
세탁비누 이야기도 나왔다. 카이로시아는 아예 의자를 당겨 앉았다. 강한 호기심과 흥미의 결과이다.
냄새를 없애주는 락스와 페브리즈 이야기까지 나오자 현수의 의자 옆에 자신의 것을 딱 붙였다.
“하인스 백작니임!”
“……?”
“전 아직 하인스 백작님의 풀 네임을 몰라요.”
저녁 먹는 동안 카이로시아는 어떤 방법으로든 현수의 곁에 남기로 마음먹었다.
제국의 백작이다.
게다가 신기한 상품을 무궁무진하게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런 사람이 자신에게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를 주었다.
오늘 밤, 순결을 잃어도 좋다. 아니, 꼭 잃어야 한다.
그래야 이 대단한 사내를 휘어잡을 빌미가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이 아프겠지만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겪는 일이라 들었다. 그렇다면 그 고통을 오늘 겪고야 말겠다는 결심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양을 미리 떤다고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하여 축농증 환자처럼 코맹맹이 소리로 현수를 부른 것이다.
한편, 현수는 멀쩡하던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은 생각에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저요, 저도 그 거품입욕제라는 거 한번 써보면 안 될까요? 제 옷도 세탁비누라는 걸로 한번 빨아보고, 페브리즈라는 걸 한번 뿌려보면 안 돼요? 네?”
“……!”
카이로시아는 갑자기 팔짱을 낀다. 그리곤 몸을 배배 틀며 콧소리를 낸다. 그러다 현수가 얼핏 그녀의 가슴을 보게 되었다.
보고 싶어 본 것이 아니라 카이로시아가 몸을 틀면서 앞섶이 벌어져서 보게 된 것이다. 너무도 뇌쇄적이다.
“아잉! 한 번만 하게 해줘 봐봐요.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단 말이에용. 하게 해주실 거죠? 그쵸? 로시아도 그거 한 번 해보고 싶어용. 백작니임! 네……? 하게 해주실 거죠? 그쵸?”
“끄으응……!”
현수는 나직한 침음만 낼 수 있을 뿐이다.
카이로시아는 미녀 중에서도 미녀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캐서린 제타 존스와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녀보다 더 아름답다.
아무런 화장도 하지 않은 맨얼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의 현란한 화장 기술이 더해지면 어떻겠는가!
어쩌면 캐서린 제타 존스가 추녀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런 미녀의 뇌쇄적인 애교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알았소. 알았으니 이제 그만…….”
“호호, 고마워요. 기왕 하게 해주신다고 했으니 저녁 먹고 할게요. 로사 아주머니, 그래도 돼요?”
“물론입니다. 카이로시아 아가씨! 더운 물은 얼마든지 쓰셔도 됩니다. 오늘도 여관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니 마음 놓고 쓰십시오.”
“고마워요. 로사 아주머니!”
현수는 카이로시아를 또 다시 재평가했다. 평민인 로사에게 하대하지 않고 반 공대하는 모습 때문이다.
‘좋아, 기왕에 하게 해주는 거니 아주 끝장을 내주지.’
8장 카이로시아 에델만 드 로이어
저녁 식사 후 카이로시아는 커피 한 잔을 더 마셨다.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
수많은 처녀들로 하여금 순결을 잃게 만든 것이지만 아주 달게 마셨다. 안 주면 달래려고 했던 것이다.
식사 전에 먹었던 것에 문제가 있었는지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걸 두 잔째 마시니 이번엔 효과가 확실할 것이란 생각에 아주 기분 좋게 마셨다.
실제로도 매우 달아 입이 즐거웠다.
먼저 욕실로 간 현수는 거품입욕제 가운데 페퍼민트향을 뿜는 것을 풀어 넣었다.
페퍼민트 정유에는 멘톨(Menthol)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다. 하여 피부와 점막을 시원하게 해주는 효능을 낸다.
뿐만 아니라 정신적 피로와 우울증을 완화시켜 주는 효능이 있으며, 항균과 통증 완화 효과까지 있다.
현수는 곳곳에 아로마2) 향초까지 켜두었다.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가물거리는 빛을 내니 냄새는 물론이고 로맨틱한 분위기까지 난다.
여기에 세면용 비누와 일회용 샴푸도 꺼내 놓았다.
비누야 환경오염을 덜 시켜 여러 번 꺼냈지만 샴푸는 웬만해선 꺼내지 않던 것이다.
하나 착한 마음을 가진 카이로시아를 위해 꺼낸 것이다.
물론 다 쓴 껍질은 회수할 생각이다.
카이로시아가 목욕하는 동안 돕던 로사가 나오자 그녀로 하여금 벗어놓은 옷을 세탁하도록 했다.
차마 손수 빨래를 해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쓰고 남은 세탁비누를 쓰게 하려다 옥시크린을 쓰도록 했다.
원룸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현수는 여러 세제를 사용한 바 있다. 그러던 중 흰 옷은 더욱 희게 해주고, 색깔 옷은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는 이걸 써본 적이 있다.
찌든 때를 빼는 것은 물론이고, 얼룩이 있다면 제거해 준다.
뿐만 아니라 각종 세균을 멸균시키고, 냄새까지 제거해 준다는 제품이 아니던가!
세탁을 하던 로사는 너무도 쉽게 때가 빠지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은 역시 샤프란이다.
현수는 하늘색 블루 비앙카를 쓰도록 했다. 맑게 개인 하늘처럼 청명하고 상쾌한 향을 뿜는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빨래를 하던 로사는 참 많은 것을 경험한다 생각했다. 그리곤 하인스 백작을 만난 것을 천운으로 여겼다. 거만하지도 않고, 아랫사람들을 잘 보살펴 주는 좋은 주군이 될 듯하다.
아무튼 목욕을 마친 카이로시아는 목욕타월로 몸을 감고 나타났다. 이런 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는 모양이다.
물론 현수가 있는 방은 아니다.
현수는 도끼빗과 앤틱 거울 하나를 꺼내서 보냈다. 심부름은 코찔찔이 세실리아가 했다.
자작가의 딸을 한 달 동안 부려먹을 월급과 맞먹는 것인데 거저 꺼내서 준 것이다.
카이로시아는 샴푸로 머리를 감고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름기가 쏙 빠지면서 너무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와서는 머리를 빗으며 또 한 번 감탄했다.
전에는 머리를 빗을 때마다 엉킨 것 때문에 아픔을 느꼈다. 그런데 빗질을 하면 그냥 부드럽게 넘어간다.
처음 욕실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카이로시아는 페퍼민트의 청량한 향을 느끼곤 감탄했다.
그리곤 몸에서 나오는 때를 보고 부끄러워했다.
엄청난 양이 나온 것이다. 목욕 전에 이것이 피부 노폐물이라 들었기에 상당히 부끄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사는 이태리타월로 북북 때를 밀었다.
목욕을 마치곤 수분 흡수가 너무도 잘 되는 타월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이런 건 왕궁에도 없는 물건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제국의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 하인스 백작이 도대체 뭘 얼마나 더 가지고 있을지를 생각하던 카이로시아는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생각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리곤 입술을 깨물었다.
현수와 만난 지 열흘쯤 되었다. 하지만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밤을 보내야 한다. 그러면 그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태산이다.
‘만일 하룻밤 인연이면 어쩌지? 그럼 난 어떻게 되나?’
순결을 잃고도 이를 속인 채 시집가는 여자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하나 어찌 양심상 그럴 수 있겠는가!
결혼을 하면 상대와 평생을 살아야 하는데 처음부터 속이고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백작님이 날 좋아하게 만들어야 해. 그래야 나도 살고 가문도 살아!’
카이로시아는 망해가지도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잘나가는 가문까지 들먹이며 자신의 결심을 공고히 했다.
“자아! 여기 있습니다.”
로사가 내민 옷을 받아든 카이로시아는 또 한 번 놀랐다. 너무도 깨끗이 세탁되어 마치 새 옷 같았던 때문이다.
음식을 먹다 흘린 흔적이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걸 걸치던 카이로시아는 옷이 내뿜는 향기를 느끼곤 아예 할 말을 잃었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옷에서 이토록 향기로운 냄새가 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드래곤의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카이로시아는 또 한 번 자신의 결심을 굳게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오늘 밤 순결을 잃을 결심이다.
한편, 현수는 카이로시아에게 베푼 것에 흐뭇해하고 있었다. 놀라워하는 표정을 떠올리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후후! 후후후!’
“아가씨 드십니다.”
“……!”
방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카이로시아를 본 현수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아프로디테(Aphrodite)!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과 풍요와 미의 여신이다.
카이로시아는 가히 여신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눈빛, 오똑한 콧날, 그리고 선홍빛 입술.
화사한 빛깔의 드레스와 가지런히 정리된 머릿결, 그리고 그것을 잡아주는 나비 모양 머리집게는 카이로시아의 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고맙습니다, 백작님! 오늘 백작님 덕분에 굉장한 호사를 누렸어요.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카이로시아는 말없이 자신만 바라보는 현수를 향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다른 건 다해도 인사는 하지 말았어야 한다. 현수가 또 한 번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때문이다.
‘끄으응! 총각 가슴에 불을 지르네. 어휴……!’
현수는 나직한 신음을 냈다.
“오늘 곁에서 지내고 싶은데 괜찮으신지요?”
“곁에서……?”
“네. 백작님!”
카이로시아는 조신한 처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의도적인 유혹이다. 조금 전 인사를 할 때에 앞섶을 가리지 않은 것도 사실은 계획적인 것이다.
“뭐, 그러시구려. 로사, 내 방 옆에 방 비었소?”
“네, 백작님!”
“얀센, 모든 구멍을 막아주게. 무슨 말인지 알지?”
“물론입니다. 백작님.”
“로사, 미안한데 침대보 한 번 더 빨아야겠는데 괜찮겠소?”
“그럼요. 물론입니다. 후딱 빨겠습니다.”
“좋아, 그럼 부탁하네.”
“네에.”
얀센 부부가 내려간 후 카이로시아는 현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이 고마움을 뭘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고맙긴……. 별거 아니니 신경 안 써도 되오.”
“어머, 아니에요. 근데 조금 전에 구멍을 막으라 하셨는데 그건 왜 그런 거죠?”
새로운 뭔가가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아는 모양이다.
“오늘 카이로시아 양이 지낼 방을 청소하도록 시켰소.”
“아……! 그랬군요.”
카이로시아는 코리아 제국의 풍습이 조금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남녀가 밤새 같이 있는 게 아니라 볼일 다 보면 각기 다른 방에서 잠을 잔다 생각한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위해 신경 써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하여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언제고 로이어 영지를 한번 방문해 주셔요.”
“말 나온 김에 물어봅시다. 로이어 영지가 라이셔 제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쯤 있는 것이오?”
“이곳으로부터 직선거리로 약 3,000㎞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요. 제국의 수도인 코린의 서북방에 위치해 있어요. 갈비온 산맥과 헤포린 산맥 사이지요.”
“흐음! 멀구려.”
“네, 상당히 멀지요. 그래도 꼭 한번 방문해 주셔요.”
“기회가 되면 꼭 그러리다.”
“고마워요. 근데 언제쯤 주무실 건가요?”
“아마, 두어 시간은 있어야 할 거요.”
“왜죠? 밤이 깊어가는데…….”
현수는 연막탄 이야길 했다. 카이로시아는 또 탐냈다.
하나 하인스 상단의 독점 품목이라는 말에 얼른 욕심을 거뒀다. 지금은 조그만 꼬투리라도 잡혀선 안 된다.
일단 쌀이 익어 밥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러면 떼도 쓸 수 있다 생각한 것이다.
연막탄은 이번에도 탁월한 성능을 선보였다. 수많은 벌레들의 사체가 치워지고 샤프란으로 헹군 침대보가 씌워지기까지 현수는 카이로시아의 궁금증을 풀어주어야 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현수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카이로시아는 현수의 부름을 기다리다 지쳐 잠들고 말았다.
짹짹! 짹짹짹!
“아함……!”
새들 지저귀는 소리에 깬 카이로시아는 잠시 멍한 시선으로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한 것이다.
“아차……! 혹시 백작님이 부르셨을지도 모르는데. 미쳤어! 내가 미쳤어.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그냥 자버리다니. 어휴……! 이 바브탱이.”
카이로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침상에서 내려왔다.
삐이꺽 !
현수는 잠결에 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새벽부터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면 분명 코찔찔이 세실리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