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피식 웃음 지었다. 귀여운 녀석이다.
하여 안아주겠다는 뜻으로 이불을 들추고 팔을 벌렸다. 예상대로 착 안긴다. 그런데 아이치고는 조금 크다.
아무튼 말없이 품속을 파고든다. 잠결인지라 별 생각 없이 안아주었다. 그리곤 못 다한 잠을 마저 잤다. 몸을 옆으로 누이고 꼭 안은 채 잠든 것이다.
짹짹! 짹짹짹……!
“하아암! 잘 잤다. 헉……!”
기지개를 켜던 현수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이로시아가 곁에서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곤히 잠들었기에 현수가 일어난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살그머니 일어난 현수는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술은 마시지 않았다. 따라서 술김에 실수한 것은 아니다. 방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방이 맞다.
그런데 카이로시아가 어찌 이 방에 있단 말인가!
현수는 잠잘 때 갑갑한 것을 싫어한다.
하여 팬티 바람으로 잠들었다. 카이로시아 역시 얇은 잠옷 차림이다. 로사의 것을 빌린 것이다.
‘대체 뭐가 어찌 된 거지?’
“하암! 어머……! 일어나셨어요?”
“어……! 일어났소?”
“네, 덕분에 아주 잘 잤어요. 백작님도 잘 주무셨죠?”
“그, 그렇소. 그런데 어찌 카이로시아 양이 여기에……?”
“그보다 먼저 옷을 입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보기에 조금 부끄럽네요.”
“허걱……!”
현수는 얼른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팬티바람으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카이로시아는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곤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잘해야 해.”
“험험! 허허험……!”
“다 입으셨네요.”
“그, 그렇소.”
“그럼 저도 제 방으로 가서 옷 좀 갈아입을게요. 잠시 몸을 돌려주시겠어요?”
“그, 그럽시다.”
현수가 몸을 돌린 사이 카이로시아는 혹시 돌아보면 부끄럽다는 듯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어가 문을 열었다.
삐이꺽 !
“아아, 아가씨. 여기 계셨군요. 전 어디 가셨나 했습니다. 백작님도 일어나셨지요?”
로사의 음성이다.
“끄으응……!”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다.
“어머, 로사 아주머니! 백작님하고 저하고 같이 잔 거 절대 비밀이에요. 아셨죠? 쉬이잇!”
보나마나 둘째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대고 있을 것이다.
“네에, 카이로시아 아가씨! 알았어요. 호호호!”
“로사 아주머니! 약속 지킬 거죠?”
“물론입니다. 제 입술은 아주 무겁답니다. 아무튼 식사 준비 다 했으니 조금 있다가 내려오세요.”
“네에, 고맙습니다. 곧 내려갈……. 어머나, 세실리아!”
“어라……! 귀족 언니가 왜 그 방에서 나와요? 어젯밤에 하인스 기사님하고 같이 잔 거예요?”
“끄으응……!”
현수는 또 한 번 침음을 냈다.
“으응! 그게 그냥……. 세실리아, 언니가 백작님하고 같이 잔 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언니가 백작님이랑 같이 잔 거 말하지 말라구요?”
“그래, 조금 있다가 설탕 덩어리 또 줄게.”
“헤헤, 네에! 알았어요. 헤헤, 친구들한테 자랑해야지.”
우당탕탕탕……!
현수와 카이로시아, 그리고 로사는 세실리아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둘러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그 증거이다.
“제기랄……!”
현수는 곤란한 상황이 벌어져 카이로시아가 불편해질 것을 우려하여 투덜거렸다.
같은 순간 카이로시아의 생각은 다르다.
‘세실리아, 잘한다! 나가자마자 친구들한테 확 불어라. 알았지? 동네방네 다 돌아다니면서 계속해서 불어야 한다. 호호, 우리 세실리아……! 언니는 너만 믿는단다. 호호호!’
어째 뭐가 바뀌어도 단단히 바뀐 느낌이다.
카이로시아가 다시 성장을 하는 동안 현수 역시 옷을 제대로 갖춰 입었다.
똑똑!
“백작님, 카이로시아예요. 들어가도 돼요?”
“험험! 들어오시오.”
삐이꺽 !
“어머, 벌써 다 입으셨네요. 백작님, 식사 준비 다 되었대요. 내려가요.”
“허험! 그, 그럽시다.”
현수는 괜스레 미안한 기분이 들어 카이로시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때 카이로시아가 아주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운다.
현수는 팔을 빼려다가 멈췄다. 상대에게 모멸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이로시아가 입을 연다.
“백작님, 너무 심려치 마세요. 우리가 같이 자기는 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잖아요. 그쵸?”
“그, 그럼요.”
“그런데 왜 신경 써요? 우리만 떳떳하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
“저는요. 소문이 나도 상관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요? 자칫 카이로시아 양의 혼사길이 막힐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단 말이오?”
“쳇……! 그깟 시집 못 가면 그만이죠.”
카이로시아는 짐짓 초연한 척했다. 하지만 현수는 초연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얼른 반문했다.
“그만이라니요?”
“그냥 그렇다는 말이에요. 전 떳떳해요. 근데 남자 쪽에서 제 순결을 의심해서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요…….”
“하면……?”
“그런 남자랑은 결혼 안 하면 그만이에요.”
“그건 그 남자 잘못만은 아니지 않소? 세상 남자들은 모두 자신의 부인이 될 여자가 순결하길 바란단 말이오.”
“그러니까 하는 말이에요. 백작님이 알다시피 어젯밤 우린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쵸?”
“그럼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시집을 못 간다면 안 가고 말 거예요. 그냥 혼자 살면 되죠. 가끔 백작님의 품을 생각하면서…….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안겨본 남자의 품이었거든요.”
“……!”
현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제게 몽유병3)이 있나 봐요. 자고 일어나 보니 백작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어요. 근데 너무 편했어요. 이런 기분 때문에 여자들이 시집을 가려고 하나 봐요.”
“……!”
“백작님, 만일 제가 시집을 못 가게 되면 그건 백작님 책임도 조금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끔 품에 안겨서 자게 해줘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죠?”
“네에? 그, 그게 무슨…….”
“치이……! 백작님, 남자답지 못하시다. 전엔 제 가슴을 보고도 안 봤다고 발뺌하다 결국 사과하셨으면서……. 오늘 또 그러시려는 거예요?”
“그, 그게……!”
현수는 우물쭈물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백작님! 절 안고 주무시긴 했지요?”
“그, 그렇소. 그렇지만 그건…….”
“그 이유는 중요치 않아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제가 시집 못 가면 백작님께 책임이 조금은 있는 거지요? 그쵸?”
“그,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당연하죠! 아무튼 책임이 조금은 있는 거죠?”
“그, 그렇소.”
현수는 할 수 없이 대답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은 곧바로 발목 잡히는 말이었다.
“그럼 남자답게 책임지셔야죠.”
“네에? 채, 책임을……?”
“네, 책임이래 봤자 뭐 별거 아니에요. 제가 백작님 때문에 시집을 못 갔는데 남자 품이 그리워 못 견딜 때마다 품만 빌려주시면 되는 거니까요.”
“끄으응……!”
이쯤 되면 분명 농담이다. 근데 대꾸할 말이 없다. 하여 침음성을 냈다.
“치이……! 남자답지 못하게 또 그러신다. 백작님 이러시는 거 조금 비겁해요.”
“비겁……?”
“네, 그러니까 빨리 대답 안 해주시면 매일 밤마다 백작님 품이 그립다고 안아달라고 할지도 몰라요. 아셨어요?”
“아, 알았소.”
그냥 놔뒀다간 얼마나 더 진도가 나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얼른 대꾸한 것이다.
“좋아요. 그럼 약속의 증표를 주세요.”
“증표라니요?”
“약속은 했는데 나중에 나 몰라라 하면 어떻게 해요? 그러니 제가 척 보여주면 오늘 한 약속이 생각나게 하는 그런 물건 하나 달라는 거예요. 반지 같은 거 혹시 없어요? 너무 큰 물건 주시면 갖고 다니기 힘들잖아요.”
카이로시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지만 속은 아니다. 어떤 수를 쓰든 현수의 발목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수가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다. 만일 아니라고 하면 목이라도 매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나 둔감한 현수는 카이로시아의 말을 곧이곧대로만 해석했다. 지금껏 여자를 사귀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지……?”
“네, 실반지도 괜찮고, 그냥 평범한 것도 괜찮아요.”
“알았소. 잠시만…….”
현수는 아공간을 뒤졌다. 그러다 백금으로 세팅한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냈다.
사실 이게 다이아몬드인지 큐빅(Cubic)인지, 모이사나이트(Moisanite)인지 모른다.
보석에 아무런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럴 듯하고 크기도 적당한 듯 싶어 꺼낸 것이다. 짐작으로 꺼낸 반지임에도 다행히 손가락에 꼭 맞았다.
“어머……! 이건 다이아몬드네요. 알도 제법이고……. 제 마음에 쏙 들어요.”
카이로시아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에 낀 반지를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있다.
현수는 그저 약속의 증표로 준 것이지만 카이로시아는 아니다. 결혼을 약속한 예물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조금 전에 말했다.
언제든 현수의 품이 필요하다면 안아주기로……!
당장은 아니지만 오늘 밤, 아니면 내일 밤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날마다 그립다면 어쩌겠는가!
결국엔 혼인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예물의 의미로 생각한 것이다.
“참! 여기에 백작님의 이니셜을 새겨주세요. 제 것두요. 그래야 약속을 상기하기 쉽지 않겠어요?”
“알겠소. 이리 주시오.”
반지를 되돌려 받은 현수는 하인스의 첫 글자 H와 카이로시아의 첫 글자 K를 새겼다.
폭이 좁았지만 카이로시아 모르게 인라지 마법을 거니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새겨놓고 보니 왠지 허전하다.
딱 두 글자만 있으니까 심심해 보이는 것이다. 하여 문자와 문자 사이에 ♡를 그려 넣었다.
한국에선 사랑한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이곳에선 이게 무엇인지 모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자, 여기……!”
“네에. 고마워요. 어머……! 우리 이니셜 사이에 하트를 새겨주셨네요. 고마워요. 이것 덕분에 오늘 일은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거예요.”
“에엥……? 하트를 아시오?”
“그럼요. 사랑하는 부부끼리 서로 미치도록 사랑한다는 뜻으로 쓰는 상징이잖아요.”
연인도 아니고 부부란다. 현수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
“설마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를 것이라 생각하셨던 거예요?”
“그게… 코리아 제국에서도 그 뜻으로 쓰이긴 하는데…….”
현수는 엉겁결에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여우같은 카이로시아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치랴!
“어머나! 만난 지 겨우 열흘밖에 안 되었는데 백작님이 저를 마음에 두신 지는 몰랐네요. 고마워요. 백작님의 마음……!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리고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
말을 마친 카이로시아가 소중한 반지라는 뜻으로 입을 맞추고는 자신의 가슴에 안는 시늉을 한다.
“끄으응……!”
현수는 지금 카이로시아가 장난한다 생각했다.
솔직히 한국에서의 김현수는 별 볼일 없는 사내였다.
삼류 대학 수학과 출신이다.
가난한 집의 자식이고, 모아놓은 재산은 쥐뿔도 없다. 당연히 물려받을 재산도 없다.
직장은 있지만 남들보다 빠른 진급을 할 확률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잘리지만 않아도 용한 것이었다.
물론 멀린을 만나기 이전의 김현수가 이렇다.
그러고 보니 진짜 재수가 좋아 과장이 된 거다.
반면 카이로시아는 백작가의 영애이다. 거대 상단을 운영하기에 물려받을 재산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지금껏 귀족가의 여식으로 성장하면서 제대로 된 제반 교육을 받아 교양까지 넘친다.
게다가 미녀 중의 미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이다. 또한 몸매까지 남자들의 이상형이다.
이런 여자가 만난 지 열흘 만에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말을 하니 어찌 장난한다 생각하지 않겠는가!
현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잠시 반지를 매만지던 카이로시아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는다.
그리곤 장난기 하나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카이로시아 에델만 드 로이어는 오늘부터 하인스 멀린 백작님의 여인으로서 늙어 죽을 때까지 사랑할 것이며, 영원히 곁에 머물며 내조할 것입니다.”
“카, 카이로시아 양……!”
현수가 말렸지만 그럴 생각이 없는지 말을 잇는다.
“이는 대지 여신인 가이아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이니 만일 제가 이 맹세를 어기거든 저를 지옥의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내던지소서.”
“카이로시아 양! 어째서……?”
현수는 너무도 당황하였기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하나 카이로시아는 아니다. 다시 한 번 정색하며 입을 연다.
“백작님! 여자의 몸으로서 알몸에 가까운 상태로 백작님의 품에 안겨 있었던 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다른 사내와 혼인할 자격을 잃었어요. 그런데 지금껏 혼인하지 않고 평생을 살고프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답니다. 제가 싫지 않으시다면 저를 반려로 맞아주시면 안 되나요?”
“……! 카이로시아 양!”
“제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채워 넣을게요.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반드시 고칠게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백작님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