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91화 (91/1,307)

# 91

“카이로시아 양!”

“솔직히 전 아직 백작님을 잘 몰라요. 그럼에도 백작님과 한평생을 같이 하고 싶어요. 왠지 좋은 분 같아서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백작님께 끌려요. 그러니 허락해 주세요.”

“으으음……!”

현수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곤 침음을 냈다.

이곳은 아드리안 공국의 위기를 벗겨주기 위해 온 것이다.

임무만 달성되면 대한민국으로 되돌아가 천지건설의 부속품이 되어 살아야 한다 생각했다.

부모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작가의 영애인 카이로시아가 본심을 드러냈다.

남자로서 환호작약하며 기쁨의 환성을 지르고도 남을 일이다. 너무도 아름답고, 영리하며, 부자인 데다가 선한 여인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왜 안 그러겠는가!

하나 결혼을 하게 되면 아이를 갖게 된다. 아르센 대륙에 혈육관계가 성립하는 존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는……?’ 이라는 생각이 들기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대답해 달라는 것은 아니에요. 저를 가까이 두고 살피세요. 고치라는 것은 고치고, 버리라는 것은 버릴게요. 그러다 내키시면 그때 취하셔도 돼요.”

말을 마친 카이로시아는 고개를 숙였다. 여자로서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매달렸기 때문이다.

이제 결정은 하인스 백작이 하게 될 것이다.

받아들여 준다면 하늘을 날 듯한 행복감을 느끼겠지만 거절한다면 목을 매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기에 카이로시아의 표정엔 비장함이 어려 있었다.

“흐으음……! 카이로시아 양.”

“말씀하세요.”

“지금은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걸 해결하기 전까진 카이로시아 양을 부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드릴 수 없습니다.”

“왜지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을 해야 하오. 그런데 난 카이로시아 양이 미망인이 되는 걸 바라지 않소.”

“……!”

“그러니 우리의 인연은 조금 더 두고 결정하면 어떻겠소?”

“순전히 저의 입장을 생각해서 하시는 말씀이세요?”

“으음! 맞아요.”

현수가 시인한 것은 세세한 속사정까지 속속들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가 미망인이 되어도 좋다면 어찌 하시겠어요? 아니 저 과부 되어도 좋아요. 늙어 죽을 때까지 재혼 따윈 생각도 안 할게요. 저, 단 하루뿐이라 할지라도 하인스 백작님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헐……!”

현수는 대꾸할 말을 잃었다. 카이로시아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찌 이곳에서 혼인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카이로시아 양! 내게 말 못 할 비밀이 있소. 그래서 혼인을 한다 하더라도 그 생활이 남들과 같지 못할 것이오.”

9장 무기상인 드미트리

“그래도 좋아요. 하루라도 백작님과 함께하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할게요.”

‘진드기도 아니고……. 어휴! 배울 만큼 배운 여자가… 갑자기 이러는 것은 대체 뭣 때문일까?’

현수는 카이로시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백작님, 앞으로는 카이로시아 양이라 부르지 마시고 그냥 로시아라고 불러주세요.”

“로시아?”

“네, 그렇게 불러주시니 정감이 느껴져서 좋네요.”

‘어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현수는 깊이 생각하여 머리가 아프느니 차라리 되어가는 대로 놔두자고 마음먹었다.

둘은 아침식사를 위해 계단을 딛고 내려왔다. 식사하는 내내 카이로시아는 활짝 핀 장미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장래의 부군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다.

카이로시아는 열흘 정도 자리를 비운다고 했다. 이웃 영지의 영주를 만나 담판지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카이로시아가 나간 후 후춧가루와 연막탄을 꺼냈다.

얀센의 입은 귀까지 찢어졌다. 후춧가루는 병에 든 것 200개, 통에 든 것 100개이다. 1,200골드어치이다.

연막탄도 200개를 꺼내 놓았다. 이것들은 일회용이므로 서비스 차원에서 하나당 50실버만 받으라고 했다.

이것까지 합치면 모두 1,300골드가 된다.

현수는 얀센을 불러 검술 수련을 위해 며칠 산으로 들어갈 것이니 당분간 찾지 말라 하였다. 그리곤 테세린 외곽에서 다시 한 번 차원이동을 했다.

“마나여, 나를 지구로 보내다오. 트랜스퍼 디멘션!”

쉬리리리리링―!

현수의 신형이 마치 안개가 스러지듯 그렇게 사라졌다.

* * *

“성공이군! 근데 공기가 왜 이리 탁해?”

피톤치드가 풍부하다 못해 넘쳐나는 곳에 있다 오니 호흡하는 것이 불편할 지경이다.

“이번엔 아르센에 열흘밖에 못 머물렀군. 제기랄, 언제쯤 되면 마음놓고 일을 볼 수 있을까?”

마나도 풍부한 청정지역에서 마나라곤 희박하기 이를 데 없는 오염지역으로 왔기에 투덜거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월요일에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다.

“그나저나 대체 어떤 놈이 온 거지? 에이……!”

휴가를 방해받은 기분이 된 현수는 살짝 불쾌감이 들었다.

대구에서의 일은 어떻게 매듭지어지는지 궁금해서 핸드폰을 켜보니 방전되어 있다.

할 수 없이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집에 당도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샤워부터 하고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곤 날짜를 확인했다. 이번엔 계산한 대로 6월 2일이다. 이제야 팔찌 사용법을 제대로 익힌 셈이다.

권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범행에 사용된 흉기에서 고인철, 고진철 형제의 지문을 찾아냈으므로 곧 재판이 벌어질 것이라 한다.

문제는 아무리 추궁해도 자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곤 모든 죄를 고강철에게 뒤집어씌우고 있다고 한다.

하나 조만간 시인하게 될 것이라면서 웃었다.

고강철의 아이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다고 한다. 고진철이 어디에 맡겼는지 순순히 말했기 때문이다.

통화 말미엔 출국하기 전에 꼭 한번 대구에 들러달라고 했다. 약속했던 여행을 가자는 것이다.

다음엔 오광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숙희의 건강 상태는 눈에 뜨이게 좋아졌다고 한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고 한다.

조금 더 나아지면 비뇨기과에서 매독 치료를 받고, 정신과 치료도 받게 하겠다고 하여 안심하였다.

통화를 마치고 팔찌를 확인해 보았다. 예상대로 검은색이었던 마나석이 회색으로 변해 있다.

“흐음, 언제 틈이 날지 모르니 이 주변에도 결계를 칠 만한 곳이 있나 확인해 봐야겠군.”

지도로 확인해 보니 아차산은 용마산, 망우산과 이어져 있다. 그런데 마땅한 곳이 없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기 때문이다.

“인적 드문 곳 어디 없나?”

위성지도로 여기저기를 검색해 봤지만 마땅한 곳이 없다.

워낙 인구밀도가 높기에 깊은 산속이라도 마음놓을 만한 곳이 드물었던 것이다.

전방지역은 산이 많아 적당한 곳이 많다. 하지만 불을 켜면 군인들이 득달처럼 달려올 것이다.

DMZ도 고려해 보았는데 남북한 양쪽 군인들이 한꺼번에 올 것 같아 포기했다. 그리곤 한참을 고심하였다.

“결국 덕항산밖에 없는 건가?”

현수는 텔레포트 마법으로 덕항산으로 향했다. 그리곤 밤새 마나를 모았다. 현실 시간으론 약 일곱 시간이지만 안의 시간은 52일 정도이다. 그럼에도 마나석은 짙은 회색이다. 계룡산보다 마나가 희박함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 * *

“사장님! 나오셨어요?”

“아……! 이은정 씨, 좋은 아침이에요. 근데 학교 안 가요?”

“네. 교수님께서 취업했다고 수업 안 들어도 학점 준다고 하셨거든요. 근데 휴가는 잘 다녀오셨어요?”

“덕분에……. 이은정 씨는 어땠어요? 좀 쉬었어요?”

“네……? 아, 네에.”

왠지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방에 콕 박혀 있었던 모양이다.

월급을 받아 돈은 많이 있지만 아까워서 쓰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캐물을 일이 아니기에 더 묻지는 않았다.

그러다 사장실을 열어보곤 눈을 비볐다.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창마다 커튼이 달려 있고, 최고급 호텔에 들어온 양 아기자기한 소품과 꽃으로 가득하다.

“아, 이은정 씨……!”

“죄송해요, 제 마음대로 해서……. 근데 마음에 드셔요?”

“물론이에요. 너무 좋군요. 이걸 어떻게 혼자서…….”

전에는 아무렇게나 놓인 서류와 각종 샘플 등으로 인해 약간 산만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먼지 한 점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잘 정리정돈되어 있다.

업무 의욕이 절로 솟을 만한 공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아기자기한 소품과 화분들이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아, 네에.”

은정이 타온 커피는 진짜 맛이 없었다.

늘 경제적으로 어려웠기에 커피 마실 기회가 별로 없어서 커피와 프림, 그리고 설탕의 배합 비율을 모르는 것 같다.

그래도 어찌 타박하겠는가!

괜찮은 척하며 모두 마셨다.

하나 속으론 중학교 때 배운 ‘양약(良藥)은 고어구(苦於口)하나 이리어병(而利於病)하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암송했다.

그만큼 썼던 것이다.

은정은 혹시나 하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 마시는 걸 보고야 안도하는 듯하다. 쓴웃음을 지은 현수는 앞으로는 커피믹스를 쓰라는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찌나 쓴지 사약 먹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사장님, 직원들 뽑았어요. 오늘부터 출근할 거예요.”

“그래요? 잘 했네요.”

“아홉 시까지 오라고 했으니 아마 곧 올 거예요.”

“그나저나 날 찾아왔다는 그 손님은 누구지요?”

“아……! 잠시만요.”

밖으로 나갔던 이은정이 명함 하나를 건넨다. 알파벳으로 된 이름만 달랑 쓰여진 것이다.

“드미트리 알렉세이 다닐로프? 러시아 사람인가 보군요.”

“어떻게 이름만 보고도 아시는 거죠?”

“러시아 사람들의 이름은 보통 자기 이름 다음에 부칭, 그리고 성의 순서로 이루어지거든요.”

“네에, 그렇군요. 아무튼 그 사람은 40대 백인이었어요.”

“무슨 용무라 하던가요?”

“그건 저도……. 죄송합니다. 뭐라고 말은 했는데 제 영어 실력이 짧아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요? 이은정 씨, 영어 실력 괜찮잖아요.”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영어 공부 정말 열심히 했으니까요. 근데 그분이 하시는 영어는 알아듣기가…….”

“알았어요. 무슨 뜻인지.”

은정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순간 문이 열린다. 그리곤 두 여인이 들어섰다. 키가 큰 쪽은 탤런트 왕지혜를 닮았고, 작은 쪽은 시크릿 가든의 하지원을 닮았다. 사내들의 음흉한 시선이 싫다고 할 만한 늘씬한 미녀들이다.

“어, 왔어? 수진아, 지혜야. 인사드려. 우리 사장님이셔.”

“아, 안녕하세요? 김수진입니다.”

“저는 이지혜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어서 오세요. 김현수입니다. 두 분 다 굉장한 미인이네요. 앞으로 잘 해봅시다.”

“어머, 미인은 무슨……. 저희 미인 아니에요.”

“맞습니다. 사장님! 쟨 미인이 아니고 전 미인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지원 닮은 이지혜가 아주 씩씩하게 고개를 꾸벅거렸기에 현수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이은정 씨! 오늘 저녁 때 신입사원 환영회 한번 합시다.”

“네에.”

친한 친구들과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 즐거운지 은정의 입가엔 예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수진과 지혜 역시 취직된 것이 기쁘다는 표정이다.

이들 둘은 지난 며칠간 은정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기에 겉보기엔 황량하기만 한 이실리프 무역상사가 사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것을 안다.

급여는 대기업 신입사원 수준이고, 다른 회사와 달리 어음이나 수표를 사용하지 않기에 도산할 우려가 전혀 없는 최우량 기업이다. 게다가 모셔야 할 상사라곤 현수 하나뿐이다.

그런데 조만간 외국으로 나가게 된다고 들었다. 직장 생활하면서 스트레스 받을 일이라곤 하나도 없을 회사이다.

그러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게다가 오늘은 출근 첫날이라 아홉 시까지 오라고 했지만 내일부터는 탄력 근무를 해도 된다고 했다.

수습 기간이 지나면 원하는 시간에 출근하여 정해진 시간만큼만 근무하면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관공서 등을 상대로 한 업무를 볼 때엔 그들 시간에 맞춰 근무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이런 직장이 어디에 있는가!

현수는 이실리프 무역상사를 자신이 꿈꾸던 회사로 만들고 싶어 사원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려는 차원에서 탄력 근무를 허용한 것이다.

자리 배치를 하고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은정이 말하던 손님이 왔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사람이다.

눈매는 약간 날카로운 느낌이다. 처음 보는 순간 군인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나 헤어스타일을 보니 군인은 아닌 듯 싶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드미트리 알렉세이 다닐로프입니다.”

“러시아 분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영어가 편치 않으신가 봅니다.”

드미트리의 영어는 악센트가 괴상했다. 그리고 너무 빠르다.

대체 어디서 배운 영어인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은정이 알아듣기 힘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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