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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92화 (92/1,307)

# 92

“네에. 조금…….”

여기까지가 영어로 대화한 내용이다. 현수는 상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러시아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편한 언어로 대화하죠. 나는 이실리프 무역의 대표인 김현수입니다.”

“아……! 우리말을 아십니까?”

드미트리는 반색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현수의 러시아어가 너무도 유창했던 때문이다.

“조금……. 하나 의사 소통을 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현수의 말이 끝날 즈음 은정과 수진, 그리고 지혜는 멍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의 영어는 다들 알아들었다. 아주 간단한 대화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금 한 말은 영어가 아니다.

상대가 러시아 사람이라 하였으니 아마도 러시아어일 것이다. 그런데 유창해도 보통 유창한 것이 아니다.

드미트리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 느껴진 것이다.

그렇기에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러시아어를 이렇듯 잘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의 대화는 이어졌다.

“아닙니다. 상당히 유창합니다. 본토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혹시 러시아에서 유학하셨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냥 공부해 둔 겁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저를 찾아오셨는지요? 저는 드미트리 씨를 처음 뵙는데…….”

“그건… 말하자면 조금 깁니다.”

“아, 미안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현수가 드미트리를 사장실로 안내하자 은정이 따라 들어와 음료 주문을 받았다. 곧이어 드미트리의 입이 열린다.

“김현수 사장님! 콩고민주공화국에 주재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천지건설의 직원으로서 근무했습니다.”

“그럼, 마투바를 아시지요?”

러시아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싶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이야길 들어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저희 킨샤사 지부의 여직원이지요.”

이때 은정이 들어선다. 차를 가지고 온 것이다.

현수에겐 여전히 맛없는 커피를, 드미트리에겐 콜라를 주었다. 잔을 내려놓는 동안에도 드미트리의 발언은 이어졌다. 러시아어를 알아들을 여직원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김현수 사장님! 저는 탄압받는 후투족을 돕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콩고민주공화국의 현 정권은 독재정권입니다. 아시지요?”

“그런데요?”

현수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지만 독재국가라는 말이 국제적인 평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저는 온건파 후투족이 정권을 되찾도록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그러려면 김현수 사장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천지건설이 댐과 발전소 공사를 수주해서 조만간 대규모 인력 파견과 더불어 각종 장비들이 반출되지요?”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될 것이다. 콩고민주공화국엔 건설 장비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요.”

“제가 알기론 김현수님은 여전히 킨샤사 지부 직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 또한 맞지요?”

“뭐어… 아직은 그렇습니다.”

아직 발령 난 바 없으니 드미트리의 말은 맞는 말이다.

“또한 신형섭 대표이사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셨더군요.”

“그런 것도 파악이 됩니까?”

드미트리는 대답 대신 자신의 말을 이었다.

“네, 그리고 제가 알기론 휴가가 끝나면 일단 킨샤사로 가셔야 할 텐데 그때 도움을 요청하려 방문했습니다.”

“잠깐만요. 우리 회사 사정을 어찌 그리 잘 아시지요?”

현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드미트리가 웃는다.

“그건 다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으으음……!”

상대에 대해 하나도 아는 것이 없는데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을 때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살짝 불쾌해지려는 순간 드미트리가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허락없이 김현수님에 대해 알아본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는 사안의 중요성 때문이니 양해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다. 국적을 떠나 나이 많은 사람이 고개 숙여 사과하는데 어찌 화를 낼 수 있겠는가!

현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일이기에 세세한 부분까지 조사를 한 모양이라 생각한 것이다.

“좋습니다. 내게 뭘 도와달라는 겁니까?”

“천지건설에서 발송한 건설 장비 등이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들어갈 때 컨테이너 몇 개가 추가되도록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컨테이너……? 그 안엔 무기가 들어가게 되겠지요?”

“그건……. 그렇습니다. 어차피 아시게 될 일이니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게 낫겠지요. 온건파 후투족에게 제공될 무기가 반입되는 거 맞습니다.”

“소총류인가요?”

“유탄발사기와 각종 탄약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양은 얼마나 되지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스무 개 분량입니다.”

“상당히 많은 양이군요. 그렇다면 생각해 볼 문젠데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김현수님은 현재 가에탄 카구지 내무장관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잖습니까. 게다가 이번 공사에 반입될 물량은 무관세 통관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수는 어찌 알았느냐는 눈빛으로 드미트리를 쏘아보았다.

“그것도 아셨습니까?”

“저희들이 파악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내무장관 덕분에 공사를 수주했으니……. 아무튼 드미트리씨의 제안은 당장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아, 지금 당장 결정하시란 뜻은 아닙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지요.”

너무도 선선히 고려해 본다는 말을 하자 드미트리가 허리를 세우며 말을 잇는다.

“참, 말씀 안 드린 게 있습니다. 이번 건을 허락해 주시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현수는 의당 그러려니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맨입에 남의 나라 반군에게 제공될 무기를 반입해 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발각되면 가에탄 카구지와의 인연은 단번에 끊기게 될 것이고, 징역형 내지는 총살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 천지건설이 수주한 공사도 허사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많은 반대급부가 있어야 할 것이다.

“허락을 해주심과 동시에 러시아에 있는 드모비치 상사로 대규모 약품 수출 건이 성사될 겁니다.”

“드모비치 상사라 하심은……?”

“모스크바에 소재한 의약품 도매상입니다.”

“그래요?”

“협조에 대한 보답으로 저희가 생각하고 있는 거래 규모는 연간 약 6억 달러 입니다.”

이 거래가 성사되면 무역상으로서 얻는 이득은 최하 10%는 넘을 것이다. 가격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

6,000만 달러라면 600억 정도 남는다는 뜻이다.

“액수가 제법 크군요.”

“좋은 관계가 되면 거래는 계속해서 이뤄지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지요. 그전에 반입될 무기 명세서를 봤으면 좋겠습니다.”

보아하니 드미트리는 러시아 무기상인 듯하다. 다시 말해 후투족으로부터 돈을 받고 무기를 공급하는 것 같다.

이런 사람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게다가 러시아인이라면 레드 마피아와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아마도 드미트리는 KGB 출신이거나 스페츠나츠 같은 특수부대 출신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대놓고 거절하지 않았다. 자칫 보복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천지건설의 내부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 함은 정보 계통에도 촉수가 뻗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거주지나 교우 관계 등도 모두 파악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렇기에 이쪽에서도 대안을 만들 시간이 필요하기에 시간 끌기용 답변을 한 것이다.

현수 본인이야 마피아 전체와 전쟁을 치러도 될 능력이 있지만 부모님에게 해코지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전례를 깨고 제공해 드리지요. 도와주시면 그에 대한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좋은 답변을 기대하겠습니다.”

“그건 명세서를 보고 생각해 보지요.”

“네, 그러십시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멀리까지 배웅하진 않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드미트리는 악수를 하며 현수의 눈을 바라본다. 덩치가 훨씬 크기에 위축될 만도 하건만 현수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하다.

드미트리가 나가고 난 뒤 은정이 들어섰다가 멈칫하더니 그냥 나간다. 현수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흐으음, 내 신분이 노출되어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흐음, 레드 마피아라……! 하필이면…….’

현수는 히스토리 채널에서 전세계 폭력 조직에 관한 영상을 본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러시아의 레드 마피아는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면서 급속도로 성장한 폭력 조직이다.

이들은 미국이나 이탈리아 마피아와 다르다. 조직원 가운데 석박사들이 즐비하고, 엔지니어들도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마피아는 시간이 나면 볼링을 친다. 하나 러시아 마피아는 재미를 위해 체스를 둔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 두뇌가 있기에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 행위는 다른 마피아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무튼 이들도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절도와 강탈, 그리고 마약 밀매와 매춘을 한다. 뿐만 아니라 금융 사기와 무기 밀매도 서슴지 않는다.

러시아에 존재하는 기업의 80% 이상이 이들과 연계되어 있다. 심지어는 정계에도 발을 뻗어두었다.

그래서 ‘러시아에선 마피아를 끼지 않고는 사업을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무기를 취급한다.

소총과 권총은 물론이고, 대포와 미사일, 공격용 헬기와 잠수함도 다룬다. 뿐만 아니라 전투기와 핵무기까지 판매한다.

이들의 특징은 매우 잔인하고 치밀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후환을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이 된 셈이다.

‘내가 못하겠다고 하면 다음은 이 차장님이 되겠지? 아니다. 이 차장님은 내무장관과 연결이 없어 괜찮겠구나. 회사도 그렇고……. 내가 없으면 통관에 문제가 있으니까 나를 찾아온 거군. 흐음, 그럼 나만 빠지면 되는 건가?’

레드 마피아라 할지라도 아무런 기반도 없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선 힘을 쓰지 못한다.

마피아가 잔인하다곤 하지만 투치족 역시 만만치 않다. 그렇기에 무력으로 밀고 들어갈 수는 없다. 무기 조금 팔자고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와 전쟁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자신을 택한 것이라 생각한 현수는 한참 동안 상념 속에 있었다. 골치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사장님!”

“아, 이은정 씨.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뇨.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에요. 근데 움직이지도 않고 계셔서……. 아까 그 사람 때문에 그러세요?”

“아, 아닙니다. 그냥 생각할 일이 좀 있어서요.”

“그러세요? 점심식사 어떻게 하실래요?”

“신입사원들도 있고 하니 같이 먹읍시다.”

“네에.”

현수와 은정, 그리고 수진과 지혜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모두들 조신해 보인다.

“이은정 씨! 내일이나 모레쯤 이번 달 주문 내역이 들어올 거예요. 확인 후 제약사들에 주문 넣어주세요.”

“네에, 사장님!”

“김수진 씨는 서류 작업을 도와주시고, 이지혜 씨는 수량 확인과 창고 점검 등을 해주세요. 참, 아직 면허증 없죠?”

“네에.”

“잘 되었네요. 그렇담 이은정 씨가 다니는 학원에 등록해서 면허증부터 따세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전 면허증을 따시면 지금 타고 다니는 제 차를 업무용으로 내놓을 테니 그걸 이용하십시오.”

“네에, 고맙습니다.”

“친구지간이라는 걸 알지만 업무를 볼 때엔 이은정 씨가 실장이니 이은정 씨의 뜻을 따라달라고 당부 드립니다.”

“네, 당연하죠.”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현수는 탁자 위의 신문을 무심코 펼쳐 들었다. 그러다 금방 도로 접어버렸다.

제일 싫어하는 언론사의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가 이 언론사를 지극히 혐오하는 이유는 사주일가가 친일파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에는 ‘반민특위’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1948년의 일이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줄임말로 일제강점기 34년 11개월간 자행된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 설치되었던 특별기구이다.

이 기구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이란 것을 제정했다.

이 법에 의하면 국권 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 의원이 된 자와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살상 또는 박해한 자는 최고 무기징역, 최하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이밖에도 직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재산몰수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반민특위는 친일파들의 교묘한 술수에 해체되어 버렸다. 그 때문에 친일파 숙청의 호기를 놓쳐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역사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가 왜곡되었다.

친일파였던 놈들이 해방된 땅에서도 권력을 잡고 출세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수가 증오하는 이 신문사의 사주는 일제강점 시절 일제에 의한 침략 전쟁을 미화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등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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