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어제까지 다리를 절고 손도 약간 떨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그럼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해지는데……. 이따가라도 병원엘 가봐야 하나? 으으음……!’
홍 교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아침은 새벽잠이 적은 홍 교수가, 저녁은 느릿느릿한 우보 선생이 준비하는 것이 일상이기 때문이다.
“아, 교수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현수 군! 벌써 일어났는가? 근데 부엌엔 왜……?”
“네에, 제가 두 분께 북어국을 끓여 드리려구요. 술 마신 다음날 메뉴론 최고 아닙니까?”
“물론 그렇지. 근데 북어가 없을 텐데…….”
“제 차에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아, 그런가? 그럼 밥은 내가 하지.”
“아뇨. 밥도 다 되었으니 산책이나 다녀오십시오.”
“그런가? 하하, 아침 당번은 나였는데 오늘은 자네 덕에 편히 쉬는군.”
“네에.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반찬 두어 가지 더 만들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그러게. 자네 덕에 아침 산책하는 호강 한번 해보겠네.”
홍 교수는 몸을 점검해 보고 생각도 정리해 볼 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자신의 몸을 새삼스레 살폈다.
우선 다리를 절지 않는다.
게다가 걷는 데 불편함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듯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다.
주먹을 쥐어봤더니 어제완 완전히 다르다. 숨 쉬는 것도 편하고, 지긋지긋하던 편두통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마을회관으로 가봐야겠어.’
홍 교수는 평소의 산책 코스를 벗어나 마을 복판으로 향했다.
거기에 혈압을 측정하고 심박수를 측정해 주는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측정 결과 최고 혈압 117, 최저 74이다.
심박수는 57이다. 의사가 아니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분명 정상 범주에 들어간다.
이전 혈압은 146에 100이고, 심박수는 80을 넘겼었다. 그런데 젊은 시절에 볼 수 있었던 수치가 보인다.
어찌 이상하지 않겠는가!
홍 교수는 산책 대신 깊은 상념에 빠졌다.
몸에 문제가 발생되기 직전에 잠시 정상 상태를 보이는 지금 인생을 정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져든 것이다.
우보 선생이야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기에 그렇다 치고, 현수가 어제 처음 만난 홍 교수에게 치료 마법을 시전하고 회복 포션을 먹인 것엔 이유가 있다.
11장 새로운 인연
술을 마시는 동안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그중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썩고, 곪고, 더럽고, 아픈 구석에 관한 부분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우보 선생이나 홍 교수 모두 현수와 비슷한 시각으로 사회를 보고 있었다.
국가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지만 잘못된 정치와 제도, 그리고 모순된 사회적 관습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를 선도하는 지도자들만의 잘못이 아니라 구성원 전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라고 했다.
부동산 투기로 일확천금을 꿈꾸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일례로 들었다. 하여 어젯밤의 대화는 이 사회를 어찌 개선해야 하는지에 관한 토론의 장이었다.
그 이야기 도중 홍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
현수는 먹고살기 바쁜 세상을 사느라 TV를 거의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심야방송 임에도 시청률이 높은 토론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또한 방송이 나갈 때마다 사회적인 이슈가 되어 갑론을박이 벌어진다는 것도 몰랐다.
이 방송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고 그에 대한 해결책 내지는 대안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으로, ‘심야토론, 이건 아닙니다!’라는 것이다.
홍 교수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이 토론에 참여하는 단골 패널5)이다. 그렇기에 홍 교수에겐 팬클럽이 있다.
올바른 시각으로 사회를 직시하여 문제점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어찌 풀어내야 할지에 대한 의견도 내놓는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도 합리적인 대안이며 해결책이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그리고 자기 자신보다는 사회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을 지녔다면 아무도 부인 못할 최적의 방안을 내놓는 것이다.
하여 젊은 층은 물론이고 중장년층까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인기 재야 논객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의 중장년층이라 함은 올바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을 의미한다.
많은 이야길 듣는 동안 홍 교수가 양식있는 사람이며 올바른 가치관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홍 교수에겐 아내와 두 자녀가 있다.
부인은 현재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이다.
아들은 육군 병장인데 최전방이라 할 수 있는 GP6)에서 근무 중이다. 딸은 중소기업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매일 통화를 한다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50대 사내가 이러긴 사실 쉽지 않다.
배우자와 사이좋은 부부가 드문 세상이고, 자식들이 아버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집도 흔치 않기 때문이다.
현수가 홍 교수에게 호감을 품은 결정적인 이유는 딸을 소개해 주겠다고 해서가 아니다.
몸만 괜찮다면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일을 해주는 봉사가 아니다.
더럽다고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정치판에 들어가 썩어빠진 정신들을 확 고쳐주고 싶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리커버리 마법과 회복 포션을 사용한 것이다.
아무튼 홍 교수가 걱정 안 해도 될 일을 걱정하는 동안 현수는 밥상을 차렸다. 북어국과 계란말이, 그리고 얼큰한 김치찌개가 메뉴다.
두 가지는 그냥 요리했지만 김치찌개는 마법으로 만든 것이다. 제대로 된 맛을 내려면 팔팔 끓인 뒤 약한 불로 오래 끓여야 깊은 맛이 나기 때문이다.
하여 타임 패스트 마법을 구현시켰던 것이다.
“아이구! 현수 씨가 고생하셨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밥상을 받은 우보 선생의 말이다.
“고생은요……. 근데 홍 교수님이 왜 안 오시죠?”
“오겠지. 그 친구, 아침밥은 꼭 먹어야 하는 사람이거든.”
이때 홍 교수가 발을 들여놓으며 눈썹을 치켜 올린다.
“뭐야……? 둘이 내 흉을 보는 중이었어? 하하, 앞으론 자릴 비우지 말아야겠군.”
세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다. 그리곤 어제에 이어 대화를 이어갔다.
현수는 저녁까지 먹고 출발했다. 홍 교수도 그렇지만 우보 선생의 몸에서도 이상이 발견된 때문이다.
전에는 보청기를 끼우지 않으면 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다. 그런데 깜박 잊고 있었음에도 소리를 잘 듣게 된 것이다.
어제와 달라진 것이라면 현수가 왔었다는 것 하나뿐이다.
당연히 의아하다는 표정과 더불어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려달라고 한다. 이에 어찌 마법을 썼다고 하겠는가!
현수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었다. 그럼에도 불편한 마음이 들어 서둘러 출발한 것이다.
오는 내내 그간의 대화 내용을 되씹어 보았다. 그중 하나 마음에 걸리는 말이 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보여줘야 할 사람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막대한 부를 보유하고 있든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든 학문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투철한 도덕 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을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다.
현수는 지구 유일의 7써클 마스터 대마법사이다. 따라서 가진 능력을 사회를 위해 써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이 주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했다.
2013년 6월 5일 수요일 오전 8시 45분.
현수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별일 없었지요?”
“킨샤사로부터 추가 물량 발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제약사에 팩시밀리로 주문을 했습니다.”
“그래요? 양이 많던가요?”
“네, 지난번에 비해 약 1.3배 정도 되는 물량이었어요.”
“흐음, 제법 많이 팔리는 모양이군요. 알겠습니다.”
주문량이 늘었다 함은 거두는 수익이 커지는 것을 의미하기에 현수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사장실로 들어가 컴퓨터부터 켰다. 신문 대신 뉴스를 보기 위함이다. 잠시 후, 은정이 커피를 들고 들어온다.
‘크으! 또 사약이야? 내일부터는 다른 걸 달라고 해야겠네.’
내심 쓰기만 한 커피를 떠올렸지만 인상을 쓰진 않았다.
“참, 신입사원 환영회는 잘 했어요? 맛있는 거 먹었습니까?”
“아뇨. 신입사원 환영회는 못했어요.”
“어, 왜요? 뭔 일 있었어요?”
“아뇨, 뭔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사장님도 안 계시는데 저희끼리 하는 게 좀 그래서요.”
“그랬어요? 나 때문이었군요. 좋아요. 이따 퇴근 후에 어때요? 김수진 씨랑 이지혜 씨 스케줄이 어떤지 물어보세요.”
“네에. 사장님!”
은정이 나간 뒤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정치인들의 극한 대립이 헤드라인 뉴스이다. 자신의 마음대로 국정을 운영하려는 여당 대표와 이를 저지하려는 야당 대표가 드디어 멱살을 잡고 싸웠다.
“쯧쯧! 하여간 정치인들이란…….”
국민 수준은 상당히 높아졌는데 1970년대 수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며 나직이 혀를 찼다.
겉보기엔 어느 한쪽이 국민들을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정치인들은 조선시대 때 선비들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투쟁한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을 위하여 훈민정음을 만들어 반포하려 했다. 이를 제지한 것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다.
그는 여섯 가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한글 반포에 반대했다. 하나 그 속내는 백성들이 문자를 알게 되면 더 이상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수는 혀를 차며 정치면에서 벗어났다.
그러다 무심코 스포츠 기사 목록을 클릭했다.
그런데 스포츠엔 관심이 없기에 누가 홈런을 쳤는지, 누가 골을 넣었는지에 대한 기사는 모두 무시했다.
외국에 나가 있는 선수가 골을 넣은들 무엇 할 것이며, 하루에 홈런 열 방을 쳤다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선수 본인에게야 중요한 일이겠지만 현수에겐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못하는 일이다.
1980년대 초반 정권을 쥔 J모라는 전 대통령은 우민화 정책을 펼쳤다. 우민화란 국민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 Sports, Screen, Sex다.
사람들은 이것들의 첫 글자를 따서 3S정책이라고도 한다.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자신의 원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하려는 의도였다.
이런 연유로 현수는 스포츠와 영화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스포츠와 연예 관련 기사들을 모두 스킵한 것이다.
아무튼 자신이 보고 싶은 기사만 골라서 검색을 하던 중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문득 본 느낌이 있다.
하여 이전 페이지로 되돌아가 살펴보았다.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에 있던 막대한 보화를 매장했다는 기사가 있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니 1598년에 어린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여 천문학적인 금화와 금괴를 효고현 다다은동(多田銀銅) 광산의 스물한 곳 갱도 안에 매장시켰다는 것이다.
히데요시의 가신이 유서에 남긴 내용엔 매장 총량은 금화 4억 5천만 냥과 금괴 3만관이다.
현수는 당시 일본의 금화가 어떤지를 확인해 보았다.
금화 1냥은 16.55g이며 순금 함량은 약 68%이다. 계산기를 꺼내 확인해 보니 금화로 제작된 금만 5064.3톤 정도 된다.
금괴의 형태로 된 것은 112.5톤이다.
‘후와, 어마어마한 양이군. 이걸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되지? 가만, 일본 국가 예산의 600배……?’
얼른 검색해 보았다. 대한민국의 1년 예산은 309조, 일본은 850조 원이다. 이것의 600배라면 무려 51경 원이다.
세계 최고 부자라는 빌 게이츠의 재산이 56조 원이라 했을 때 그것의 9,107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합계가 5176.8톤인데 이걸 현재의 시세로 따지면…….”
어쩌면 계산기가 감당하지 못할 숫자가 나올 수도 있다 생각하면서도 계산을 해보았다.
‘흐음, 요즘 금 1g에 6만 원 정도 하니까……. 어라! 310조 6,080억 원인데? 뭐가 잘못된 거지? 기자들이 계산 실수한 건가? 아님 금 한 냥이 더 큰 건가?’
아무튼 엄청난 금액이란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문득 떠오르는 상념이 있다.
‘이거 혹시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가져간 거 아닐까?’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피폐해졌다. 많은 인원이 죽거나 다쳤고, 여자와 도공들이 무수히 끌려갔다.
도공이야 질 좋은 다완과 다기 등을 얻기 위함이다.
여자들을 끌고 간 이유는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놈들이 여자들을 끌고 가면서 한 말이 있다.
‘여자는 목욕만 하면 새것이 된다’는 것이다. 아예 사람으로 치지도 않은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조금만 가치가 있어 보이면 무작위로 가져갔다. 심지어 호랑이까지 잡아갔다. 이런 상황이니 금은보화를 약탈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