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그래, 그러마!”
“에이, 농담이었어요.”
“아냐, 오늘은 내가 낼게. 실컷 마셔보자. 자아, 우리의 찬란할 미래를 위하여!”
현수가 잔을 들자 현우와 경빈 역시 잔을 들었다.
“위하여……!”
몇 잔의 술이 돌아가자 조경빈도 대화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원래 스스럼없는 성격인 이유도 있지만 현수와 현우가 워낙 편하게 해줬기 때문이다.
“형님,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 있는 경빈이에게 아주 심각한 고민이 있어요. 들어보고 조언 좀 해줘요.”
“그래? 뭔지 말해봐.”
“네, 경빈이는 국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우의 말이 이어졌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백두그룹 회장 조연호에겐 아들이 둘 있다. 조경빈은 장남에게서 얻은 셋째 손자이다.
경빈은 고등학교 시절에 공부를 등한시한 결과 대입에 실패하였다. 다른 재벌가 같으면 뒷구멍으로 힘을 써서라도 일류대학에 입학을 시켰을 것이다.
하나 6.25 때 월남하여 자수성가한 조연호 회장은 불의와의 타협을 혐오하는 성품이다.
그래서 미국으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곳에 머물면서 경영학을 전공하는 동안 경빈은 너무도 외로웠다. 워낙 내성적인 성품이라 사람 사귀기에 서툴기 때문이다.
친구 하나 없는 유학 생활이 어찌 만만하겠는가!
그러던 차에 유진기라는 놈이 접근했다.
백두그룹 산하 기업에 기계 부품을 납품하는 중소기업 사장의 둘째 아들이라고 했다.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후 향락의 나날이 이어졌다.
유진기는 술과 여자를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조장했다. 그러다가 결국 마약에 손을 대고 말았다.
코카인, 메스암페타민(필로폰) 등이다.
다행히 미국 경찰과는 별 문제 없이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후 정신을 차린 경빈은 마약을 끊기 위한 노력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진기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경영권을 물려받게 될 백두마트에 취직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경빈은 현재 후계자 수업을 받느라 백두마트 상무이사로 재직 중이다. 그렇기에 어려움없이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다.
다시 며칠이 지난 후, 또 다른 취직 부탁을 했다. 그렇게 하여 약 50여 명을 입사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감사팀이 제출한 보고서를 보게 되었다.
누군가의 인사 청탁으로 취직된 사내들의 적합하지 못한 행동이 기업 이미지에 심각한 누를 끼친다는 내용이다.
확인해 보니 모두 자신이 취직시켰던 인물들이다. 하여 유진기에게 전화하여 주의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마침 전화 잘했다면서 또 다른 취직 부탁을 한다.
기분이 좋지 못했던 경빈은 더 이상의 청은 들어줄 수 없으며, 기존에 입사된 사람들의 행동이 고쳐지지 않으면 모두 해고당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경빈의 단호한 음성에 잠시 뜸을 뜰이던 유진기는 그러고 싶으면 그러라 하였다. 그리곤 경찰에 연락하여 마약에 대한 제보를 하겠다고 했다.
당황한 경빈은 시간을 달라고 했다. 웬일인지 순순히 기다리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인터넷을 뒤져 확인해 보니 마약을 복용하면 사람에 따라 반감기가 다르다고 되어 있다.
소변의 경우는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마약 성분이 검출되지 않는다. 머리카락은 6개월 정도가 걸려야 한다고 되어 있다.
심한 경우엔 8∼9년까지도 간다고 되어 있다.
하여 이발소에 들러 머리카락을 박박 밀어버렸다. 혹시 몰라 면도까지 부탁하여 완벽한 대머리가 되었다.
다음 날, 취직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는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유진기가 나직한 웃음소리를 냈다.
“너 머리 깎았지? 미국에 있는 동안 내 취미가 뭐였는지 알아? 난 네 머리카락 수집이 취미였다. 내가 괜히 네 방 청소해 준다고 했겠냐? 날짜별로 최소 열 가닥 이상씩 잘 수집해 놓았다. 이걸 검찰에 보내면 어떻게 될까?”
“……!”
경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유학 시절 유진기가 거의 매일 청소를 해줬다. 그게 경영권을 승계 받으면 잘 봐달라는 뜻인 걸로만 알았다.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경빈은 수세에 몰렸다. 유진기는 며칠에 한 번씩 전화하여 취직을 강요했다.
그 결과 백두마트 전점의 보안요원들이 물갈이되었다.
전국 132개 점포에 취직된 숫자가 무려 2,500여 명이다.
뿐만이 아니다. 계산대에 투입되는 캐시어도 2,000명 이상 물갈이되었다.
은밀히 확인해 보니 유진기는 역삼동 유흥가를 무대로 폭력을 휘두르던 세정파의 일원이다.
세정파란 이름은 ‘세상을 정복한다’라는 말의 첫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세정파의 두목은 유진기의 부친인 유국상이다. 유진기는 후계자이면서 두뇌 역할을 맡고 있다.
경빈은 겁이 덜컥 났다.
할아버지인 조연호 회장이 사실을 알게 되면 즉각 검찰에 신고하여 쇠고랑을 차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깐깐한 조 회장이다.
좋은 예가 있다. 경빈의 사촌 가운데 하나는 재벌가의 가족이라는 배경을 이용하여 많은 여자들을 농락했다.
그 녀석이 건드렸던 여자 가운데 하나가 자택에서 출근하려던 조 회장의 차 안에 쪽지를 써서 넣었다.
사실을 확인한 조 회장은 그를 백두그룹에서 철저히 배격시켰다. 모든 직위는 해제되었으며 살던 집에서도 쫓겨났다.
은밀히 그를 돕던 작은 어머니는 시아버지인 조 회장에게 불려가 단단히 혼이 났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현재 어느 세차장에서 남의 차를 닦아주며 산다고 한다.
이렇기에 경빈이 겁을 먹은 것이다.
재벌가의 손자로 살면서 온갖 혜택을 다 받으며 살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없어지면 어찌 살까 싶은 것이다.
아무튼 사실이 알려지면 백두마트의 차기 경영권은 자연스럽게 물거품이 된다. 그리고 그 자리는 앙숙인 사촌동생에게 물려질 것이다.
경빈은 있지도 않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 되어 날마다 폭음하며 괴로워했다.
그러던 중 이현우가 제대를 했다.
마음놓고 대화할 사람이 생겼기에 거의 날마다 불러내어 고민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런데 현우라 하여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마약 복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워낙 좋지 않기 때문에 자수하라는 말도 못했다. 그 결과가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길 들은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두마트 같은 대기업 계열사에 왜 조폭 같은 놈들이 있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형님, 저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요? 오늘 아침에도 전화가 왔었어요. 근데 이번엔 기획실 실장 자릴 달래요.”
“기획실 실장?”
“네. 아무래도 백두마트를 통째로 말아먹으려는 것 같아요.”
“흐음, 조폭들이 음지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방법도 있었군.”
“……!”
조경빈은 아무 말도 못했다. 자신의 실수이기 때문이다.
“놈이 가졌다는 네 머리카락을 회수하는 것이 급선무야. 그것만 회수하면 취직했던 놈들 자르는 건 문제도 아니니까.”
“그것도 쉽지 않아요. 놈들 모두 노조에 가입해 있는 상태예요. 게다가 현 노조 집행부 전부가 놈들이에요.”
“노조까지……?”
“네에. 할아버지가 아시면……. 저 이제 어떻게 하죠?”
“흐으음, 일단 고민 좀 해보자.”
아직 사회적 경험이 일천한 둘이기에 현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뾰족한 수를 내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회사 사람들과 상의하지 못한 것은 재계에 소문이 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장가가는 것조차 어려워질 수 있다.
“일단 유진기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 알아야 하니까 입사시켜. 다만 기획실 실장은 회장님의 재가가 있어야 하니까 아직은 안 된다고 하고.”
“그러면요?”
“내일 당장 출근하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지? 그럼 내가 놈의 뒤를 쫓을게. 그렇게 해서 놈의 거처를 알아내면…….”
“그러면요?”
경빈이 애가 탄다는 표정을 짓자 피식 웃음 지었다.
“나하고 현우, 이렇게 둘이서 놈의 수집품을 가져오는 거지.”
“네에……? 현우하고 도둑질을 하겠다고요?”
“그 머리카락 원래 네 것이잖아. 그걸 가져오는 게 도둑질이 되는 건가?”
“그, 그야……! 근데 현우는 빼주시면 안 되나요?”
“왜……? 그래, 알았어. 그럼 나 혼자 하면 되지.”
“근데 형님!”
“왜?”
“왜 저를 위해 위험한 일을 하려 하세요? 전 형님과 잘 아는 사이 아니잖아요, 게다가 놈들은 조폭이구요.”
“너, 현우랑 친구하고 했지?”
“네, 유치원 때부터 친구였어요. 정말 둘도 없는 친구지요.”
“그 현우가 내겐 아우다. 그럼 너도 아우잖아. 안 그래?”
“……! 형님, 고맙습니다.”
“에구, 앞으론 님 자는 빼라. 조폭 두목이 된 거 같다. 조직원들이 시원치 않아서 그렇지.”
“네에……? 하하, 네에. 그렇게 할게요.”
“현우, 너도. 그리고 존댓말 쓰지 마. 좀 멀게 느껴지잖아. 그러니 진짜 형 대하듯 그렇게 해라.”
“알았어, 형!”
“그래, 좋다. 자아, 이제부턴 만사를 잊고 술을 마시자.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위하여!”
현수가 경빈을 도울 마음을 품은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백두마트 세 개 점포에서 9,000톤에 가까운 물품들을 가져온 것에 대한 미안함이다. 이제와 다시 돌려줄 수도 없다.
이전 뉴스를 검색한 결과 재산상 손실보다 전세계적인 홍보 효과가 더 많아서 손해는 아니라고 한다.
하나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여 돕겠다는 마음을 품은 것이다.
둘째는 유진기라는 놈의 교활함에 치가 떨려서이다.
간악한 방법으로 한 인간을 협박하여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놈은 결코 그냥 둬서는 안 될 일이다.
게다가 조폭이라 하지 않는가!
세상에서 반드시 말살시켜야 할 종자이다. 그렇기에 이 일에 관여할 생각을 한 것이다.
아무튼 현수가 자신의 룸으로 되돌아온 시간은 새벽 한 시쯤이다. 문을 열어보니 셋 다 잠들어 있다.
“에구……! 이 아가씨들아. 이런 데서 이렇게 잠들면 어떻게 해?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데…….”
나직이 혀를 찬 현수는 어찌할까 생각해 보았다. 한꺼번에 셋을 업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구, 또 마법을 써야겠군. 마나여, 이들의 신체를 활성화시켜라. 바디 리프레쉬!”
샤라라라라랑―!
마나가 스며들었음에도 일어나지 않는다.
“끄응, 모두 깨어나라, 어웨이크!”
“아함!”
“끄으응!”
“흐아아아암!”
셋이 하품을 하며 일어나는데 머리 꼴이 엉망이다.
“자, 아가씨들! 이제 집에 갑시다.”
“어머! 지금 몇 시예요?”
“새벽 한 시를 조금 넘겼어요.”
“우왕……! 큰일이다. 전 이제 아빠한테 죽었어요.”
수진이 가방 속의 핸드폰을 꺼내더니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부재중 전화가 20여 통이고, 문자도 여러 개 와 있다.
지혜도 핸드폰을 확인했다.
“헉……! 울 엄마 완전 뿔났나 보네.”
“자, 갑시다. 대리운전 불렀으니까 집에 데려다 줄게요.”
“고맙습니다, 사장님!”
가장 먼저 이지혜의 집 앞에 도착했다.
어머니가 집 밖에서 서성이고 있던 중이다.
현수는 얼른 내려서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하나 지혜의 모친은 현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뭐해! 어서 안 들어오고. 너 이놈의 기집애, 오늘 어디 한번 혼나봐라. 다 큰 기집애가 지금 몇시 니? 응? 몇 시냐고?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데……? 어서 들어와. 아, 빨랑 안 들어와?”
쿵―!
대문 닫치는 소리를 들으며 쓸쓸히 돌아서야 했다.
다음은 김수진의 집이다.
벨을 누르자 아버지가 튀어나오셨다. 그리곤 다짜고짜 지금이 몇 시냐면서 화를 냈다.
현수는 앞으로 주의하겠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은정의 모친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워낙 큰 은혜를 입었다 생각하기에 그런 모양이다.
우미내 마을까지 오니 새벽 세 시가 넘었다.
다음 날 아침, 조경빈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얘기했던 대로 유진기를 입사시켰다는 내용이다.
오후 12시 10분.
점심 먹으러 나가는 유진기의 얼굴을 확인했다.
날카로운 눈매, 얇은 입술, 그리고 슬쩍 휘어진 매부리코를 가진 얼굴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결코 선량해 보이지 않는다.
건들거리며 걷는 걸음걸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세상이 돈짝만 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조경빈이 너무 외로웠거나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는 뜻이다.
퇴근 시간을 확인한 현수는 사무실로 향했다.
“사장님! 어제 정말 죄송했어요.”
“면목이 없습니다. 저 때문에 아버지에게 욕을 먹으셔서…….”
“어머니가 사장님인 줄 몰랐다고 하셔요.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근데 속은 좀 어때요? 어제 과음들 했던데.”
“죄송합니다. 사장님!”
“이제 술 안 마실게요.”
여직원들은 죄 지은 범인 마냥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살다보면 누구나 실수할 때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니 깨끗이 잊읍시다. 알았죠?”
“네에……!”
“이 실장님! 보고 사항 있어요?”
“특별한 일 없습니다. 수출 업무는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구요. 납품도 정상적이에요. 지시 시항 있으세요?”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럼 나가서 일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