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국물이 끓을 때까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것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수정이 현수와 시선을 맞춘다.
“전 스물다섯인데 김현수 씨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스물아홉이에요.”
“어머나! 전 저하고 동갑 쯤되는 줄 알았는데……. 그럼 오빠라고 부를게요. 그래도 되죠?”
성장과정이 어땠는지 알 수는 없지만 거침이 없다. 하나 결코 무례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속내를 당당하게 밝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제대로 된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듯싶다.
“뭐, 편한 대로 하세요.”
“아이, 저보다 오빠신데 왜 존댓말을 써요? 그냥 반말 하셔도 되요. 그리고 앞으론 제게 이수정 씨라고 하지 말고 그냥 수정아 그러셔도 돼요. 헤헷, 오빠니까 특별히 그렇게 해도 되게 해드릴게요.”
현수는 문득 이 여자가 어떻게 항공사 면접시험을 통과했는지 짐작이 갔다.
친화력이 대단하다. 처음 만났지만 무엇을 말하든 다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한다. 미모와 애교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환장할 것 같은 눈빛 때문이다.
깊고 그윽하면서도 신비한 빛을 내뿜는다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눈빛을 겪은 바 있다. 아르센 대륙에서 만난 카이로시아의 눈빛도 이랬다.
현수는 그제야 자신이 왜 이수정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어머, 벌써 끓어요. 헤헷, 맛있겠다. 그쵸? 오빠도 드세요.”
국자를 들고 앞접시에 건더기와 국물을 담은 수정은 그걸 현수에게 먼저 건넸다.
“배 고프다면서요? 먼저…….”
“치잇! 오빠, 제가 조금 전에 그랬죠? 존댓말 쓰지 말고, 그냥 수정아라고 부르라고……. 근데 지금 제게 존댓말 쓰셨고, 이수정 씨라는 말을 쓰려 했어요. 그쵸?”
“……?”
“그러니까 왠지 멀게 느껴지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대해요. 으음, 애인은 아직 아니고… 그쵸? 하긴 오늘 처음 만났으니까요. 그럼 그냥 친한 동생 대하듯 하세요. 알았죠?”
“……!”
“뭐해요? 수정이 팔 떨어지겠어요. 어서요. 팔 아프단 말이에요. 글구 저도 배고프거든요? 오빠가 얼른 이걸 받아야 저도 먹죠. 그쵸?”
“응……? 아, 그, 그래!”
방금 전 활달하면서도 매력적인 아가씨에게서 뿜어지는 기분 좋은 아우라를 느꼈다.
현수는 수정의 재촉에 미망에서 깨어나며 말을 더듬었다.
“헤헷! 성공이다. 오빠가 드디어 반말 한 거예요. 그쵸?”
처음 보는 남자로부터 반말을 들었다며 기분 좋아하는 수정을 바라본 현수는 잠시 아찔함을 느꼈다. 상대를 기분 좋게 해주는 눈부신 미모와 환한 웃음 때문이다.
‘헐……! 내가 왜 이러지?’
현수는 의아했다. 강연희, 권지현, 카이로시아 같은 미녀들과 있을 때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던 때문이다.
‘이거야 원……! 완전히 마녀에 홀린 기분이네. 참, 마녀는 아니군. 저 정도면 천사지.’
현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먹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밥을 뜨면 그 위에 반찬을 올려준다. 그리곤 빤히 바라보고 있다. 어서 먹고 무슨 맛인지 알려달라는 표정이다. 그러니 어찌 마음 편히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심리적 곤욕을 치르면서 밥을 먹었지만 맛만큼은 일품이었다. 식사를 마친 둘은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커피가 나오는 동안 침묵하던 수정이 정색하며 입을 연다.
“오빠, 오늘 제가 너무 들이대서 당황하셨죠?”
“응……? 뭐, 조금은…….”
“그랬을 거예요. 저도 오늘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를 정도였거든요. 미안해요.”
“아, 아니야. 미안할 것까지는 없지.”
“오늘 처음 만났는데 제가 생각해 봐도 너무 심할 정도로 들이댔어요. 근데 제가 왜 그랬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랬어?”
“네에. 제가 오빠를 너무 좋아하게 돼서 그런가 봐요.”
“그, 그래?”
“이상해요. 이런 적 정말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근데 이상하게 오빠하고 있으니까 뭔가를 주체할 수가 없어요. 마음속에만 담아둬야 할 말들이 그냥 막 나와서 너무 부끄러웠어요.”
“……!”
현수는 대꾸없이 수정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아기 피부처럼 매끄럽고 보드라운 얼굴에 이목구비가 정확히 제자리에 위치해 있다. 반짝이는 눈빛은 곤혹스럽다는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듯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마음 좀 편하게 해줄까?”
“……?”
“손 줘봐.”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정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민다. 마주 앉은 채 두 손을 잡은 현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마나 디텍션!’
수정은 뭔가를 느끼려 바르르 떨리는 현수의 속눈썹을 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현수의 마나가 수정의 몸 전체를 휘감아돌았다.
매우 건강한 듯 막히거나 움직임이 이상한 곳 하나 없다. 다만 소화기 계통이 전체적으로 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을 떠 외모와 체격을 살피니 생각대로 소음인이다.
다시 눈을 감고 확인해 보니 비장은 약하지만 신장은 좋다. 소화기는 약한 대신 배설 기능이 강한 체질인 것이다.
사상 체질에서 소음인은 소극적, 내성적이며, 유순하고 침착하다고 평가되어 있다. 또한 자기 의견을 잘 표현하지 못하며 추진력이 약한 편이라 되어 있다.
그런데 수정은 오늘 매우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침착하지 않고 덜렁댔다.
자신의 체질과는 정반대 성향을 보여준 것이다.
현수는 그 원인을 찾으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화기를 제외한 신체의 모든 기관이 완전한 정상이다.
‘남은 건 정신적인 문제인가?’
현수가 고심하려는 순간 수정의 몸이 움찔거린다. 전화가 온 것이다. 손을 놔주니 얼른 전화를 받는다.
“네, 엄마! 네에……? 네. 네. 네. 알았어요. 금방 들어갈게요.”
표정을 보아하니 기분 좋은 일은 아닌 듯싶다.
“오빠, 집에 일이 생겨서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들어가야지.”
“네에, 죄송해요. 제가 전화 드려도 되죠?”
“그럼, 언제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정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곤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간다.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긴박한 상황인 듯싶다. 하나 현수는 오지랖을 넓히지 않을 생각이다.
하여 남은 커피를 모두 마시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아! 사장님. 오셨어요?”
현수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업무를 보던 이은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네. 특별한 일은 없었죠?”
“콩고민주공화국의 이춘만 사장님께서 연락 달라는 것 외에는 없었어요.”
“급한 일이래요?”
“그건 말씀 안 하셔서 잘 모르겠어요.”
“알았어요.”
사장실로 들어간 현수는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콩고민주공화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전화 연결이 되지 않는다.
“이거야 원! 위성통신 시스템을 갖추던지 해야지.”
나직이 중얼거리고는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확인해 보니 돈이 많이 든다.
“에구, 당분간은 팩스로 처리해야겠군.”
말을 마친 현수는 문서 작성을 시작했다.
이춘만 차장은 하루에 한 번은 곰베에 마련한 천지건설의 킨샤사 사무실을 들른다. 이곳은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기에 다른 지역에 비해 전화 사정도 좋고, 인터넷도 비교적 괜찮은 상태라 하였다.
이제부턴 긴밀한 연락체계를 갖춰야 하므로 인터넷을 활용하자는 내용의 문서였다.
팩시밀리로 내용을 전송하고는 커피 한 잔을 청해서 마셨다.
역시 사약이다. 하여 앞으론 커피믹스를 쓰라는 말을 하려 했다. 그런데 은정이 선수를 친다.
“사장님, 제가 타드리는 커피 맛없다는 거 알아요. 근데 조금만 더 기회를 주세요. 금방 배울게요.”
“……!”
현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당부하는데 어찌 안 된다 할 수 있겠는가!
은정이 나간 후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하여 꺼낸 것은 유진기의 금고에서 복사해 온 장부와 비망록이다.
하나하나 꺼내서 내용을 소상히 살피던 현수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담긴 내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역삼동에 소재한 세정파는 단란주점 열한 군데와 나이트클럽 여섯 곳, 그리고 열세 개의 모텔을 운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약, 인신매매, 고리대금업, 매매춘, 장물취급, 무기밀매 등 그야말로 어둠과 관계된 거의 모든 일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얻은 재물은 백두마트에 재직 중인 조직원 및 그 가족의 개인통장을 통해 세탁되었다. 그 과정에서 조직원 및 그 가족의 벌이 가운데 일부가 상납되었다.
매달 적지 않은 돈이 차곡차곡 쌓였기에 어마어마한 액수가 되었다. 확인해 보니 1,300억 원이 넘는 거액이다.
이 돈은 케이먼 제도 등 사법기관의 손이 미치기 힘든 외국의 은행에 예치되어 있다.
거래 내역을 보니 야마구치구미는 물론이고 현수가 혼내주고 왔던 스미요시카이 등 야쿠자 조직과도 연관이 있다.
지나의 삼합회와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장부엔 거래 및 접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으며, 어떤 대화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메모되어 있다. 또한 거래를 하며 오간 물품의 종류와 수량, 그리고 가격 또한 기록되어 있다.
뿐만이 아니다. 부산에 진출해 있던 러시아 마피아와도 거래를 한다. 권총 등을 몰래 반입하여 밀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상세한 기록으로 남겨져 있었다.
국내의 정재계 인사들과 접촉한 것 역시 표기되어 있다.
룸살롱을 갔으면 언제, 어디에 있는, 어떤 곳을 갔으며, 들어간 시각과 나온 시각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카드로 결제한 전표 등이 첨부되어 있다.
또한 그 자리에 참석한 인사들의 면면이 찍힌 사진들도 있다. 호스티스의 얼굴까지 모두 나와 있는 사진이다.
이름들을 일일이 꼽아보니 299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무려 120여 명과 접촉을 했다.
뿐만 아니라 사법부는 물론이고, 경찰청, 국세청, 그리고 외무부 등 거의 모든 행정기관의 고위직이 망라되어 있었다.
딱 하나 빠진 곳이 있는데 그곳은 국방부이다. 조폭과 거의 관련이 없는 조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조경빈에게 그러했듯 여의치 않을 경우 협박용 자료로 수집해 놓은 듯 아주 소상한 것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장부 등을 읽던 현수의 뇌리로 문득 스치는 것이 있다. 유진기의 집에 잠입했을 때 누군가와 통화하던 내용이 그것이다.
“흐음, 닷새 후 누군가를 뭘 어쩐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새벽에 뭘 한다고 했었는데…….”
현수는 기억을 더듬었다.
마법사가 된 이후 비약적으로 기억력이 좋아졌기에 이내 그때의 통화 내용을 상세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들은 통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4장 한류스타 납치사건
“그래, 그러니까 조금 더 기다리라는 거야? 근데 내가 왜 기다려야 하는데?”
“그년 스케줄 때문에 그렇습니다, 형님!”
“좋아, 언제까지인지 시한을 정해.”
“형님, 늦어도 닷새만 기다려 주십시오.”
“좋아, 기다려 주지. 단, 계집애 몸에 손을 대면 알지?”
“어이구, 형님! 저희가 어찌……. 걱정 마십시오. 깨끗한 상태로 데려가겠습니다.”
“좋아, 그건 그렇고 이번 물건은 언제 들어와?”
“네, 4일 후 새벽 3시 반입니다.”
“도착지가 안면도 앞 공해상이라고 했지?”
“네, 형님!”
“차질없이 물건 넘겨받아라.”
“걱정 마십시오, 형님!”
“그리고 그건 어떻게 되었지?”
“그거라니요……? 아,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엔 몇 명이라고?”
“우리가 넘겨받는 건 35명이고, 넘겨주는 건 42명입니다.”
“흐음, 안면도 앞바다에서 뭘 한 건 이미 진행된 일인 듯싶구나. 오늘 어떤 여자를 납치하는가 본데. 누구지? 스케줄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일반인은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린 현수가 시계를 보았다.
오후 6시 30분!
유진기가 퇴근했을 시각이다. 현수는 얼른 사무실을 나와 차를 몰고 그의 집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댔다.
누군가를 납치해서 데려온다면 집으로 올 확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 플라이!”
투명 은신 마법과 비행 마법을 동시에 구현시킨 현수는 아주 간단히 방범체계를 무너뜨리고 유진기의 집으로 이동했다.
그러고 보니 마당에 도베르만 핀쳐 네 마리가 있다.
사납기로 이름난 개다. 하나 허공을 날아가는 현수는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듯 배를 깔고 엎어져 있다.
“언락!”
현수는 이층 서재 창가에 당도하여 잠긴 창문을 열었다.
딸깍! 삐이꺽―!
별로 사용하지 않았는지 경첩에서 소리가 났다. 안에 들어선 현수는 창문을 다시 닫았다. 그리곤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2층엔 아무도 없다.
이 집 주인인 유국상과 보디가드 겸 부하인 놈들은 없다. 아직 귀가하지 않은 듯하다.
와이드 센스 마법으로 확인해 보니 1층엔 유진기와 세 여자뿐이다. 집 밖엔 네 명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살그머니 아래층으로 내려온 현수는 인디케이터를 확인했다. 모두 초록불이 들어와 있다. 금고를 열면 그것에 해당되는 전구가 붉은 빛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