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미안해요. 그땐 이수연 씨가 너무 울어서……. 솔직히 제가 텔레비전을 거의 안 봐요. 그래서 연예인들 가운데 일부의 이름만 알뿐 그쪽에 대해선 젬병이거든요. 사과할게요.”
“치이……!”
이수연은 짐짓 삐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수연 씨는 알아요. 텔레비전을 켤 때마다 봤던 거 같거든요. 이제부터라도 음반 사서 들어볼게요.”
“정말이에요?”
“그럼요. 이수연 씨가 내놓은 음반 전부 사서 다 들어볼게요. 틀림없이 ‘날 사랑해 줘요’만큼 좋은 노래가 많이 있을 거예요. 그쵸?”
“……!”
수연은 현수의 표정을 보고 자신을 놀리려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여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알았어요. 꼭 그렇게 하셔야 해요. 나중에 확인할 거예요.”
“확인까지요?”
“네, 오늘만 만나고 안 만날 거 아니잖아요, 우리. 내일이나 모레, 오빠 시간 있을 때 저녁식사 해요.”
“바쁘지 않아요?”
“아무리 바빠도 생명의 은인과 밥 먹는 게 더 중요해요. 그러니 내일이나 모레 시간 비워줘요. 그럴 거죠?”
“난 아무 때나 되니까 이수연 씨 스케줄에 맞추죠.”
“좋아요. 전화번호 알려줘요. 그리고 밥 먹으러 나올 때 제가 음반 드릴 테니 사지 말구요. 사인해서 드릴게요.”
“우와아, 그럼 저야 좋죠. 하하하!”
운전대를 잡은 현수가 환한 웃음을 짓자 이수연도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어떻게 절 구하게 된 거예요?”
“아, 그거요?”
현수는 잠깐 말을 끊었다. 그리곤 생각을 정리했다.
길을 잃어 헤매다가 우연히 스타크래프트 밴을 보게 되었고, 거기서 자루를 꺼내는 것을 보았다는 것부터 시작했다.
자루가 움직였기에 틀림없는 납치 사건이라 생각해서 뒤를 쫓았고, 놈들을 제압했다고 말해주었다.
“오빠, 싸움 잘하나 봐요. 어떻게 혼자서 다섯 명을…….”
“하하, 제가 한 싸움 합니다. 특수부대 출신이거든요.”
“아! 그래요?”
수연이 새삼스럽다는 듯 현수를 바라보았다.
동료 연예인들보다는 잘생기지 못했지만 듬직하고 남자답다는 느낌을 받았다.
밤 12시경, 둘은 청담동 안무연습장 앞에 당도하였다. 예상대로 경찰과 기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소속사에서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하긴 톱스타가 의문의 실종을 당했다. 그러니 경찰도 신경 쓰고, 언론에서도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당연하다.
현수는 중간에 내려주고 싶었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하나 그럴 수 없었다. 비키니나 다름없는 옷만 걸치고 있는데 어찌 길바닥에 내려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냥 내려줄 경우 문제가 발생된다.
왜 사라졌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궁색하기 때문이다.
옷이라도 제대로 입은 상태였다면 바람 쐬러 나갔다 왔다는 말로 때울 수 있다.
그런데 거의 비키니 차림으로 어찌 바람을 쐰다는 말인가!
결국 현수가 데리고 나갔다 온 것으로 말을 맞췄다. 그리고 등산 바지와 자켓, 등산화를 꺼내주었다.
수연이 어디서 났느냐고 묻기에 어머니께 드리려고 산 것이라 하였다.
같이 갔다 온 산은 강화도 마니산이라 하기로 했다. 현수의 차가 여러 CCTV에 찍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의 차가 안무연습장이 있는 건물의 주차창으로 접근하자 기자들이 일제히 달려들며 뭐라 떠든다.
와글와글! 와글와글!
현수는 아무런 대꾸 없이 차를 세웠다. 문이 열리자 여기저기서 묻는다.
“두 분 무슨 사이입니까?”
“어디 갔다 오는 겁니까?”
“왜 소속사에 알리지 않고 사라진 겁니까?”
“언제부터 만나는 사이입니까?”
현수와 수연은 피식 웃음 지었다. ‘까’라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을까 예상을 했다.
현수는 100번, 수연은 200번 이상이었다. 그런데 그 기록이 불과 5분도 안 되는 사이에 깨졌기 때문이다.
수연은 답변없이 안무연습장으로 들어갔다. 그러기로 한 때문이다. 현수는 기자들이 들이미는 마이크 앞에 섰다.
그 순간 누군가 묻는다.
“이수연 씨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저는 이수연 씨 언니의 남자친구입니다.”
“두 분은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둘이 아니라 셋입니다. 언니도 같이 있었으니까요.”
“왜 말없이 사라졌던 겁니까?”
“물어보니 오랜만의 외출인데 말하면 못 가게 할까 싶어 그랬답니다.”
“본인은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까?”
“그냥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정말 이수연 씨의 연인이 아닌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수연 씨 언니의 남자친구입니다.”
“오늘 일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십시오.”
“연예인이라도 가끔은 바람도 쐴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들어보니 스케줄이 너무 빡빡하더군요.”
“본인의 성함을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그건 곤란합니다. 제 사생활이 있으니까요. 그럼 이만!”
현수가 차에 올라타자 기자들이 사방을 에워쌌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라는 말이 있다.
태산이 떠나갈 듯이 요동하게 하더니 뛰어나온 것이 고작 쥐 한 마리뿐이라는 뜻이다. 이는 예고만 떠들썩하고 실제 그 결과는 보잘 것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오늘의 사건이 그러하다.
톱스타 이수연의 실종은 빅 뉴스 중에서도 빅 뉴스이다.
하여 기자들은 다음날 보도될 기사의 제호를 구상하고, 어찌 기사를 쓸 것인지, 무엇을 더 조사할 것인지를 생각해 뒀었다.
그런데 언니의 남친과 더불어 바람을 쐬고 왔다니 어찌 허탈하지 않겠는가!
하여 조금이라도 더 캐물어 기사거리를 만들려 달려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동을 걸고 조금씩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경찰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그리곤 운전석에 다가와 창문을 내리라는 수신호를 했다.
창문을 내리자 경례부터 한다.
“안녕하십니까? 경남경찰서 수사과 이현준 경위입니다.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실종신고가 접수된 사건입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선생님의 진술이 필요합니다. 안에 들어가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경찰서까지 가주시겠습니까?”
현수는 벌떼 같이 달려드는 기자들을 보았다.
“경찰서로 가죠. 강남경찰서로 가면 됩니까?”
“네, 저와 동행하시죠.”
“그럼 타십시오.”
이현준 경위가 올라타자 다른 경찰들이 기자들을 밀어냈다.
“후와, 정말 대단하군요.”
“기자들이니까요.”
대답을 한 이 경위는 차 안을 슬쩍 살펴보았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되었지만 현수는 운전에만 집중했다.
“이수연 씨의 언니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오다가 내려줬어요. 화곡동 살거든요.”
“……!”
현수는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알기에 먼저 입을 열었다.
“이수연 씨의 언니는 A항공사 승무원이에요. 오늘 일본에서 오는 비행기에서 근무했구요. 내려서 저하고 밥 먹었습니다. 그리고 준비하는 동안 제가 가서 이수연 씨를 데리고 왔습니다. 셋이서 강화도 마니산에 가서 놀다 왔습니다. 언니는 피곤하다고 해서 화곡동에 내려준 겁니다.”
“감사합니다. 먼저 말씀해 주셔서. 근데 성함이……?”
“김현수입니다. 천지건설 과장으로 재직 중이구요.”
“아! 젊은 분이 승진이 꽤 빠르시군요.”
이 경위는 이제 겨우 25세 정도 된 현수의 직급이 상당히 높음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 보니 남들보다 승진이 빨랐습니다.”
“네에, 그랬군요.”
이 경위는 천지그룹 계열사 가운데 하나인 천지물류 사장의 성씨가 김 씨라는 것을 상기했다. 김택연은 회장의 사위로 그에겐 25세쯤 된 아들이 하나 있다.
이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차가 강남경찰서 주차장에 접어들자 이 경위가 입을 열었다.
“오는 동안 말씀해 주신 것을 제가 기록하겠습니다. 사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네, 그러죠.”
수사과 사무실로 들어서자 이 경위가 능숙한 솜씨로 조서를 꾸몄다. 그러는 동안 현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찰서 내부 구경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자아, 여기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
내용을 읽어보니 했던 말을 간결하게 정리해 놓았기에 사인을 마쳤다.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 올라타니 전화가 진동을 한다.
이수정이 건 전화이다.
6장 많이 좋아해요. 그래도 되죠?
“아, 수정 씨?”
“네, 저예요, 오빠!”
“다 끝났어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고마워요. 아빠가 한 번 보자고 하셔요.”
“뭐 별일도 아닌데요. 괜찮습니다.”
아까 현수와 둘이 있을 때 수정이 급히 귀가한 것은 수연의 실종 소식이 전해졌었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사라졌다는데 어찌 사내와 노닥거리고 있을 수 있겠는가!
집에 도착해서도 발을 동동 구르며 사라진 수연을 찾지 못해 안달을 했다. 그러다 전화를 받은 것이다.
둘은 납치사건을 둘만 아는 비밀로 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수와 수연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이인지라 말의 앞뒤를 맞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쁜 놈들에게 납치되어 가던 중 구했다는 말을 했다.
집에선 당연히 깜짝 놀랐을 것이다. 강화에서 청담동에 이르는 동안 통화를 하여 사건의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물론 많은 부분이 각색되었다. 야쿠자에게 강간당할 뻔했었다는 이야길 어찌 부모님에게 할 수 있겠는가!
현수가 우연히 주변에 있다가 도움을 주어 간신히 위기에서 탈출한 것으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언론을 어찌 상대할 것인지도 모두 입을 맞췄다. 소속사에도 똑같은 이야길 했다.
전화를 끊고 집으로 향하던 현수는 또 한 번 전화를 받았다.
“현수 씨!”
“지현 씨군요. 웬일이세요, 이 시간에…….”
“어찌 된 일이에요? 현수 씨 여자친구 있었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진짜 여자친구예요?”
“……!”
현수는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그렇다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지현이 검찰청에 근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씀하시기 곤란하면 안 하셔도 되요. 그리고 고마워요.”
“네? 뭐가요?”
“최 경사님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어요. 이번에도 의사들이 놀라더군요.”
“아, 그래요? 그거 다행입니다.”
“대체 현수 씬 어떤 사람이에요?”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의사들이 손도 못 대던 환자를 불과 며칠 만에 이처럼 호전시켜 놓으니 말이에요. 우리 할아버지도 그렇구, 오대준 씨도 그렇구요. 진짜 도사인 거예요?”
“하하, 그건 비밀입니다.”
현수는 부러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 쇄신용이다. 그런데 권지현은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는 모양이다. 여전히 차분한 음성으로 이야기한다.
“현수 씨!”
“왜요?”
“…저, 현수 씨 많이 좋아해요. 그래도 되죠?”
“……!”
현수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어 잠시 침묵했다.
권지현은 오늘 만난 이수정, 수연 자매와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미모의 소유자이다.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착하고, 일류대학 출신이고 행정고시마저 합격한 재원이다.
모든 사내가 바라마지 않는 그야말로 최고등급 신부감이다. 하지만 현수의 마음 깊숙한 곳엔 화인처럼 자리한 강연희 대리가 있다. 그렇기에 쉽사리 대답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현수 씬 절 안 좋아하셔도 돼요. 하지만 전 현수 씰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거예요.”
“으음……!”
현수로부터 만족할 만한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마음에 품고 있던 이야긴 다 했다는 듯 약간 풀어진 음성이다.
“이제 밤이 늦었네요. 저 내일 아침에 일찍 출근해야 돼서 이만 끊을게요. 오늘 밤 좋은 꿈 꾸세요.”
“네에.”
“그럼 이만……!”
전화가 끊긴 후로도 한참 동안 현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마음속에 짐이 생긴 느낌 때문이다.
집으로 향하던 현수가 핸들을 꺾었다.
아까 언론사 카메라들이 차의 번호판을 찍었다. 그렇다면 집 앞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차를 돌린 것이다. 잠시 후,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계룡산으로 가려는 것이다.
결계를 치고 들어가 마나를 모았다. 그리곤 팔찌의 마나석이 새까만 윤기를 내자 아르센 대륙으로 떠났다.
왠지 골치 아파진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마나여, 나를 아르센 대륙으로 보내다오.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릉―!
* * *
“흐으음, 이 맑은 공기! 그런데 여긴 아직 봄이군.”
도착 즉시 심호흡을 한 현수는 맑고 깨끗한 공기 덕에 폐부까지 청량해지는 느낌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날짜 지정을 안 하고 그냥 왔네. 쩝……! 지구에 있었던 날짜가 14일이니까 오늘은 4월 14일이겠군.”
손가락을 꼽아 날짜를 확인한 현수는 코찔찔이 세실리아 여관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자신의 신분이 월급쟁이 김현수가 아니라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백작임을 자각시켰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여인의 형상이 있었다. 물론 자신의 아내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카이로시아이다.
‘카이로시아는 돌아왔을까?’
여관에 발을 들여놓자 얀센이 반색하며 인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