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나머지 셋은 정강이를 채였고, 포르트3)로 관자놀이를 가격당했으며, 주먹으로 턱을 강타당했다.
“이봐, 크린스! 이제 자네가 나서야 할 것 같은데?”
현수의 도발에 기사 크린스가 검을 뽑았다. 하나 표정은 조금 전과 다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깔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지금은 지극히 신중한 표정이다.
자신도 병사들 여섯은 거뜬히 상대한다. 여섯이 아니라 서른여섯이라도 끄떡없다. 하나 현수처럼 한 번에 여섯이 나가 떨어지게 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게다가 방금 전 현수는 악독한 수법을 쓰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모두 죽일 수 있었지만 반격 못할 정도로만 가격했다. 많이 봐줬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신중한 표정으로 검을 고쳐 잡은 것이다.
“좋은 자세이네. 하나 내가 자네의 왼쪽 허벅지를 노리면 곤란해질 것 같은데?”
크린스는 움찔거렸다. 소드 마스터이자 왕궁의 근위기사단장도 똑같은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이는 크린스가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드는 기수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크린스는 대답 대신 검에 마나를 주입했다. 시퍼런 오러가 검 전체를 감싼다. 그런데 두께도 얇고 불안정하다.
소드 익스퍼트 초급 수준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오러를 둘렀으나 현수의 검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없다.
“먼저 들어오게.”
한 손으로 까딱까딱거린 것이 불쾌했는지 크린스의 검이 파공음을 내며 쇄도했다.
“야아압!”
쐐에에에엑―!
“야압!”
현수의 검이 크린스의 그것과 접촉하려는 바로 그때 순간적으로 시퍼런 오러가 발생되었다가 사라졌다.
챙강! 땡그랑!
“헉……!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단 일 합 만에 중간에서 싹둑 베어져 버린 자신의 검을 보고 크린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오러를 두른 검이 평범한 검에 베어졌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수는 겨눴던 검을 거뒀다.
“크린스! 자네의 검엔 정교함이 없네. 정중동(靜中動)도 없었고, 중중경(重中輕)은 물론이고 경중중(輕中重)도 없었지. 스승이 없었나?”
“네? 그게 무슨……?”
크린스는 자신이 경어를 쓰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저 무식하게 휘두른다고 경지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네. 검을 휘두름에 있어 고요 속에 움직임이 담겨 있어야 하며, 가벼움 속엔 무거움이, 무거움 속엔 가벼움이 있어야 하지. 방금 자네의 검은 그런 게 하나도 없었네. 그럼에도 오러를 만들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 것이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 주십시오.”
크린스는 초급에서 중급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오랜 열망이 있다. 하나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지 몰라 날마다 무식하게 검만 휘둘렀다.
그런데 오늘 뭔가 알 듯 말 듯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렇기에 무작정 매달린 것이다.
“지금은 내가 시간이 없네. 일단 영주님께 기별을 넣어주게.”
“네, 무슨 기별이요?”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백작이 만남을 청한다고 전해주게.”
“지, 진짜 백작님이셨습니까?”
“그렇네. 그러니 어서 전해주게. 몹시 바쁜 일이 있네.”
“아,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크린스는 병사들을 시켜도 되지만 본인이 안으로 달려갔다. 그런 그의 뇌리엔 조금 전 현수가 해줬던 몇 마디 말로 그득하다. 뭔가 실마리가 잡힐 듯 잡힐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오……! 하인스 백작님. 오랜만입니다.”
“네, 그간 안녕하셨지요? 오랜만에 뵙는군요.”
“하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듭시다. 아내도 로잘린도 백작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모두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구, 괜히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은 아닌지요?”
“아닙니다. 자, 안으로 드십시오.”
2층 로비까지 나와 있던 로니안 자작이 접견실로 안내했다.
클린스 기사는 평범한 복장을 한 현수가 진짜 백작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이제야 제정신이 된 것이다. 하나 이내 멍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정중동, 중중경, 경중중!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무식하게 검만 휘둘렀다고? 정교함이 없다고……?”
머릿속 가득한 상념에 크린스는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계속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자작부인!”
“네, 백작님도 안녕하시지요?”
“로잘린 영애, 오랜만입니다.”
“네, 백작님!”
로잘린이 치맛자락을 잡고 슬쩍 무릎을 굽혔다 편다. 우아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누구의 아내가 될지 모르지만 장차 현숙한 부인이 될 것이 분명하다.
현수와 자작 일가는 한참이나 하하호호하며 이런저런 이야길 주고받았다.
로잘린이 다시 받은 후춧가루와 연막탄을 팔기 시작한 지 이틀째 되던 날 왕궁 시종 레이몬드 자작이 당도했다.
그런데 그는 염소수염에 염소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라 그 흉내가 몹시 웃겼다.
세실리아 자작부인은 자지러지게 웃느라 눈물까지 보였다.
일전에 로니안 자작은 자신이 매입한 후춧가루 가운데 일부를 왕실에 진상했다. 이를 사용해 보고 국왕은 물론이고 왕비들과 왕자, 그리고 공주들까지 칭찬이 자자했다.
하여 더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왕실 마법사의 도움을 얻어 텔레포트해서 온 것이다.
로잘린이 장사를 시작한 첫날 로니안 자작이 연막탄 50개를 구입했다. 다음날에 레이몬드 자작이 와서 싹쓸이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흘째 되던 날 이웃 영지에서 의전차 방문한 칼루센 백작이 연막탄 50개를 구매한 것은 로잘린이 이를 감춰둔 때문이다.
장사를 시작만 하면 몽땅 팔려 나가기에 일부러 남겼다. 다시 말해 장사하는 재미를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날 칼루센 백작이 방문했다.
후춧가루가 있으면 몽땅 내놓으라는데 왕궁에서 전부 구매해 갔다고 하니 입맛만 다셨다. 그 모습에 미안하여 감춰두었던 연막탄들을 꺼내놓았던 것이다.
결국 로잘린과 얀센은 딱 3일 만에 다시 백수가 된 것이다.
“참, 후춧가루와 연막탄 판매대금을 깜박 잊고 있었네. 하인스 백작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에구, 천천히 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계산은 확실히 해야 하는 법. 잠시 기다려 주시오.”
로니안 자작이 밖으로 나가자 셋은 멀뚱멀뚱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참, 로잘린 영애의 월급을 아직 못 드렸군요.”
“네, 저 월급 밀렸어요.”
뭘 줄지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다.
‘흐음, 뭐를 준다? 지난번에 도끼빗과 거울, 그리고 머리집게를 주었는데…….’
현수는 로잘린에게 줄 것이 마땅치 않아 잠시 고심했다. 그러던 중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로잘린 영애는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온 오드리 헵번과 용모가 비슷하다. 그렇기에 그 영화에 나왔던 티아라4)와 목걸이 세트를 떠올린 것이다.
가죽 배낭 속 아공간을 뒤지며 이미지를 떠올리니 두 개의 상자가 손에 잡힌다. 매대 위에 올려놓았던 진열품인 듯싶다.
7장 풍운의 유카리안 영지
“흐음, 이 달치 월급으론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뭔데요, 백작님? 어머, 이건……!”
붉은 벨벳에 싸인 납작한 상자를 받은 로잘린은 탄성을 냈다. 너무도 부드러운 촉감 때문이다. 하나 모친인 세실리아 자작부인은 내용물에 더 관심이 많은 듯하다.
“얘야, 어서 상자를 열어보렴.”
“네, 어머니!”
공손히 대답하며 상자를 열었다. 그와 동시에 모녀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로도 크게 떠졌다.
화려함의 극치라는 말이 어울릴 티아라 때문이다.
“이것도 드리지요.”
이번 것은 푸른색 벨벳으로 싸인 납작한 상자이다.
서둘러 케이스를 연 모녀는 또 한 번 눈을 크게 떴다.
솜씨 좋은 장인의 상징인 드워프조차 만들 수 없을 것처럼 정교한 목걸이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귀족 부인으로 살면서 수많은 연회에 참석했던 세실리아 자작부인이지만 이렇듯 화려하고, 기품있으며, 우아한 목걸이는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입을 크게 벌렸다.
슬쩍 가격표를 보니 티아라는 3만 7천원, 목걸이는 5만 5천원이라 되어 있다. 그렇다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것이 큐빅 내지는 모이사나이트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모녀는 둘을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로니안 자작이 들어선다.
“하하, 이거 꽤 무겁군요.”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슨 말씀을……. 제가 백작님께 도움이 된다니 기쁠 뿐입니다. 근데 로잘린, 그거 어디서 났니?”
“백작님이 이번 달 월급으로 주셨어요.”
“월급으로 그걸……? 백작님,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매우 귀한 물건인 것 같은데…….”
로니안은 분수에 넘치는 물건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로잘린 영애가 장사를 잘한 것에 대한 자그마한 보답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참, 자작부인!”
“네, 백작님!”
세실리아가 가다렸다는 듯 반색한다.
“전에 드렸던 그것 다 쓰셨지요?”
“아……! 그, 그거요? 죄송합니다. 아껴서 쓰라고 하셨는데 제가 그만……. 죄송합니다. 주름이 좀 많았거든요.”
눈가의 주름을 없애준다는 이자녹스 링클 디클라인 엠엑스 280은 30㎖짜리이다. 워낙 용량이 적기에 다 쓴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몹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도움을 청하러 왔기에 현수는 똑같은 것 네 개를 꺼냈다.
“하하, 아닙니다. 워낙 용량이 적었던 거지요. 이걸 더 드리겠습니다.”
세실리아 자작부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오오! 이렇게 고마울 데가……! 고맙습니다. 백작님!”
세실리아 자작부인은 로잘린이 가진 티아라와 목걸이가 더 이상 탐나지 않았다. 보물이라도 얻은 듯 아주 환한 얼굴이다.
그런데 얼굴 피부가 약간 거칠어보인다. 건성인 듯하다. 하여 건성 피부에 좋을 보습 로션을 생각해 보았다.
뭔가 손에 닿아 꺼내놓고 보니 이니스프리 그린티 퓨어 로션이다. 용량을 살펴보니 160㎖짜리이다.
세실리아 자작부인은 아직 현수의 손에 들려 있는 연두색 용기에 담긴 어떤 것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눈빛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얼굴에 바르는 건데 저녁 때 세안 후 한 번만 발라보십시오. 얼굴에 습기가 보전되는 효능이 있는 겁니다.”
현수는 자연스럽게 뚜껑 여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부인, 지금 세안하시고 한 번 발라보십시오.”
“네에. 고맙습니다.”
세실리아 자작부인이 황급히 자리를 비우자 로잘린 역시 궁금했는지 뒤를 따라간다.
“이거, 백작님이 본가에 너무 많은 걸 베풀어주십니다.”
“하하,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전 자작부인과 영애가 기뻐하는 모습이 좋아서 드린 겁니다.”
“하하, 그래요? 감사합니다. 참,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네, 자작님과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흐음, 말씀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로니안 자작이 자세를 바로 했다. 뭔지 매우 중요한 이야기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자작님, 이웃에 있는 유카리안 영지의 영주이신 데니스 백작과의 친분 관계는 어떠신지요?”
“데니스 백작과의 친분 관계요?”
로니안은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 상했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이웃에 있으니 대대로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유카리안 영지와는 왕래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그전에 제가 하나 더 여쭙겠습니다. 유카리안 영지는 이곳 테세린의 바로 곁에 있는데 왜 왕래가 없는 겁니까?”
로니안 자작은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데니스 백작 덕분에 제가 영주가 되서 그렇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찌 왕래가 없는지…….”
현수가 말끝을 흐렸다. 로니안 자작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십 년 전, 테세린은 유카리안 영지와 영지전을 벌였습니다. 그때 아버님이 돌아가셨지요.”
“아……!”
현수는 반문할 수 없었다. 데니스 백작이 아버지를 죽인 철천지원수라는 뜻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테세린의 절반이 사라졌습니다.”
“……!”
“데니스 백작이 차지하고 있는 비옥한 곡창지대가 원래는 우리 테세린의 것이었지요. 그걸 빼앗겼습니다.”
비교적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지만 로니안 자작의 눈에는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
“으으음……!”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삼켰다. 그리곤 로니안 자작과 시선을 맞췄다.
“복수는 하셨습니까?”
“아직은……. 지금 우리는 힘을 기르는 중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야 말 것입니다.”
현수는 마음 편해짐을 느꼈다.
“자작님, 유카리안 영지로 갈 일이 생겼습니다.”
“……?”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그곳에 억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레나 상단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까?”
현수는 대답 대신 어찌 알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데니스 백작의 일거수일투족은 제 이목하에 있습니다.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쯤은 은밀히 빼돌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