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13화 (113/1,307)

# 113

로니안 자작이 데니스 백작의 손아귀에서 누군가를 구해준다면 그곳에 심어둔 간세 조직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호의를 베풀려는 것은 그간 아내와 딸에게 준 것이 과분하다 생각되기 때문이다.

현수는 카이로시아의 이름을 댈까 하다 말았다.

책임감있는 그녀가 자신 혼자만 안전하다고 좋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레나 상단 사람 전체를 구하고자 합니다.”

“실례지만 이레나와 어떤 관계인지 물어도 될까요?”

“큰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로니안 자작은 뭔가 있지만 밝히긴 어렵다는 현수의 속내를 읽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현수가 왜 방문했는지를 파악한 것이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놈들의 이목을 끌어주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흐으음……!”

로니안 자작은 장고에 들어갔다.

현수의 요청을 들어주기 위해선 기사와 병사들이 출동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영지의 전력만으론 이목을 끌기 힘들 것이다. 백작이 자작보다 더 많은 기사와 병사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수를 위해 기르던 힘까지 동원해야 한다.

그걸 알게 되면 데니스 백작은 경각심을 갖고 대비를 할 것이다. 그러면 복수가 요원해지기에 고심하는 것이다.

“반드시 구해야 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현수는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의지만 보여준 것이다.

“알겠습니다. 놈들의 이목을 끌어보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자작님!”

“백작님께 중요한 사람들이니 구해줘야겠지요. 그리고 외국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이곳 테세린에 근거지를 두었습니다. 거래세를 걷는 영주인 제가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현수는 정중히 고개 숙여 사의를 표했다. 그 직후 세실리아 자작부인과 로잘린 영애가 되돌아왔다.

“여보, 여보! 이것 봐요, 이것 봐!”

세실리아 부인을 본 로니안 자작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린다. 조금 전의 심각한 표정은 사라졌다. 부인을 너무도 사랑하는 남편의 모습이 된 것이다.

현수는 로니안 자작 일가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영주성을 나섰다. 그렇게 세실리아 여관으로 향할 때였다.

“백작님! 헉헉! 백작님!”

“자네는 크린스 기사가 아닌가?”

“네, 백작님! 죄송합니다만 하나만 여쭙고 싶어서 따라왔습니다. 저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흐음, 그러지. 뭐가 궁금한 건가?”

“정중동! 그게 뭡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는 말입니다. 제발 알려주십시오.”

크린스는 정중히 고개 숙여가며 물었다.

“따라서 걷게. 가는 동안 설명해 주지.”

“감사합니다. 백작님!”

현수는 나란히 걷기 시작한 크린스에게 자신의 지식을 나눠주었다.

“정(靜)이란 고요함, 맑음, 깨끗함, 휴식이란 뜻이 있네. 동(動)은 움직임, 떨림, 느낌, 변함이라는 뜻이 있는 말이지. 정중동이라 함은 깨끗한 마음속의 욕심, 맑음 속에서의 혼탁함, 또는 쉬는 듯 보이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임이란 말로 해석되지. 검법에 있어 정중동이라 함은…….”

설명을 듣는 크린스는 행여 한 글자라도 놓칠까 싶다는 듯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현수는 내친 김에 본인이 깨달은 검법의 묘리까지 이야기해 줬다.

“하여, 패검이라 함은 상대의 힘까지 이용하여야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며, 둔검은……. 쾌검은……. 중검은…….”

설명을 듣는 동안 크린스는 깨닫는 바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아울러 자신이 알지 못하던 경지에 대한 설명에 경외감을 띤 눈빛으로 현수를 바라보기도 했다.

“자아, 오늘은 여기까지……. 나중에 시간이 나면 더 가르쳐 주지. 호위해 줘서 고맙네.”

“아이고, 무슨 말씀을……! 감사합니다. 백작님! 백작님의 가르침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크린스의 허리는 90。 이상 굽혀졌다.

크린스 기사가 돌아간 후 현수는 적당한 곳을 찾아 결계를 치곤 마나심법을 운용하였다. 그리곤 운기조식까지 했다.

다음엔 알고 있는 마법들을 모두 점검했다.

특히 공격 마법에 집중했다. 방어 마법은 전능의 팔찌에 새겨져 있는 앱솔루트 배리어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 아무런 방어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토 리차지 마법으로 마나석이 완충되도록 하였다.

앱솔루트 배리어를 열 번 이상 구현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만 구현되면 물리적 공격이든 마법 공격이든 모두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나 현수는 잊지 않았다. 자신이 이실리프 마탑의 마법사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법은 최악의 경우에만 사용해야 한다.

그러려면 무력이 우선이다. 현재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있으니 검에 오러를 입히고 검기를 뿜어낼 능력이 있다. 이를 자유자재로 내고 거두는 것을 연습한 것이다.

“이제 오십니까?”

“그래, 준비는 되었나?”

“네에. 그런데 용병은 여덟밖에 못 구했습니다.”

“등급은?”

“B급 세 명, C급 다섯입니다.”

“그 정도면 되었네.”

고개를 끄덕이던 현수가 얀센은 바라보았다.

“한데 자네, 검법을 익혔는가?”

“호신할 정도는 익혔습니다. 소드 유저 정도의 실력이지요.”

“흐음, 그렇다면 자넨 길목까지만 안내하게.”

“아이고, 아닙니다. 소인이 끝까지 모셔야지요.”

“자넨 하인스 상단의 본점 서기이네. 그리고 이제 곧 태어날 아기의 아버지가 아닌가? 그러니 시키는 대로 하게.”

현수의 말에 조심스런 눈길로 바라만 보고 있던 로사가 고맙다는 뜻을 표했다. 활달하던 세실리아도 어쩌면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르는 길을 떠난다는 것을 아는지 조용했다.

하나 얀센은 고집이 셌다.

“백작님! 그렇게는 못합니다.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자네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있음을 왜 모르는가? 정히 따라오려거든 소드 익스퍼트 초급 이상이 되게.”

“네에?”

소드 익스퍼트라면 오러를 발현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이다.

그 정도면 어딜 가도 기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수준을 요구했기에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길목까지만 안내하게. 자넨 가장이네. 일도 중요하지만 가족을 남겨놓고 먼저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안 그래? 로사가 과부되길 원하고, 세실리아가 애비 없이 자라길 원하나?”

“그, 그야……!”

얀센은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주인을 모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수의 영향을 받았기에 이 정도 생각을 하는 것이다.

“잔소리 말고 안내나 하게.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네, 백작님!”

일행이 출발한 것은 새벽이슬로 바짓단이 축축해지는 이른 아침이다. 얀센이 동행한 곳은 영지의 경계 역할을 하는 야호니 강에 걸린 다리까지였다.

“이 다리를 건너시면 유카리안 영지입니다.”

“오늘 중으로 이곳에 로니안 자작의 병사들이 오게 될 것이네. 만일을 대비하여 인근에 마차 서너 대를 준비해 놓게.”

“마차요?”

“그렇네. 부상자가 발생될 수도 있으니 긴급조치를 취할 붕대 같은 것도 준비해 놓고.”

“네, 알겠습니다.”

* * *

“멈춰라! 무슨 용무로 오는 것이냐?”

병사의 말에 사두마차의 마부가 말을 세웠다.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백작님께서 유카리안의 영주 데니스 백작님을 만나고자 오셨으니 기별을 넣어주시오.”

“코리아 제국? 하인스 백작님?”

병사가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때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리곤 화려한 예복을 걸친 현수가 내려섰다.

“……!”

잠시 머뭇거리던 병사는 현수의 예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치와 향락을 좋아하는 데니스 백작조차 입어보지 못할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장중한 예복이었기 때문이다.

“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병사가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가자 현수가 뒤따르던 일곱 명의 호위에게 일렀다.

“내가 지시하기 전까지는 절대 병기를 뽑지 말게.”

“네, 백작님!”

마부를 제외한 전원이 기사 복색을 갖춘 이들은 테세린 영지에서 고용한 용병들이다.

현수 일행은 말없이 기다렸다. 이곳까지 오는데 닷새가 걸렸다. 말과 마차를 이용했기에 망정이지 걸었다면 족히 아흐레는 걸릴 먼 길이다.

로니안 자작의 말처럼 한참 동안 곡창지대가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몇몇 마을을 지나쳤다. 그런데 그곳에서 본 것은 현수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른들은 잘 먹지 못해 비쩍 말라 버짐까지 피어 있었다. 아이들도 비쩍 말랐는데 배만 튀어나와 있었다.

단백질 결핍증인 콰시오커5)라는 병에 걸린 것이다.

생활공간의 위생이라곤 눈을 뜨고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찌 인간이 이토록 지저분한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유카리안의 영주 데니스 백작은 평민과 농노, 그리고 노예를 착취의 대상으로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수 일행이 지날 때면 마른 땅이든 진창이든 가리지 않고 무조건 엎어져 고개를 조아렸다.

누군지 모르지만 말 타고 다니는 사람만 보면 극도의 공포심을 느끼도록 조장한 결과이다.

“백작님, 마차 안에서 기다리시지요.”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기에 용병의 우두머리인 토마스가 한 말이다. 이에 현수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땐 이름도 이상한 제국의 백작이 애송이처럼 보여서 맞먹으려 했다. 귀족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복장도 그렇고, 말하는 투도 평민 같았다.

그래서 첫 번째 야영을 하던 날 현수는 용병들의 실력을 점검하겠다고 나섰다.

그 결과 여덟 명의 합공을 손쉽게 물리쳤으며 모두 제압했다.

그리곤 각자의 문제점을 지적해 줬다. 뿐만 아니라 그를 해결할 방안도 모색해 주었다.

그날 이후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검술 지도가 시작되었다.

용병들로서는 돈을 내고 배우려 해도 배울 수 없는 검술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것도 대강 대강 배우는 게 아니라 일일이 자세 교정까지 해주는 일대일 과외였다. 그 결과 겨우 닷새지만 용병들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를 축구선수에 비유하자면 뻥 축구만 하던 선수들이 머리를 쓰면서 공간 점유 축구를 하게 된 것과 비슷하다.

그렇기에 현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주군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는 기사처럼 진심으로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괜찮네. 토마스!”

“언제 나올지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 걱정 말게. 다리 아프면 자네나 쉬게.”

“아이고, 어떻게 그런 말씀을……!”

토마스의 대답이 이어지려는데 조금 전의 병사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헉헉, 안으로 드십시오. 백작님!”

“수고했네.”

일행이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시종 복장을 한 이가 있다.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멀린 백작님! 어서 오십시오. 이곳부터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지.”

시종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니 백성들이 살던 곳과는 완전히 다르다. 냄새도 나지 않고, 지저분한 물건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마법사가 있어 청결 마법으로 유지시키는 모양이다.

토마스를 비롯한 용병들은 영주인 데니스 백작 일가가 기거하는 내성 입구에서 제지를 당했다.

현수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꽤 넓고 긴 복도였지만 두툼한 양탄자가 빈틈없이 깔려 있었다.

벽에는 각종 장식물들이 걸려 있었고, 벽에는 조명을 위한 마법등이 달려 있다. 하나에 아무리 적게 줘도 5골드는 나가는 마법등이 200개 이상 보였다.

‘사람들은 굶주리는데 저는 아주 편하게 사는 모양이군.’

결코 좋은 인상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기에 현수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멈춘 곳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문 앞이다. 그곳엔 흰 장갑을 낀 늙은 시종이 의전용 스태프를 들고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쿵― 쿵― 쿵―!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멀린 백작님 드십니다.”

“뫼시거라!”

끼이이익―!

“하하하, 어서 오십시오. 하인스 백작님!”

두 팔을 벌리고 마치 친한 친구 맞이하듯 다가오는 사내는 쉰 살쯤 된 몹시 뚱뚱한 체구였다.

걸치고 있는 의복은 금실과 은실로 수를 놓아 화려하다. 그런데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처럼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장미를 든 여신의 형상을 수놓았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데니스 알만 드 유카리안 백작님!”

“하하, 네에. 자아, 이쪽으로……!”

짐짓 호탕한 미소를 짓는 백작의 안내에 따라 푹신해 보이는 소파에 앉았다.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한데 코리아 제국은 어디에 있는 국가입니까?”

“바다 멀리 있지요. 상당히 오랜 시간 항해를 해야 하는 곳입니다.”

“아, 그렇군요. 한데 백작님의 풀 네임은 무엇인지요?”

“제 소개가 조금 늦었습니다. 저는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멀린 드 셰울입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