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아, 셰울 영지의 영주시군요.”
“그렇습니다.”
이들에겐 서울이라는 발음이 어렵기에 셰울이라 고쳐 부른 것이다.
“셰울 영지엔 영지민들이 얼마나 되는지요?”
유카리안 백작은 테세린으로부터 곡창지대에 거주하던 농노까지 얻었다. 하여 영지민의 수가 이전에 비해 세 배 정도 된다. 그 결과 현재 인원이 약 19만 8천 명이다.
다른 영지에 비해 상당히 많은 인원이다.
그렇기에 타 영주를 만나면 늘 영지민의 수를 자랑하곤 했다. 영지민의 수가 거둬 들이는 세금과 직결되기에 스스로 부자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다.
하여 오늘도 짐짓 물어본 것이다.
한편, 현수는 서울을 자신의 영지라 하였다. 영지가 없는 백작은 없다고 이야기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흐음, 제가 떠나올 때엔 영지민의 수가 1,046만 4천여 명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보다 더 많아겼겠지요.”
이 인원은 2011년 7월 31일 현재의 서울 인구수이다.
“네에……?”
데니스 백작의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염장까지 지른다.
“사실은 그보다 더 많아서 일부를 다른 영지로 이주시켜서 그렇습니다.”
현수는 서울의 인구 집중을 제어하기 위한 위성도시 분산정책을 에둘러 이야기한 것이다. 하나 받아들이는 데니스 백작으로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숫자이다.
“어, 어찌 일개 백작령에 그처럼 많은 영지민들이 산다는 말씀이십니까?”
“사실 저희 제국에서도 셰울 영지는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편한 곳이기도 합니다. 하여 다른 영지에서 계속해서 이주해 오기에 인구가 늘었지요. 그래서 그렇습니다.”
데니스 백작은 뒤쪽에 시립해 있던 마법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고개가 끄덕인다.
현수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뜻이다.
“으으음! 대단하군요. 아, 참! 차를 안 내왔군요. 여봐라, 여기 차를 대령하라.”
“네에, 차 들어갑니다.”
데니스 백작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녀가 차를 들고 들어섰다. 보여주기 위함인지 몰라도 제법 깨끗하고 괜찮은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흐음, 다향이 좋군요.”
어떤 종류의 찻잎을 넣었는지 몰라도 멘톨 비슷한 냄새를 풍긴다. 이는 폐부를 진정시켜 안정적인 느낌을 갖게 했다.
현수가 차를 마시도록 잠시 시간을 두었던 데니스 백작이 눈빛을 빛낸다.
“듣자하니 테세린 영지에서 상단을 만드셨더군요.”
“네. 아르센 대륙에 우리 영지 물건을 팔 거점을 만들었습니다. 아다시피 테세린은 무역의 중심지가 될 입지를 갖추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그런데 그 후춧가루라는 게 좋더군요.”
“하하, 그게 여기까지 왔던 모양이군요.”
“네, 테세린의 영주 로니안 자작이 하나를 보내줘서 잘 썼습니다. 덕분에 요즘은 다이어트를 하는 중이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고기에서 나는 누린내 때문에 음식 먹기가 힘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아……! 그렇겠군요.”
현수와 데니스 백작은 아무런 영양가도 없는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데니스 백작이 시선을 맞춘다.
“한데 백작님께서 우리 영지를 방문하신 목적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좋습니다. 말씀하신 김에 청을 하나 드리죠.”
“경청하겠습니다.”
데니스 백작이 자세를 바로잡는 순간 문이 열린다.
끼이이익!
“배, 백작님!”
들어선 자는 간편한 레더 아머를 걸친 기사였다.
“뭔가, 제레미 경? 지금 손님과 환담 중인 거 모르나?”
데니스가 호통을 쳤지만 기사 제레미는 잠시 고개만 숙였을 뿐이다.
“압니다. 하나 긴급 상황이 발생되어 보고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흐음, 심각한 문제가 발생된 모양이군요.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현수의 말에 데니스 백작이 반색한다.
“아, 그래주시겠습니까? 그래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참, 케이먼! 케이먼 게 있나?”
“네, 백작님!”
“하인스 백작님을 모시고 본성 구경을 시켜 드리게.”
“알겠습니다, 영주님! 자아, 백작님은 소인을 따르시지요.”
“험, 그러세.”
현수가 늙은 집사의 뒤를 따라 나가는 시간조차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기사 제레미가 테니스 백작에게 다가가 귓말만을 했다.
“영주님! 테세린의 병사들이 총동원되어 야호니 다리 저쪽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영지전을 신청할 듯합니다.”
“뭐야……?”
데니스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이 곡창지대를 빼앗은 것을 로니안 자작이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언젠가는 반격할 날이 있을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남몰래 기사들을 양성했고, 병사들을 조련해 왔다. 하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물론 지금 당장 붙어도 테세린의 병사들은 물리칠 수 있다. 문제는 그 이후이다.
만일 상처 많은 승리를 거둔다면 매미 사냥에 어렵게 성공한 버마제비를 노리는 까치에게 당할 수 있다.
매미는 로니안 자작이고, 버마제비는 데니스 백작 본인이다. 그리고 까치는 유카리안 영지 뒤쪽에 자리한 케일론 영지의 칼멘 후작이다.
물론 드넓은 곡창지대와 두 개의 구리 광산, 그리고 철광 하나와 최근 발견된 마나석 광산이 탐욕의 대상이다.
기사와 병사들의 조련이 끝났다면 테세린의 공격 따위는 언제든 물리치고도 남는다. 그런데 지금은 부족함이 있다.
왕국은 현재 아드리안 공국 점령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렇기에 작위를 가진 모든 귀족의 병사들 가운데 절반 정도를 징발해 갔다. 물론 몬스터의 출몰이 심한 라수스 협곡 인근의 일부 영지는 예외이다.
아무튼 유카리안 영지엔 본시 40명의 기사와 2,000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현재는 딱 절반만 남아 있다.
파견된 기사와 병사 모두가 전사할 것을 고려하여 같은 수를 육성하고는 있다. 그런데 이들은 즉시 전력감이 아니다.
가장 나이 많은 아이가 열일곱 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8장 카이로시아는 여기 없는데?
테세린의 경우는 20년 전에 있었던 영지전에서의 패배로 기사 및 병사들의 수효가 절반 이하로 급감했기에 징발을 면제받았다. 항구도시 테세린을 방어할 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테세린 영지엔 기사 10명과 병사 700명이 있다.
물론 대외적인 숫자이다.
실제론 기사 10명과 병사 1,000명이 더 있다. 로니안 자작이 칼을 갈면서 육성한 드러나지 않은 병력이다.
이런 상황에서 맞붙는다면 유카리안 영지가 진다.
하나 데니스 백작은 테세린의 감춰둔 병력을 모르기에 큰 피해만 입을 뿐 승리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긴다 하더라도 큰 피해를 입는다면 유카리안 영지는 칼멘 후작의 공격을 견뎌낼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로니안 자작이 이길 수 있음에도 영지전을 걸 수 없는 이유도 칼멘 후작이 테세린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데니스 백작은 벌떡 일어나며 노성을 터뜨렸다. 그 즉시 유카리안의 병력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곧 걸어올 영지전을 모른 척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현수는 늙은 시종 케이먼의 안내를 받으며 영주성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눈에 뜨인 모든 벽에 각종 장식물들이 걸려 있고, 모든 바닥에는 두툼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조각상들도 많았고, 전시된 아머들도 제법 많았다.
사치스런 것들을 모두 본 현수는 지하도 구경하자고 했다. 하나 지하엔 창고와 감옥뿐이라면서 볼 게 없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에 갑옷을 걸친 기사와 병사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후후, 로니안 자작님이 움직이셨군.’
잠시 후, 일단의 병력이 성문을 벗어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모두 기마를 한 상태인지라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현수는 2층 난간에서 병력 이동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일이 예상대로 되어가기 때문이다.
“백작님! 영주성 구경 잘 했습니다. 관리를 잘 하셨더군요.”
“칭찬 고맙습니다.”
“그런데 영지에 문제가 발생된 듯합니다.”
“네, 아주 조그만 문제가 발생되었는데 금방 해결될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제 방문한 목적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여기 이레나 상단 사람들이 억류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
데니스 백작은 대꾸하지 않았다. 현수는 상대의 반응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제 사람들이니 풀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은 영주인 저를 모독한 죄 때문에 억류되었던 것입니다. 왕국의 백작인 나를 사기꾼 취급을 했기 때문이지요.”
노회한 정객인 데니스 백작은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현수는 쉽게 풀어줄 마음이 없다 판단하고 말을 이었다.
“예비 처남에게 듣자하니 마나석 광산의 일 때문에 15,000골드를 제공했는데 돌려주지 않으셨다고 하더군요.”
“예비 처남이라면……?”
“일루신 에델만 드 로이어. 라이셔 제국의 이레나 상단주인 에델만 백작님의 차남이지요.”
제국을 들먹인 것은 왕국과 세력의 차이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식시켜주기 위함이다.
“그럼……!”
“맞습니다. 카이로시아 에델만 드 로이어! 이레나 상단의 미판테 지부장이자 제 아내 될 사람입니다.”
“으으음……!”
데니스가 침음을 냈다. 현수는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좋은 말로 할 때 풀어줘라, 괜히 험한 꼴 당하지 말고.’
데니스 백작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하나 상념이 많다는 기색은 감추지 못했다. 안색이 자주 변하고 있다.
보고된 바에 의하면 하인스 백작을 수행한 기사나 병사는 없다. 그런데 영주성에 올 때 여덟 명의 기사들이 수행했다.
로니안 자작으로부터 갑옷 등을 빌린 것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인스 상단은 두 번 물품을 판매했다. 한 사람이 들고 다니기엔 많은 양이다.
그리고 그걸 백작 본인이 들고 다니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눈에 뜨이지 않은 비밀 호위 세력이 있을 수도 있다.
사실 이게 더 설득력이 있다. 제국의 백작이 혼자서 타국을 여행하는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만 한 병력인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의 영지 밖이니 신변안전을 위해 최소 기사 스무 명 이상은 대동했을 것이다.
그에 따른 병사들을 감안해 보면 최소 500명 이상은 된다. 그리고 그들의 전력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현재 유카리안 영지는 테세린 영지와 전면전을 벌일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때 또 다른 적을 만드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위기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데니스 백작은 짐짓 웃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군요. 두 분이 결혼하시면 코리아 제국과 라이셔 제국의 결합이라 하겠습니다.”
“성사만 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현수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음 지었다. 그 순간 테니스 백작의 마음속에 담겨있던 심술보가 터졌다.
사실 카이로시아를 억류한 것은 그녀의 빼어난 미모 때문이다. 처음 보는 순간 끓어오르는 음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여태껏 보았던 귀족가의 어떤 영애도 카이로시아와 견주기엔 부족하다. 아름답고, 똑똑하며, 상냥하고, 똑 부러진다.
그러니 어찌 탐나지 않겠는가!
그런 그녀를 첩으로 들인다면 이레나 상단으로부터 받았던 뇌물 15,000골드는 물론이고, 상단의 일부가 혼수품이 되어올 것이다. 데니스 백작의 입장으로선 꿩 먹고 알도 먹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이다.
그렇기에 억지를 부려 억류해 놓은 상태이다. 천천히 요리해서 마음과 몸 모두를 굴복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회유를 하고, 협박을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하여 오늘 밤 카이로시아를 강제로 겁탈할 생각을 했다.
그러기 위해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를 어렵게 구했다. 그것만 복용시키면 카이로시아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젊은 백작이 와서 달라고 하니 심술이 난 것이다.
“으음, 어쩌지요? 백작님의 배우자가 되실 카이로시아 에델만 드 로이어님은 현재 제 영지에 없습니다.”
“……?”
“저를 후원해 주시는 에드가 롤랑 폰 갈리아 공작님이 계시는 수도로 보냈기 때문입니다.”
“……!”
말없이 데니스 백작만 바라보았다. 왜 그랬느냐는 뜻이다.
“미안합니다. 나는 백작님의 예비 배우자인 줄 몰랐습니다. 아무튼 그분은 제게 무례를 범하셨습니다. 하나 백작가의 영애인지라 직접적인 처벌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여 공작님께 카이로시아님의 처분을 일임한 겁니다.”
데니스의 얼굴엔 미판테 왕국의 제1권력자인 에드가 공작으로부터 카이로시아를 빼앗아보라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
현수가 물러나면 심복에게 밀명을 내려 공작가로 보내 버릴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면 호색한인 에드가 공작이 카이로시아를 날름할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이득이 있다.
첫째는 공작에게 호감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