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15화 (115/1,307)

# 115

둘째는 눈앞의 젊은 백작이 헛물을 켜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현수는 어이가 없었다. 하나 발작할 수는 없다.

카이로시아가 진짜로 압송되었는지 여부를 아직은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화를 삭이곤 입을 열었다.

“흐음, 그거 유감이군요. 한데 에드가 롤랑 폰 갈리아 공작님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현재 수도에 머물고 계시며 미판테 왕국의 재상이십니다. 라이셔 제국과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어쨌든 국제적인 문제가 발생될 수 있기에 공작님께 맡긴 겁니다.”

말은 청산유수처럼 한다.

“그렇군요. 알았습니다.”

“네에, 저도 유감입니다. 며칠만 일찍 오셨더라도 카이로시아님과 함께 떠나실 수 있었을 것인데 말입니다.”

데니스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짜식아! 넌 안 돼. 인마!’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오신 김에 저희 영지에 며칠 머무시지요. 오늘은 아시다시피 문제가 발생되어 조금 어렵고 내일 저녁 만찬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데니스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현수가 영지 밖에 주둔시켜 놓은 병사들을 동원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현수가 이를 선선히 받아들인 것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내성에 빈 방이 많으니 그걸 쓰십시오.”

“아닙니다. 백작님께서 가꿔놓은 영지 구경을 하려면 밖의 여관이 더 편합니다.”

“아! 그러십니까? 그럼 안내인을 붙여드리지요.”

말이 안내인이지 실제론 감시인일 것이다.

“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현수가 나오자 토마스가 다가선다.

“백작님! 볼일은 다 보신 겁니까?”

“아직……! 여관을 잡아야겠네.”

“알겠습니다. 소인이 앞장서지요.”

일행이 여장을 푼 곳은 네라푼 여관이다. 네라푼이란 여행자의 안식처라는 뜻이다.

“주인장, 여기 최고급 스테이크 2인분 주게. 술은 마티주로 준비해 주고.”

“네에.”

“저쪽 테이블에도 같은 요리와 술을 주게.”

“네에. 알겠습니다. 귀족 나으리!”

현수 일행이 들이닥치자 네라푼 여관의 주점엔 고요가 감돌았다. 고위 귀족이 호위 기사들을 대동하고 들어온 때문이다.

주인은 손님들을 주점 뒤쪽 마당으로 내보냈다. 귀족과 평민이 한 자리에서 술을 마시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 어느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유카리안 영지 안에서 귀족은 하늘이기 때문이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현수는 B급 용병이지만 기사 복장을 한 토마스에게 무언가를 속닥였다.

식사를 마친 후 C급 용병 하나만 대동하곤 느긋하게 유카리안 영지 곳곳을 둘러보았다. 남는 시간을 활용하기 위함이다.

그러다 노예 경매장에 당도하게 되었다.

“어서 오십시오. 나으리!”

“구경도 가능하지?”

“물론입죠. 소인이 모시겠습니다요.”

노예 상인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니 후끈한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자아, 농노 경매는 마치고, 다음 순서를 진행하겠습니다.”

매대 위에서 큰 목소리로 소리친 노예 상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석 달 만에 열린 노예시장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눈빛을 빛내고 있다.

평민들도 많고, 이웃 영지에서 심부름 온 시종들도 많았다.

그러다 우연히 현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화려한 복장을 걸치고 있기에 눈에 뜨이지 않고 싶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자자, 오늘도 이곳 노예시장을 찾아주신 많은 분들……! 특히 높으신 귀족 분들의 왕림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다음 순서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노예 상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현수의 입가에 웃음이 띄워졌다. 나이트클럽 DJ들의 멘트와 비슷했던 것이다.

“자아, 이번에 내놓을 물건은 바다 멀리 베로스 왕국에서 데리고 온 노예들입니다. 모두들 이리 올라와!”

노예 상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내 여덟이 매대 위로 올라선다. 손목엔 쇠고랑, 발목엔 족쇄를 차고 있다.

혹여 있을지 모를 도주를 우려하여 쇠사슬이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자아, 이놈들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얼마 전 베로스 왕국에서 벌어졌던 반역 사건에 연루된 놈들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칼 쓰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다고 하는데 그건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하하! 하하하!”

구경꾼들이 우습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노예 상인이 말을 이었다.

“아직 낙인을 찍지 않아 노예근성이 부족하기에 일단 10골드부터 경매를 시작합니다. 아! 물론 낙찰을 받으시면 종속 마법을 걸어드립니다. 자아, 그럼 시작합니다. 어느 분이 10골드에 이놈을 구매하시겠습니까?”

노예 상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아, 10골드에 사실 분 나오셨습니다. 혹시 더 내고 사실 분 안 계십니까?”

“내가 11골드 내겠네.”

“아이고, 고맙습니다. 11골드도 나왔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럼 12골드 없으십니까? 12골드! 아, 저기……! 아이고, 대단히 고맙습니다. 다음은 13골드…….”

노예 상인의 진행 솜씨는 탁월했다. 관중들을 수시로 웃겨가며 진행해서 여덟 명의 노예는 금방 팔려갔다.

현수는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다 노예로 부린다? 흐음, 하긴 중세 유럽에서도 그러긴 했지. 그래도 그렇지 가축도 아닌데…….’

마뜩치 않았으나 어쩌겠는가! 이곳엔 이곳만의 룰이 있다. 혼자서 그 모든 걸 뒤집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입맛만 다셨다. 왠지 쓴맛이 느껴지는 듯했던 것이다.

“자아, 이제 기대하시던 계집들 경매 시간입니다. 맛있는 건 나중에 먹어야 더 맛있으니 우선은 청소하고 빨래할 계집입니다. 참고로 이 계집들도 베로스 왕국의 역적 집안 가솔들입니다. 자아, 첫 번째 계집입니다. 뭐해? 어서 안 올라오고?”

노예 상인의 말에 웬 여인 하나가 비틀거리며 올라섰다. 수갑과 족쇄의 무게를 감내해 내기 힘든 듯한 모습이다.

나이는 40살쯤 되었는데 피곤한 표정이다.

“이 계집은 역적의 첩이었다고 하더군요. 보다시피 나이가 들어 품기엔 그렇습니다만 청소와 빨래 정도는 잘 하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 그걸 잘 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귀족의 첩이 그런 일을 해봤을 리 만무하니까요. 하나 여기 있는 이 채찍 하나만으로도 그 모든 일을 훌륭히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휘이익! 짜아악!

“아아악! 뭐든지,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노예 상인이 가볍게 휘두른 채찍에 가격당한 여인은 비명을 질렀다. 고통에 민감한 체질인 듯싶다.

“자아, 이 채찍은 덤입니다. 이 계집을 사실 분!”

“5골드 내지.”

한국 돈으로 500만원을 내겠다는 뜻이다.

“난, 6골드!”

여인은 결국 10골드 50실버에 낙찰되었다.

“자아, 다음은 계집아이입니다. 보다시피 꽤 예쁘장하게 생겨서 앞으로 2∼3년만 잘 데리고 있으면 잠자리용으로 쓸 만하게 성장할 것 같습니다. 급하신 분은 당장에라도 쓰셔도 됩니다. 자아, 긴말 필요없습니다. 경매 시작합니다. 사실 분!”

“5골드 내겠네.”

“난 7골드 50실버!”

“거기에 1골드를 추가하지.”

열세 살쯤 된 소녀의 몸값은 14골드에 낙찰되었다.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 소녀는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불쌍해 보여 현수가 산 것이다.

낙찰된 직후 소녀는 현수의 곁으로 보내졌다.

노예 낙인을 찍으면서 종속 마법을 거는 것은 모든 경매가 마쳐진 후 행해질 일이다.

“자, 다음 순서입니다. 어서 올려 보내.”

“네. 올라갑니다.”

누군가에 등을 떠밀려 매대 위로 올라온 여인은 스무 살쯤 되어 보였다.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지만 상당히 괜찮은 미모의 소유자인 듯하다.

하여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아,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해 이 계집은 하자가 있습니다. 보다시피…….”

노예 상인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자 얼굴 전체가 드러났다. 그런데 왼쪽 뺨에 깊은 자상이 보인다.

귀에서 입가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누가 감히 날 사겠느냐는 듯 싸늘한 안광을 빛내고 있다. 성질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여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예 상인의 말이 이어졌다.

“보다시피 얼굴엔 하자가 있습니다. 하나 몸매를 보십시오. 끝내줍니다. 나올 곳은 나왔고 들어갈 곳은 자알 들어가 있지요? 이만한 몸매 드뭅니다. 그쵸?”

“그래! 드물다, 드물어!”

“네에, 우리가 돼지 잡을 때 얼굴 보고 잡습니까? 아니죠? 깜깜한 밤에 불을 탁 끄면 천하절색이나 다름없습니다. 참고로 이 계집은 사내를 모르는 처녀입니다. 자아, 경매 시작합니다. 사실 분은 금액을 불러주십시오.”

“5골드 내지.”

“예끼, 이 사람아! 그래도 몸매가 있는데 난 6골드 내겠네.”

“보아하니 성질도 더러운 것 같구먼. 하나 그거 길들이는 맛이 나겠어. 난 7골드 내지.”

“난 데려다 빨래나 시키겠네. 8골드!”

“에라, 이놈아! 믿을 말을 해라. 너 같이 호색한 놈이 빨래만 시켜?”

“그래, 이놈아! 빨래라는 게 꼭 옷만 빠는 건 아니잖아.”

“그럼 그렇지. 에구, 난 그 꼴 못 본다. 9골드 50실버!”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 곁에 있던 소녀가 안절부절못한다. 하여 고개를 돌려 물었다.

“왜? 오줌이 마려?”

“아, 아닙니다. 주인님!”

소녀는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듯 공손했다.

“근데 왜 그렇게 안절부절이야?”

“주, 주인님! 우리 언니를 사주시면 안 되나요?”

“언니였어?”

“네, 불쌍한 우리 언니. 언니를 사주세요. 흐흑!”

무릎을 털썩 꿇고 앉아 고개를 조아린다. 현수는 잠시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노예 상인의 멘트가 있었다.

“자아, 18골드 50실버 나왔습니다. 더 내실 분 없습니까? 없습니까? 없으시면 앞으로 셋을 세겠습니다. 그래도 없으면 18골드 50실버에 낙찰됩니다. 하나, 두울.”

“20골드 내겠네.”

“아, 네에! 20골드 나왔습니다.”

노예 상인은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어 기쁘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지으며 현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21골드!”

그때 또 한 명이 외쳤다. 현수가 입찰한 사내를 보니 아까 영주성에서 보았던 시종 가운데 하나이다. 데니스 백작의 색욕을 채워줄 색노를 구하러 온 모양이다.

“네에, 21골드도 나왔습니다. 더 내실 분?”

“30골드 내지!”

순간 사위가 조용해졌다. 잠자리 시중이나 들어줄 노예 계집, 그것도 얼굴에 긴 흉터가 있는 색노를 사들이기엔 너무 많은 돈이기 때문이다.

현수가 데니스의 시종을 바라보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서인지 노예 상인도 아까와 같이 하나, 둘, 셋 해서 낙찰시키겠다는 말을 하지 않고 눈치만 살핀다.

시종은 결국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몸매 늘씬하고, 느낌 좋은 계집이지만 흉터라는 하자 때문에 더 많은 값을 치러선 안 된다 판단한 모양이다.

결국 현수에게 낙찰되었다.

이후에도 경매는 이어졌다. 대부분 평민의 집에서 음식 만들고, 빨래하며, 시중들어 줄 노예로 팔려갔다.

“자아, 이쪽으로 오십시오.”

노예 상인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간 현수는 낙찰 금액인 44골드를 지불했다.

“고맙습니다. 나으리! 이건 노예 문서입니다. 그리고 종속 마법을 걸어드려야 하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흐음, 아니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노예들을 데려오게.”

“그건 안 됩니다. 아시다시피 왕국 법에 의하면 팔린 노예는 반드시 종속 마법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니 협조해 주십시오.”

현수가 따라온 토마스에게 시선을 돌리자 노예 상인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법에 명문되어 있습니다.”

왕국의 안전을 위한 조치인 듯하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네. 그렇게 하지.”

잠시 후, 마법사가 다가와 4골드와 두 방울의 선혈을 채취해 갔다. 원래는 1인당 4골드씩 받았는데 오늘 거래된 양이 워낙 많아 반감된 비용이라고 한다.

“자아, 다 되었습니다. 이 두 계집은 이제 귀족 나으리의 소유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알겠네.”

여관으로 돌아온 현수는 둘로 하여금 목욕을 하도록 했다.

몸에서 풍기는 악취가 너무 심했던 것이다. 물어보니 거의 반년 동안 목욕은 물론이고 세수조차 못했다고 한다.

저녁나절, 현수는 방으로 음식을 가져오도록 했다.

홀로 내려갈 경우 자신 하나 때문에 모든 평민들이 밖으로 내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님, 식사를 올려오도록 할까요?”

“그래!”

현수가 대답하자 스무 살쯤 된 노예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물러선다. 자신의 몸에서 나는 악취를 잘 알기 때문이다.

“잠깐! 네 이름은 뭐지?”

“이름……. 없습니다. 주인님이 하나 지어주세요.”

“이름이 없어?”

“네, 제 이름은 이제 없어진 이름입니다.”

“그래? 사연이 있다는 뜻이지?”

“베로스 왕국에서 반역의 죄를 쓰고 국외로 추방당한 신세입니다. 추방되는 순간 치욕적인 이름은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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