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21화 (121/1,307)

# 121

“아이고, 이런 걸 왜 날 줘? 사장 총각이 마셔야지.”

할머니는 극구 사양했지만 현수의 거듭된 권유에 결국 회복 포션 반 병을 마셨다.

복용을 확인한 현수는 슬립 마법으로 할머니를 재웠다. 서너 시간 푹 주무시는 동안 약효가 발휘되게 하기 위함이다.

“은정 씨! 아침 식사 잘 했어요. 음식 정말 맛이 있더군요. 그거 할머니 솜씨죠?”

“아뇨, 전부 제가 만든 건데요? 할머닌 밥만 지으셔요.”

“호오, 그래요? 그 음식 전부 은정 씨 솜씨라고요?”

“네, 근데 정말 맛이 있으셨어요?”

“진심, 진심으로 맛이 있었어요.”

현수의 말은 진짜이다.

간이 딱 맞아 그런지 재료 고유의 향까지 완벽하게 즐길 수 있어서 정말 맛있게 먹었던 것이다.

“고마워요. 재료도 변변치 않았는데……. 아직 어려울 때 사정을 잊지 않아 엄마는 비싼 재료를 못 사게 해요.”

“이해해요, 그 마음!”

현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온다던 전화는 안 왔어요.”

“아! 그래요? 오늘 이 실장님 업무가 뭐죠?”

“특별한 일은 없어요. 처리할 일은 거의 다 처리했어요. 김수진 사원과 이지혜 사원 역시 당장 처리할 일은 없고요.”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어머, 사장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저도요. 헤헷!”

마침 김수진과 이지혜가 출근하였다.

“잘 되었습니다. 오늘 업무 지시를 하려 해요. 메모 준비 후 사장실로 와주세요.”

“네에, 사장님!”

셋이 다이어리와 볼펜을 지참하여 사장실에 들어오자 현수가 메모했던 것을 펼쳤다.

“먼저 이은정 실장님은 오늘 커피 재배에 관한 자료들을 모두 수집해 주세요. 묘목은 어디에서 구하며, 어디가 재배에 적합한지, 어떻게 재배하는지 등을 빠짐없이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커피 재배 전문가들을 고용하려면 어떻게 하는지도요.”

“네에. 그런데 커피 재배 규모는 어느 정도지요?”

무역과는 관련없는 의아한 지시였지만 이은정은 토를 달지 않고 궁금한 점을 물었다.

“현장에 가봐야 알겠지만 좁은 지역은 아닐 겁니다. 어쩌면 100만 평이 넘어갈 수도 있어요.”

“네에, 알겠습니다.”

“김수진 사원은 오늘 태양광발전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해 주세요. 소규모가 아니라 대단위 발전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파트 단지 전체에 공급하는 정도가 될 겁니다. 가급적이면 국내 자료를 수집해 주시는데 기술력은 인정받았지만 자금 부족으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을 우선적으로 찾아봐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지혜 씨는 한우, 젖소, 돼지, 닭 등 가축 사육과 관련된 것들을 알아봐 주세요. 한국이 아닌 콩고민주공화국에 대단위 축사를 지어놓고 방금 말한 가축들을 기를 생각입니다. 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종우와 종돈을 어떻게 구하는지 알아봐 주시구요.”

“네, 알겠습니다.”

이은정과 김수진, 그리고 이지혜가 맡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사장실을 비웠다.

현수는 다시 김수진을 불러 미처 언급하지 못한 업무를 지시했다. 태양광발전 이후 배전 및 배선까지 해야 하므로 전기 공사와 관련된 자료 및 업체를 찾아보라는 것이다.

이지혜 역시 다시 불려 들어갔다. 그녀에게 지시된 업무는 축사 건축부터 시작하여 적정 수의사 수까지, 그야말로 축산과 관련된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를 파악해 달라고 했다.

혼자 남게 된 현수 역시 다이어리를 펼쳐놓고 많은 메모를 했다. 갑자기 할 일이 엄청나게 늘어난 느낌이다.

“흐음, 일단 자료 수집을 해놓고 우선 순위를 정해서 사람들을 만나면 되겠지.”

표창장을 받은 4월 23일부터 7월 23일까지 석 달간 휴가이다. 그런데 오늘은 6월 19일이다.

이제 한 달 남짓한 기간만 남은 셈이다.

“젠장! 시간 한번 빨리 흘러가는군. 한 달 이내에 모든 걸 다 알아볼 수 있을까? 다른 일도 많은데…….”

현수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있다.

첫째는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는 유진기에 관한 일이다.

둘째는 백두마트에서 당했던 부당한 린치사건에 대한 보복이다.

“흐음, 이쯤 되면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거군. 그런데 믿을 만한 사람을 어찌 구한다?”

학교 다닐 때엔 학비를 버느라 친구 사귈 여유가 없었다. 연애 한번 못해봤으니 아는 여자도 없다.

같은 과 동기들은 말로만 친구일 뿐 그냥 아는 사이에 불과하다. 가끔 만나서 쓰잘데기없는 이야길 하며 술 마시는 게 전부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단 한 번도 흉금을 털어놓고 함께 고민을 나눴던 녀석이 없다. 그러다 각자 군대에 가게 되었고, 현재엔 서로 먹고 살기 바빠 연락조차 없다.

고등학교 동창들도 마찬가지이다. 몇 년에 한 번 연락을 주고받았을 뿐이니 친하다고 할 수도 없다.

동문회엔 졸업 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현수에겐 친구가 하나도 없다!

“아……! 내가 세상을 잘못 살고 있었나 보구나.”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는 말을 문득 떠올리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흐음, 그래도 한국에서 일을 봐줄 사람이 필요하기는 한데.”

현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고강철이 생각났다.

교도소를 나오면 갈 데가 없는 사람이다. 오광섭에게 부탁은 해놨지만 대구는 그에게 적합하지 않다.

본인도 그렇지만 그의 아내 역시 상처가 많기 때문이다.

생각난 김에 권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링! 띠리링! 띠리리링!

“어머, 현수 씨! 웬일이세요?”

반색하는 음색이기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네. 지현 씨, 뭣 좀 물어볼게 있어서요.”

“네에. 말씀만 하세요.”

“저어, 고강철 씨는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그 사람요? 진범이 잡히기는 했지만 아직 자백을 하지 않았어요. 당시의 흉기들을 찾기는 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과학수사연구소에서도 뾰족한 결론을 못 내리고 있대요.”

“그럼 아직 청송에 있다는 거네요.”

“아직은요…….”

“그 사람들 자백만 하면 풀려나나요?”

“그럼요! 진범이 기소되면 그럴 거예요. 근데 자백을 안 하고 있대요. 듣자하니 여전히 고강철 씨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고 있다더군요. 참 나쁜 사람들이에요.”

“혹시, 제가 가면 만나게 해줄 수 있어요?”

“누구요?”

“고인철과 고진철이요.”

“아마도요. 아마 그럴 수 있을 거예요. 근데 왜요?”

“제가 자백시킬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아……! 그러실 수 있겠네요.”

“그럼 지금 내려갈까요?”

“정말요? 정말 와주실 수 있어요?”

좋아하는 기운이 역력하다. 하나 현수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네, 지금 출발할게요. 그래야 업무 시간 내가 되잖아요.”

“네에, 내려오세요. 그리고…….”

지현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뭐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여간 어서 내려오세요.”

“네, 그럼 이따 만나요.”

“네에.”

현수가 대구지청에 당도해 보니 지현이 서성이는 모습이 보인다. 시간 맞춰 내려와서 기다린 모양이다.

“현수 씨! 어서 오세요. 그리고 반가워요.”

“하하! 네에. 저도 반갑습니다.”

“물어봤는데 그 사건 담당검사가 지금 잠시 자리를 비웠어요. 조금 기다려야 하는데 괜찮죠?”

“뭐, 저야……!”

“그럼 우리 차나 한잔 마셔요.”

지현의 뒤를 따라 당도한 곳은 지청 인근 커피숍이다. 단독주택을 개조하여 만든 모양이다.

손님들이 제법 많았는데 대부분이 소송과 관련된 사람들인 듯싶다. 하하호호 보다는 심각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분위기 좋죠?”

깔끔하면서도 산뜻한 인테리어. 향긋한 커피 내음, 곳곳에 놓인 소품이 안정된 느낌을 준다.

특히 좌석과 좌석 사이에 놓인 잎 많은 화분들은 옆 테이블 신경 안 쓰고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네, 좋으네요. 여기 자주 이용해요?”

“가끔요. 비오는 오후에 점심 먹고 가끔 들러요.”

“그랬군요.”

“근데 진짜 이수연 씨 언니랑 사귀는 사이에요?”

진짜 묻고 싶었다는 듯한 표정이다.

“언론이 있으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

지현은 어서 더 이야기해 달라는 표정이었다.

“사실 이수연 씨는 조폭에게 납치되었어요. 우연히 그 자리에 있게 되어 구해줬는데 언론엔 사실대로 말할 수 없잖아요. 이수연 씨 명예가 있는데…….”

“아, 그래서 그 사람 언니랑 사귄다고 둘러댄 거군요.”

궁금함이 모두 풀렸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짓는다. 참 예쁘다.

“사실 이수정 씨도 알긴 알아요.”

“어머, 그럼……?”

지현의 표정이 또 야릇하게 변했다. 마치 연적이라도 출현한 듯한 표정이다.

현수는 내심 웃음이 나왔지만 편하게 이야기했다.

“그날 비행기를 탔는데 그때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아, 그랬군요.”

딱 한 번의 만남이었다는 뉘앙스이기에 지현의 표정은 다시 밝아진다. 문득 팔색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참, 그때 다치셨던 수사관은…….”

현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지현이 말을 끊은 탓이다.

“최장혁 경사님이요?”

“네, 그분은 지금 어때요? 퇴원했죠?”

“아뇨, 그분 지금은 나이롱환자예요.”

“나이롱환자……?”

“네, 아픈 데가 없거든요. 근데 아직도 입원 중이죠. 서장님이 이 참에 푹 쉬라고 했대요. 한번 만나보실래요?”

“아, 아닙니다. 제가 그분을 아는 것도 아닌데.”

“아니에요. 말 나온 김에 한번 가봐요. 어차피 오늘 가보려 했단 말이에요. 커피만 마시고 같이 가요.”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뇨병이 다 나았는지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그럼, 그러죠.”

잠시 후, 둘은 병실로 들어섰다.

“최 경사님!”

“아……! 권 사무관님! 또 오셨어요? 바쁘실 텐데…….”

“아니에요. 저를 구해주신 은인이시니 당연히 찾아봬야죠. 근데 애들은요?”

“애들은 학교에서 아직 안 왔습니다.”

“그렇군요. 어디 불편하신 덴 없으시죠?”

“네에. 염려 덕분에 멀쩡합니다. 하하하!”

최장혁 경사의 시선이 현수에게 향했다. 누구냐는 뜻이다. 표정으론 지현의 애인쯤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분이세요. 최 경사님을 구해주신 은인이……!”

“아……! 정말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느닷없는 소개와 환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하는 인사에 현수는 당황했다. 자신이 치료한 것을 이야기했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도 최 경사님이 의식을 찾고 외상이 저절로 아문 것에 대해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말씀드렸어요.”

“……!”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라요. 저하고 여기 계신 최 경사님만 아는 비밀이에요.”

“……!”

현수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자 지현이 안절부절못한다. 화가 많이 났다 생각한 듯하다.

“미안해요.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지현의 선한 눈망울에 습기가 차오름이 느껴진다. 아마도 자책의 눈물일 것이다. 어찌 울게 놔두겠는가!

“흐음, 할 수 없죠. 대신 더 이상은 안 돼요. 아시죠?”

“네, 알아요. 소문 나면 현수 씨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걸요.”

“저도 입 꾹 다물고 있겠습니다. 제가 하도 권지현 사무관님을 졸라서 할 수 없이 말씀하신 겁니다. 죄송합니다.”

최장혁 경사도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네에. 할 수 없는 일이죠.”

“고맙습니다.”

최 경사는 나이가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직각으로 고개를 숙여 다시 한 번 사의를 표했다.

“말 나온 김에 몸이 다 나았는지 확인해 보고 싶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그럼 누워주시겠습니까?”

“네에.”

최장혁 경사가 병상에 오르는 동안 지현은 알아서 밖으로 나간다.

“슬립!”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멀쩡하던 최 경사가 잠들었다.

“흐음, 마나 디텍션!”

사르르르르릉―!

손끝으로부터 뿜어져 나간 마나가 최 경사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마나는 마치 자신의 임무를 안다는 듯 알아서 췌장 쪽으로 이동했다.

아무런 막힘도 없는 상태이다. 현수는 예상이 맞았기에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내친 김에 나머지 장기들도 체크했다.

심장, 위장, 간장, 허파, 신장, 비장 모두 정상적이다. 마지막으로 뇌를 살펴보았다. 그곳 역시 마나의 움직임이 원활하다.

‘흐음, 회복 포션이 당뇨병에 효험이 있다는 건데……. 최 경사와 은정 씨 할머니만으로는 부족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해 봐야 정확한 용량과 용법을 알 수 있겠군.’

최경사가 깨어난 뒤 지병이었던 당뇨병이 완치된 듯하다고 하자 반색하며 좋아한다. 하나 병원에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였다. 괜한 수선이 벌어지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헤어지기 전 최 경사는 현수에게 명함을 주었다.

그리곤 언제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전화해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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