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최 경사 역시 현수를 도사라 칭했다. 이를 마땅히 대체할 말이 없기에 그냥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하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마법사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고인철 형제를 체포할 때 수사를 지휘했던 곽 검사가 지청에 당도했으니 오라는 내용이다.
“반갑습니다. 곽호 검사입니다.”
“네에, 전 김현수라 합니다.”
“권 사무관님, 이분이 놈들의 입을 열게 하실 분이라고요?”
평범한 샐러리맨처럼 생겼기에 하는 말일 것이다. 곽호의 표정엔 전혀 신뢰의 빛이 담겨 있지 않았다.
“네, 김현수 씨는 사람의 심리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어요. 그러니 한번 맡겨보셔요.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오기 전에 이런 말을 하기로 입을 맞추었던 것이다.
“하긴요…….”
고개는 끄덕였지만 곽 검사의 얼굴엔 여전히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빛이 어려 있었다.
“일단 제가 그자들을 만나게 해주시겠습니까?”
“좋습니다. 하나 많은 시간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밖에서 저희 수사진들이 참관할 겁니다. 가혹 행위는 절대 하시면 안 됩니다.”
“네. 그렇게 하지요. 길어야 10분이면 될 겁니다. 그리고 제가 신호를 보내면 녹음과 녹화를 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네, 그러시다면……. 저를 따라오시지요.”
곽 검사는 지청에 마련된 심문실로 현수를 안내했다.
실내에 들어서서 보니 가혹 행위를 할 수 없도록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현수는 CCTV를 등지고 앉아 자신의 얼굴과 입술 모양을 확인할 수 없도록 했다.
잠시 후 고인철, 고진철 형제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12장 본격적인 행보
저벅저벅! 끼이이익―! 쿵―!
반대쪽 철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둘이 들어선다.
“어라……! 넌 우리 변호사가 아닌데?”
“그래, 넌 뭐하는 놈이냐?”
고인철 형제는 부러 그러는지 험악한 인상을 지었다.
“일단 자리에 앉으세요.”
“글쎄, 니가 뭐하는 놈인지 알아야 앉거나 말거나 할 거 아냐? 대체 넌 누구냐? 누가 보냈어?”
고인철의 물음에 현수는 대답 대신 입술을 달싹였다.
“마나여, 이들을 내 뜻에 복종케 하라. 오베이(Obey)!”
“……!”
“자리에 앉으세요.”
“네에.”
둘이 자리에 앉자 현수는 이름과 주소 등을 물었다. 밖에서 곽 검사와 수사관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7∼8분을 이야기한 후 현수는 탁자 아래 스위치를 눌렀다. 안의 대화 내용이 밖으로 들리게 하는 장치이다.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그때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 소상히 말해보십시오.”
“네, 그때 죽었던 세 놈들은 우리가 애써 이룩한 업소를 날로 먹으려고 했습니다. 해서 놈들을 해치우기로 마음먹고…….”
고인철이 말을 하면 고진철이 빠진 부분을 채워주는 진술이 이어졌다. 물론 고음질로 녹음이 되고 있었다.
둘의 진술은 거의 20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이들의 진술은 녹음과 동시에 녹화까지 되었기에 법정에서 범행을 자백한 증거 자료로 쓰이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법정에서 진술할 때 오늘 했던 말과 다른 말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물론입니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릴 겁니다.”
“고진철 씨도 그럴 거죠?”
“네, 강철이가 이번 사건과 관련없다는 내용까지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대화는 이만 마치죠.”
“네, 오늘 말씀 고마웠습니다.”
둘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까지 하자 곽 검사 일행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간 이들의 입을 열기 위해 별의별 수를 다 썼다.
때론 협박도 했고, 범행을 자백만 하면 자수한 것으로 처리해 주겠다는 회유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게 닫혀만 있던 입들이다.
그런 고인철, 고진철 형제가 너무도 순순히 모든 범행을 시인했기 때문이다.
“역시 현수 씨에요. 수고하셨어요.”
“하하, 네에.”
권지현이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죄송합니다, 아까는 별 기대 없었는데……. 아직 제가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한 듯합니다. 사과드립니다.”
곽호 검사가 정중히 사과했다.
사실 오늘의 일은 지청장의 딸이자 5급 사무관인 지현의 안면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자존심 강한 검찰이 내부인사도 아닌 외부인사에게 범행 자백을 도와달라는 말을 어찌하겠는가!
아무튼 지현의 권고로 현수의 접견을 마지못해 허락했다. 물론 아무런 결과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껏 그토록 애를 써도 안 되던 일이 눈앞에서 마치 눈 녹듯 스르르 풀어졌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김현수 씨! 앞으로도 자백하지 않는 놈이 있으면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말을 한 이는 곽호 검사와 함께 일하는 수사관인 듯하다.
현수는 마치 농담이라는 듯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제가 조금 바빠서 앞으론 어려울 것 같은데요?”
“아이고, 그거 아쉽습니다. 요즘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놈들이 많아 애를 먹고 있는데…….”
저도 모르게 업무상 어려움을 토로하는 듯하다.
“하하, 지현 씨가 부탁하면 들어드릴지도 모릅니다.”
“아! 그렇습니까? 권 사무관님, 앞으로도 잘 모시겠습니다.”
수사관의 너스레에 지현의 얼굴이 환히 피어오른다. 대구지청의 꽃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닌 듯 너무도 아름답다.
현수는 순간 영혼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한동안 지현의 예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속의 연인 강연희 대리에게 죄 지은 느낌이 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곽호 검사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권 사무관님! 솔직히 별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오늘 횡재한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
“호호, 네에.”
지현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자 곽호 검사가 현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김현수 씨! 오늘의 도움,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어려운 일 하나를 해결했습니다.”
“네에.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현수와 지현은 곽호 검사의 사무실에서 차 한 잔 대접받고 밖으로 나왔다.
“배 안 고파요? 전 고픈데……. 우리 뭣 좀 먹으러 가요.”
“그럽시다.”
“근데 우리 전에 약속 하나 하지 않았었나요?”
“약속이요? 무슨…….”
“어머, 섭섭해요. 저하고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서는……. 치잇! 저 같은 거 관심도 없으시다는 말씀이시죠?”
상대의 느닷없는 비약에 순진한 현수는 또 한 번 당황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아닙니다.”
“호호, 그럼 저한테 조금이라도 관심있다는 말씀이세요?”
눈빛이 반짝인다. 어찌 아니라 하겠는가!
현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조금 아까 눈부신 미모와 환한 미소에 잠시 정신 팔리지 않았던가!
“아이, 기분 좋아라. 호호, 오늘 정말 좋아요.”
“……!”
“밥 먹고 안동 하회마을 구경 가는 건 어떨까요?”
“아……! 그 약속이군요.”
“네에. 대구에선 가까운 데지만 아직 한 번도 못 가봤어요. 영국 여왕도 구경한 곳인데 대구 사람인 제가 못 가봤다는게 조금 억울한 기분도 들고요.”
“그렇군요. 그럼 그럽시다.”
“호호, 기분 정말 좋아요. 근데 우리 뭐 먹죠?”
“대구 찜갈비가 유명하잖아요.”
“아……! 맞아요. 찜갈비 맛있어요. 좋아요, 그거 먹으러 가요.”
현수와 지현은 입에서 살살 녹는 찜갈비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둘 사이가 훨씬 더 친해지는 시간이었다.
식사 후엔 하회마을로 갔다. 산책하듯 천천히 거닐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공부하느라 여행다운 여행을 다녀보지 못한 지현은 느긋한 걸음으로 걸으며 둘러보는 관광의 참맛을 느끼는 듯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건 현수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마음 편히 아무런 걱정 없이 곳곳을 둘러보았다.
저녁나절이 되어 하회마을 특유의 헛젯밥을 파는 식당엘 들어갔다. 헛젯밥이란 헛제사밥이라고도 한다.
주문을 하고 나니 지현이 묻는다.
“내일 출근하셔요?”
“그럼요.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어요.”
현수가 너스레를 떨자 지현이 샐쭉한 표정을 짓는다.
“치이, 휴가 중이라면서요.”
“천지건설에서 휴가 중인 건 맞아요. 그런데 그새 제가 일을 하나 벌여놓았거든요. 그래서 조금 바빠요.”
“어머! 무슨 일인데요?”
궁금하다는 듯 눈빛을 반짝인다.
“조그만 무역회사 하나 냈어요. 한국과 콩고민주공화국 간의 의약품 수출을 중개하는 회사지요.”
“호호, 그럼 돈은 잘 버시겠네요.”
“돈이야 뭐……. 이제부터 조금씩 벌겠지요.”
“부디 잘되시길 빌게요.”
“고맙습니다.”
음식이 나오자 먹기에 바빠졌다. 꽤 긴 거리를 걸어서 그런지 허기진 때문이다.
“지현 씨! 한 달쯤 후엔 다시 아프리카로 가야 해요. 혹시 전화 못 드려도 섭섭해하지 마세요.”
“7월 22일이 출국 날짜지요? 그때쯤 서울에서 세미나가 있어요. 제가 배웅해 드릴게요.”
“아이구, 아닙니다. 배웅은 무슨……. 세미나 때문에 서울에 오시면 여러 모로 바쁠 테니 그러지 마십시오.”
“호호호, 바쁘면 당연히 못 나가죠. 그래도 섭섭해하지 않으실 거죠?”
“네? 아, 네에. 그럼요.”
지현을 대구에 내려놓은 현수는 늦은 밤에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꺼놓았던 핸드폰을 켜니 문자 메시지가 와 있다.
안녕하십니까? 김 사장님!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하군요.
회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드미트리.
“으으음……!”
현수는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만난 느낌이 들어 나직막한 침음을 냈다.
드미트리 하나만 어떻게 해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은 마음이다. 하나 상대는 거대한 조직이다.
드미트리 혼자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건 분명 아닐 것이다. 허락만 해준다면 모스크바의 드모비치 상사로부터 연간 6억 달러어치 의약품을 거래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했다.
한화로 6,700억쯤 되는 거래이다.
이런 거래를 어찌 일개 조직원이 결정했겠는가!
아마도 레드 마피아는 현수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친척과 친구들까지 모두 꿰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강연희 대리나 권지현 사무관,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이수정, 이수연 자매 등의 거처도 모두 파악했을 것이다.
물론 현수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위해를 가하거나 협박용으로 납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핀치에 몰린 것이다.
현수는 궁금했다.
레드 마피아가 콩고민주공화국 같은 나라에서 대체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 이러는지 알 수 없다. 하나 결코 예사롭지 않은 것을 노리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으으음……!”
현수는 꽤 오랫동안 나지막한 침음만 내며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번뜩이는 묘안이 떠올랐다.
마음을 정한 현수는 내일 일은 내일 결정한다는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사장님, 말씀하셨던 자료 가운데 일부예요. 한꺼번에 드리면 너무 방대한 자료가 될 것 같아 조사되는 대로 정리해서 올려 드릴게요.”
“아, 그래요? 수고했네요.”
현수는 은정이 내민 USB를 컴퓨터에 꽂았다.
여러 개의 폴더가 있다. 하나는 ‘커피 & 바나나’이고, ‘축산’과 ‘비료’, 그리고 ‘태양광발전’이라는 폴더도 있다.
하나하나 열어 내용을 살펴보았다. 예상보다도 상세한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필요한 것들을 인쇄하여 다시 한 번 살피고는 양복을 집어 들었다.
“외출했다 오겠습니다. 시간되면 퇴근하세요.”
“네, 사장님! 제가 수행할까요?”
“아니에요. 자료 정리하느라 애썼으니 조금 쉬세요.”
사무실을 나서고 한 시간 반쯤 지난 뒤 당도한 곳은 시화공단에 위치한 극동 솔라파워라는 업체이다.
비어 있는 수위실을 지나 주차장에 차를 댔다.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샌드위치 판넬로 지은 건물이 있기에 우측 건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이곳이 극동 솔라파워입니까?”
“아니에요. 극동은 저쪽이에요.”
“아, 그렇습니까? 실례했습니다.”
반대쪽 건물로 들어가니 썰렁한 분위기이다.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니 여직원 하나가 화장실에서 나온다.
“사장님과 만나기로 약속한 김현수라 합니다.”
“아, 네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사장님 금방 오실 거예요.”
낡은 소파에 앉아 있으니 커피를 한잔 내온다.
“직원들은 모두 외근 중인 모양입니다.”
“네……? 아, 네에.”
여직원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을 하곤 총총히 물러났다.
현수는 김수진이 올렸던 보고서 내용을 떠올려보았다.
극동 솔라파워는 태양광발전 설비를 자체 제작하여 시공까지 해주는 업체이다.
업계에서는 기술력을 인정받았지만 건설회사와 거래하던 중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하여 자금난을 겪는 중소기업이다.
업계 최초로 전기료 및 난방비 없는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겠다는 모 건설회사와 손을 잡고 의욕적으로 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