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물론입니다. 수진 씨와 지혜 씬 아직이에요?”
“아뇨, 둘 다 재고 확인하러 창고로 갔어요.”
“그래요? 그럼 오는 대로 같이 내방으로 오세요.”
“네. 사장님!”
사장실로 들어가자 은정이 사과 주스를 들고 온다.
“사장님! 사과 주스엔 아세틸콜린(Acetylcholine)이란 물질이 풍부하대요. 기억력과 인지 능력을 높이는 등 뇌 기능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더군요.”
“그래요? 고맙네요. 잘 마실게요.”
“네에.”
은정은 뭐가 부끄러운지 쟁반을 들고 잠시 몸을 움츠린다.
사과 주스를 마시고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이번엔 커피 한 잔을 가지고 온다.
“사장님, 커피는 인슐린2) 장애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대요. 그래서 하루에 네 잔의 커피를 마시는 남성들은 2형 당뇨병3)에 걸릴 확률이 33%나 낮대요.”
“……!”
은정이 쟁반을 들고 황급히 나가는 동안 현수는 멍한 시선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대체 왜 이러나 싶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권지현이나 이수정처럼 사랑해 달라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현수와 수정이 사귀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시간이 지났을 즈음 은정이 또 쟁반에 뭔가를 얹어서 들여온다. 색깔을 보니 오렌지 주스이다.
“사장님, 오렌지 주스에는 비타민 C뿐만 아니라 베타 크립토잔틴(Beta―Cryptoxanthin)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관절염에 걸릴 확률이 현저히 낮아진다고 해요. 게다가 항염 성분도 있어서 몸에 좋다고 하네요.”
“네, 신경 써줘서 고맙네요.”
현수는 은정이 달라진 이유를 알 수는 없다. 하나 호의라는 것만은 분명하기에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물론 환한 웃음 또한 지어주었다.
은정이 나가고 다이어리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콩고민주공화국과 한국 모두에게 이득이 될 일을 제대로 입안하기 위함이다.
커피 및 바나나 농장을 세운다는 대전제는 결정되었다. 이를 운영하기 위한 세부 사항들을 점검하는 중이다.
이때 문자 한 통이 온다.
김현수 사장님!
우리의 제안에 대한 답변을 주실 시간이 된 듯합니다.
―드미트리.
현수는 협박받는 기분이 되어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나 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하여 잠시 고심하였다.
아버진 추씨 공방으로 종종 나가야 한다.
어머니 역시 동네 슈퍼랄지, 마트, 시장엘 다니셔야 한다. 뿐만 아니라 친지들과의 교류를 위한 외출도 잦다.
집에 마법진을 잔뜩 그려놓고 외출 금지를 시킬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정면으로 부딪쳐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
레드 마피아와 콩고민주공화국, 그리고 천지건설과 천지약품, 마지막으로 현수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묘수를 짜내야 하는 것이다.
내심 어느 정도는 입안이 되어 있다. 이것에 대해 보다 상세한 계획의 수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현수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미스터 드미트리!”
“아, 김 사장님! 그래, 결정을 하셨습니까?”
드미트리는 여전히 정중하다. 만일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면 어찌 변할지는 모른다.
현수는 잠시 말을 끊었다. 하나 드미트리는 채근하지 않는다. 기다려 주겠다는 뜻일 것이다.
“좋습니다. 미스터 드미트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요.”
“아! 고맙습니다. 그리고 현명한 결정이었습니다.”
마지막 말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보다 먼저 반대급부에 대한 이야길 해야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그쪽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상 드모비치 상사와의 거래에 대한 확약이 있어야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제반 서류를 준비하여 찾아뵙겠습니다.”
“좋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연락하고 방문해 주십시오.”
“네, 그럼 이만……!”
드미트리가 전화를 끊자 현수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이제 기호지세가 된 셈이다.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최대로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기에 어찌할 것인지를 고심한 것이다.
점심을 먹고 신문에서 경제 동향 등을 살피고 있을 때 드미트리가 방문했다.
“안녕하십니까, 김현수 사장님!”
“네, 어서 오십시오. 그런데 뒤에 계신 분은……?”
드미트리 뒤에는 늘씬한 팔등신 미녀가 있다.
할리우드로부터 캐스팅 제안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의 여인은 몸에 착 달라붙는 검정색 투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예카테리나 일리치 브레즈네프(Екатерина Ильи'ч Бре'жнев)입니다. 이름이 길죠? 그냥 까챠(Katya)라 불러주세요.”
손을 내밀었기에 얼떨결에 악수를 한 현수는 까챠가 내민 명함의 깨알 같은 글씨를 읽으려 했다.
“예카테리나 변호사는 하버드 로 스쿨 출신이지요.”
“아! 그렇습니까?”
현수는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까챠를 보았다. 얼굴 예쁘고, 몸매 좋은 데다 두뇌까지 뛰어나다 생각한 때문이다.
‘흠, 성격은 어떨까? 조금 까탈스럽겠지?’
조금은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까챠에게서 단점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시선을 주었다.
한편, 까챠는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레드 마피아와 이런 계약을 하나 싶어 현수를 살피던 중이다.
둘의 시선이 불꽃 튀는 듯하자 드미트리가 주인인 양 입을 열었다.
“자자, 서서 이럴 게 아니라 앉아야겠지요?”
자리에 앉자 까챠가 준비해 온 서류들을 꺼낸다. 러시아어와 한글, 그리고 영문으로 작성된 것이다.
서류를 받아 읽어보았으나 무역 실무에 대해선 아는 바 적기에 은정을 불러들였다. 그리곤 조목 하나 하나를 세밀하게 따졌다. 궁금한 것을 물으면 까챠가 대답해 주었다.
검토가 끝날 즈음 은정은 조금도 불리한 내용이 없다는 평을 내렸다.
약정서엔 매달 5천만 달러씩 12개월간 총액 6억 달러어치의 교역을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실리프 무역상사에서 드모비치 상사로, 또는 드모비치 상사로부터 이실리프 무역상사로 상품을 수출입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에 대한 결정권은 이실리프 무역상사에 있다.
다시 말해 수출만 하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수입할 물건이 있다면 무엇이든 보내준다는 것이다.
거래 금액에 비해 이실리프 무역상사의 규모가 적기에 통상적인 방법은 쓰지 않는다.
이실리프로부터 수출될 상품을 통보받으면 드모비치는 수량을 결정한다. 이때의 가격은 상호 협의를 한다.
다만 이실리프에겐 최하 10% 이상의 이득이 보장된다.
수출 물량 및 단가가 결정되면 드모비치 상사는 즉각 취소불능신용장(Irrevocable Credit)을 보낸다.
이를 담보로 이실리프 무역상사는 수출할 물량을 확보하여 선적한다. 드미트리가 최종적으로 선적 완료를 확인하면 드모비치 상사는 즉각 현금으로 전액 결제한다.
이때 결제화폐는 달러, 유로, 엔, 위안, 원 중 현수가 원하는 것으로 한다. 물론 섞어서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각기 1,000만 달러에 해당되는 달러, 루불, 유로, 엔, 위안, 원화로 결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신용장은 드미트리가 회수하여 처리하도록 되어 있다.
은정의 말대로 현수에겐 조금도 불리하지 않은 내용이다.
사인을 한 직후, 현수는 까챠에게 대단히 능력있는 변호사를 만나게 되었다며 웃어주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까챠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린다. 분홍색 장미가 만개하여 향기를 뿜는 듯했다.
웃는 낯이기는 하지만 현수의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약정서에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반입할 컨테이너 스무 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그런 내용을 넣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의 발로일 것이다. 현수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만난 기분이 되어 약간은 착잡했다. 복안은 있지만 자신의 생각대로 되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드미트리와 예카테리나가 가고 난 이후 대한약품으로 전화를 걸었다.
“민윤서 사장님, 김현수입니다.”
“네, 김 사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우호지분이 확보됨에 따라 안정된 경영을 할 수 있게 되어 기분이 좋아졌는지 민윤서 사장의 목소리는 상당히 밝았다.
“대한약품 창고에 쌓여 있는 재고물량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 백신은 제외한 겁니다.”
“갑자기 재고는 왜……?”
혹시 최대주주로서의 경영 간섭인가 싶었는지 목소리가 금방 가라앉는다.
“방금 러시아로부터 대규모 오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한약품의 재고를 소진시키려 하는데 규모를 알 수 없어서 그러지요.”
“아! 그러세요? 그런데 대체 얼마나 큰 오퍼이기에 전체 재고를 묻는 겁니까? 솔직히 상당히 많거든요.”
현수의 얼굴에 개구진 웃음이 밴다.
“얼마 안 돼요. 미화로 5천만 달러거든요.”
“네에……? 어, 얼마요? 방금 5, 5천만 달러라고 한 겁니까?”
민 사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끝을 올린다. 그 장면이 충분히 상상되기에 현수는 또 한 번 개구진 웃음을 지었다.
“네, US 달러로 5천만 달러 맞습니다. 그러니 재고를 알려주세요. 설마 그보다 많은 재고가 있는 건 아니겠지요?”
대한약품의 주식을 100% 매입할 경우 256억 정도 된다. 그런데 5천만 달러는 563억원 정도 된다.
대한약품을 두 번 살 수 있는 금액도 넘는다.
2장 돈 벌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 알겠습니다. 앞으로 두 시간 내에 재고 파악하여 즉각 보고 드리겠습니다.”
“하하. 네에. 그럼 기다리지요. 그리고 앞으로 1년간 매달 5천만 달러어치씩 수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공장을 풀 가동해 주십시오.”
“아이고, 이를 말입니까? 우리 공장은 물론이고 옆의 공장들을 빌려서라도 대량생산해 내겠습니다.”
“네에, 하지만 품질에 각별히 유의해 주십시오.”
“그것도 걱정 마십시오. 24시간은 뻥이고 최소 12시간은 매일 지키고 서서 제대로 되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민 사장의 음성은 몹시 밝아졌다. 침체에 빠져 있던 회사가 드디어 긴 불황을 탈출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제 주식 값이 오르겠습니다.”
“그렇겠지요. 이 정도 주문이면 아마 왕창 오를 겁니다.”
“네에, 그래서 조금 더 사 모을 생각입니다.”
“하하! 네에. 확실하게 배당해 드리겠습니다.”
“네에. 이만 끊습니다.”
전화를 끊을 때 저쪽에서 웃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민윤서 사장이 웃는 소리이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사장님, 김수진 씨와 이지혜 씨가 귀사했는데 지금 들어오라고 할까요?
“아! 네에. 그러십시오.”
잠시 후 은정과 수진, 그리고 지혜가 현수 맞은편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지시사항을 메모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사장님!”
“아, 네에.”
셋이 들어와 앉을 때까지도 현수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이들이 착석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은정이 이를 일깨운 것이다.
“사장님! 지시사항을 말씀해 주세요.”
“아, 오늘은 새로운 지시사항이 있어 여러분을 부른 게 아닙니다. 지금부터 내가 여러분께 제안 하나를 하려 합니다. 잘 들어보시고 판단해 주십시오.”
“네, 말씀하세요.”
셋의 시선이 쏠리자 현수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여러분들에게 제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
여직원들은 웬 소린가 싶어 눈만 크게 떴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회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의 주식 가치가 상당히 저평가되어 있는데 곧 값이 오를 겁니다. 세 배까지는 모르겠지만 최소 두 배 이상은 오를 것이라 생각됩니다.”
“……!”
“이 회사가 어딘지 알려주면 주식을 사시겠습니까?”
“저어, 사장님! 그러고 싶지만 저흰 돈이 없어요.”
기회가 있어도 잡을 수 없는 상황임을 명확히 한 사람은 발랄한 성품의 이지혜이다.
현수는 잠시 여직원 셋을 바라보았다. 모두 고맙기는 하지만 능력이 없어 죄송하다는 표정이다.
“내가 여러분의 월급을 가불해 드리지요. 그럼 할 겁니까?”
현수가 말하려는 회사는 대한약품이다.
조만간 대단위 주문이 들어갈 것이고, 그것은 1년간 유지될 것이다. 따라서 주식값의 상승은 명약관화한 일이기에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송 변호사 등과 주식양도양수 계약을 맺기는 했으나 아직 명의변경이 완료된 시점이 아니다.
따라서 법에서 정한 내부자 거래에 해당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모두들 대답이 없다. 하나 답은 표정에 있었다.
은정의 눈은 벌써 습기로 그득했다. 현수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제안을 했는지 알아차린 때문이다.
수진과 지혜 역시 감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현수는 여직원들의 면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각자에게 3억 원을 대출해 드리지요. 주식 값은 금방 오를 겁니다. 여러분은 주식의 가치가 충분히 올랐다 생각하는 시점에 팔아서 원금만 갚으면 됩니다.”
“흐흑……! 사장님……!”
“……! 고맙습니다. 사장님!”
“사장님, 저 아무래도 제대로 취직한 거 같아요. 고맙습니다. 평생직장으로 알고 근무하겠습니다.”
이지혜는 확실히 하지원을 닮았다. 씩씩하면서도 발랄하고, 여린 마음을 가졌으며, 착한 성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