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좋아요. 그럼 이 실장님이 책임지고 대출 약정서를 작성해 오세요. 조금 전에 말한 대로 1년 이내에 원금만 갚으면 되는 것으로 작성하면 됩니다.”
현수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같이 일하는 직원들 모두 풍족한 삶을 살기 바라기 때문이다.
이실리프 무역상사는 신생 기업이다.
따라서 대기업에 근무하는 친구들과 만났을 때 상대적인 열등감을 느낄 수 있다.
대기업에서 제공하는 후생복지 혜택 이외에도 그곳에서 근무한다는 것만으로 받을 수 있는 프리미엄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은정, 수진, 지혜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 한다고 생각해 보자.
은행원은 이실리프 무역상사라는 듣보잡의 여직원인 셋에게 신용대출 통장을 만들어주지 않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재산세를 납부하는 보증인을 요구하거나, 보증보험 가입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금액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며, 대출 이율도 상당히 높을 것이다.
반면, 천지건설의 강연희나 조인경 대리가 은행엘 가면 대출 한도로 어느 정도를 원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또한 최저 대출 이율에 대한 설명도 해줄 것이다. 보증인이랄지 보증보험에 대한 이야긴 아예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이렇다는 것을 알기에 기회를 제공하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잠시 후, 은정이 약정서를 만들어왔다.
대출 금액은 일인당 3억 150만원이다. 대한약품의 주식 15만주를 살 수 있는 가격이다.
이 돈은 1년 이내에 상환하도록 되어 있다. 상환 시기는 여직원들이 정할 수 있다. 물론 원금만 갚는다.
만일 주식 가치가 폭락하여 매입가 이하가 되면 주식으로 반환해도 된다. 다시 말해 여직원들에겐 아무런 위험 부담이 없는 약정인 것이다.
셋 모두 사인을 해서 약정서를 현수에게 넘겼다.
잠시 후, 노트북이 펼쳐졌고 대한약품의 주식 거래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액면가 5,000원짜리 한 주당 가격은 2,010원이다.
현수는 일인당 15만주씩 매입토록 했다. 또한 본인 명의로 최대한 매입하여 추가로 153만주를 확보했다.
대한약품의 주식 발행 총수는 1,275만주이다.
최초 발행 주식은 200만주였는데 외형 불리기와 경영권 방어 등을 목적으로 유·무상 증자를 계속한 결과이다.
송 변호사 등으로부터 매입한 497만 2,500주에 추가로 매입한 153만주를 더하면 650만 2,500주가 된다.
정확히 51%의 지분을 갖게 된 것이다.
여기에 여직원들의 45만주와 민윤서 사장이 보유한 12% 지분까지 합치면 66.53% 지분율이 된다. 어느 누구도 경영권에 대해 가타부타를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제 나머지 주식은 전체 지분의 33.47%쯤 되는 426만 7,500주, 금액으론 85억 7,800만 원 정도뿐이다.
하루만에 이토록 많은 주식을 매입할 수 있었던 것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약정을 체결하고 난 직후, 민윤서 사장은 그간 결재를 미루고 있던 일을 진행할 것임을 통보했다.
이에 박 전무 일당이 지분율을 언급하며 결정을 만류했다. 정중한 표현이었으나 노골적인 반대였다.
이에 확실한 우호지분 39%를 확보했음을 통보했다.
다시 말해 지분율 51%가 자신의 뜻에 동의하니 까불지 말라는 뜻이다.
그간 박 전무 일당은 송 변호사 등 민 사장의 친구들과 은밀한 접촉을 시도한 바 있다. 그리곤 민 사장의 친구들에게 시세보다 10% 정도 값을 더 쳐주겠다는 유혹을 했다.
당연히 흔들렸다. 하나 송 변호사가 이들을 만류했다.
일순간의 이익이 오랜 친구와의 우정보다 먼저일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하여 친구들은 망설이는 중이다.
그러는 사이에 박 전무는 은밀한 루머를 퍼뜨렸다.
근원지는 알 수 없지만 내부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추정된 이것 때문에 주식가가 연일 하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째는 직원들의 급여가 늦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금 흐름이 원활치 못하여 두 달째 약 20일씩 늦게 급여가 지불된다는 헛소문이 번졌다.
다음 달엔 아예 급여를 지불하지 못할 상황이라는 소문도 났다. 이건 박 전무가 퍼뜨린 것이 아니라 소문이 번지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과장한 것이다.
둘째, 경영에 어려움을 겪기에 조만간 대규모 구조 조정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체 인원의 70% 정도가 감축 대상이다. 이 정도면 뼈대만 남기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회사가 극도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셋째, 이를 저지하기 위한 노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직장을 잃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넷째, 모든 금융권에서 대한약품에 대한 대출 중단 및 기대출된 것을 회수하러 나섰다는 것이다.
규모가 큰 재벌사라도 도산할 소문이다. 하물며 대한약품 같은 중소규모 제약사는 반드시 망하게 될 만한 루머이다.
이런 상황이기에 주식가가 연일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날이 떨어지는 주식가는 민 사장의 친구들을 흔들리게 했다. 하여 박 전무에게 주식을 팔겠다는 전화를 하려 했다.
더 늦기 전에 손절매4)를 하려 한 것이다.
이때 송 변호사가 전화를 했다. 보유 주식 전부를 좋은 가격에 황금으로 매입할 사람이 나타났다는 내용이다.
민 사장도 같이 있는 자리라기에 모두들 승낙했다,
친구도 잃지 않고, 손해도 덜 볼 거래이기 때문이다.
한편, 박 전무 일당이 이런 무리한 작전을 펼친 것은 단순히 경영권을 갖기 위함이 아니다.
일본 제약사인 도요신야쿠사(東洋新藥社)의 사장 요시무라 곤이치는 대한민국 제약시장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새로운 제약사를 설립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하여 한국의 여러 제약사들을 물망에 올려놓고 저울질을 했다. 그 결과 대한약품이 낙점되었다.
한국에 몇 없는 백신 제조를 하고 있으며, 향남 제약단지 내에 널찍한 부지를 가진 공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당지분을 보유한 박 전무 일당이 우호적인 까닭도 있다.
도요신야쿠사는 박 전무 일당에게 주당 5,000원씩 주식을 매수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아울러 경영권을 확보하게 되면 대표이사 자리에 앉혀준다는 당근도 제시했다.
물론 박 전무 일당의 휘하 이사들에게도 요직을 약속했다.
하나 그 기간은 도요신야쿠사에서 파견한 직원들이 확실한 현황 파악을 할 때까지이다.
박 전무는 최대주주에 의해 해임 당할 것이며, 휘하 이사들 역시 모두 내쫓김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대한약품은 한국 동양신약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될 예정이다. 대한민국의 토종 제약사 하나가 일본계 제약사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복안을 모르기에 박 전무 일당은 혈안이 되어 루머를 양산하고, 민 사장의 친구들을 쫓아다닌 것이다.
그러는 한편 일반인들이 보유한 나머지 지분을 매입하기 위해 가진 재산을 쏟아냈다.
민 사장의 친구들로부터 39%에 해당하는 주식을 매수하면 곧바로 도요신야쿠사가 이를 매입하기로 약정서까지 작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상황이기에 집을 담보 잡히는 무리수까지 두며 주식 매집에 나섰다.
그런데 민윤서 사장으로부터 39% 우호지분이 확실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시중의 모든 주식을 다 매입한다 하더라도 민 사장과 그 친구들이 보유한 51%를 확보 못하면 도요신야쿠사와의 약정은 물 건너간 것이다.
하여 은밀히 확인해 보았다. 그 결과 송 변호사를 비롯한 전원이 주식을 팔 수 없다는 답변을 했다.
도요신야쿠사와의 거래가 성사되지 못하면 대한약품은 자신들이 퍼뜨린 루머 때문에 망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그간 긁어모았던 주식까지 모두 내놓았다. 그걸 현수와 은정, 그리고 수진과 지혜가 매입한 것이다.
한편, 주식 시장에서는 갑작스런 투매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세력 간의 거래가 활발해지자 몇몇이 주식 매입에 동참했다.
주가 등락에 영향을 미치는 작전 세력간의 거래라 판단한 것이다. 하여 나머지 주식까지 모두 사지는 못한 것이다.
임원 주주는 자신이 보유한 지분에 변동이 있을 때 이를 즉각 신고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기에 박 전무 일당은 보유주식수가 제로가 되었음을 신고한다.
이를 알게 된 민 사장은 그들을 해임한다. 그리고 박 전무 일당은 평생 재취업을 하지 못한다.
얼마 후, 박 전무는 신문을 보다 뒷목 뻣뻣해짐을 느끼게 된다. 이는 박 전무 하나만의 일이 아니다. 도요신야쿠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임원들 전부의 공통점이다.
자신들이 헐값에 팔아 치웠던 주식이 날마다 상한가를 치고 있으니 어찌 목이 뻣뻣해지지 않겠는가!
홧술을 마시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전직 대한약품 임원들은 울화병에 걸려 한동안 고생한다.
반면, 환호작약하는 사람들도 있다.
민윤서 사장으로부터 39% 우호지분을 확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로부터 열흘쯤 지난 후 대한약품은 공시를 한다.
공시(Disclosure)란 사업 내용이나 재무 상황, 영업 실적 등 기업의 내용을 투자자 등 이해 관계자에게 알리는 제도이다.
주식의 가격과 거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사항에 관한 정보를 알림으로써 공정한 가격 형성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공시제도는 의무화된 제도이다.
민윤서 사장은 이실리프 무역상사와 500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또한, 익월부터 11개월간 매월 1,000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을 추가로 수출하는 계약을 체결했음도 공시했다.
이날로부터 대한약품의 주가는 상한가를 거듭했다.
매일 15% 정도씩 상승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내리 보름 동안 계속되었다.
그 결과 2,010원짜리 주식이 16,350으로 급등한다.
은정과 수진, 그리고 지혜는 각기 15만주씩 3억 150만원을 투자했다. 그런데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24억 525만원이란 거금이 되어버린다.
주식을 매입할 당시 낸 수수료는 45,220원이다.
셋은 한 달 후 주가가 정점이라 판단하여 일제히 매도하는데 이때의 수수료는 360,780원이다.
여기에 증권거래세로 7,215,750원을 낸다.
결국 셋이 거둔 수익은 각각 20억 6,100만 원 정도 된다.
연봉 5,000만 원 직장인이 한 푼도 쓰지 않고 41년 이상을 모아야 될 돈이 생긴 것이다.
주식을 매도한 돈이 통장에 입금되던 날 셋은 서로를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이제 더 이상 돈 때문에 고생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셋은 명품 백이랄지 비싼 옷을 사러 백화점을 드나들지 않는다. 그간 가난이 뭔지 너무도 처절히 경험했다. 다시는 그런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또 있다.
이런 기회를 준 현수를 극도로 떠받들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셋은 현수에게 거금을 운용할 능력이 없다면서 어찌해야 할지를 묻는다.
사실 현수 역시 자금을 운용해 본 경험이 없다. 하여 우리은행 양재북지점의 김영신 과장에게 SOS 신호를 보낸다.
그 결과 각종 펀드와 정기예금, 그리고 MMF, 방카슈랑스 등 장단기 자금 운용 방법을 알게 된다.
조언에 따라 은정과 수진, 그리고 지혜는 거의 대부분의 돈을 장기투자 하기로 결정한다. 매월 발생되는 이자 역시 재투자 대상이 되어 정기적금 등으로 운용되도록 한다.
그 결과 점점 더 많은 돈을 갖게 된다. 현수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을 일이다.
한편, 현수 역시 막대한 차익이 발생된다.
보유주식 650만 2,500주의 매입가는 130억 7,000만원 정도였다. 이것이 1,063억 1,500만원으로 수직 상승한다.
약 932억 4,500만 원이라는 엄청난 거금이 늘어난 것이다.
은정과 수진, 그리고 지혜가 매도한 45만주를 산 사람은 현수이다. 지분율을 조금 더 높이기 위함이다.
그 결과 현수의 주식 총수는 695만 2,500주가 된다. 그리고 셋이 주식을 판 다음 날에도 주가는 상승한다.
조금 더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대한약품의 주가는 278만 7천 원까지 오르게 된다. 무려 1,386배나 뻥튀기가 되는 것이다.
현수와 은정, 그리고 수진과 지혜만 웃은 게 아니다. 민윤서 사장 역시 환한 웃음을 짓는다.
주가는 상승하고 회사의 자금력이 빵빵해졌는데 어찌 웃지 않겠는가!
민 사장은 동분서주하며 주문 물량을 맞추기 위해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민 사장 이외에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수와 은정, 그리고 수진과 지혜가 대한약품의 발행 주식 전체의 15.53%에 해당하는 198만주를 매입하던 날 이를 작전이라 여겼던 이들이다. 이들 역시 엄청난 이익에 환호작약한다.
하나 주식을 내놓지는 않는다.
더 오를 것이란 판단을 내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측은 적중해서 더 많은 돈을 벌게 된다.
박 전무 일당만 불쌍하게 된 셈이다.
* * *
현수는 손에 쥐고 있는 쪽지를 보며 투덜거렸다.
“짜식! 이런 골목 속에 꽁꽁 숨어 있으니 어떻게 찾아?”
쪽지에는 ‘무적 1등 수학교습소‘라는 글씨와 주소가 쓰여 있다. 교육청까지 쫓아가서 알아온 내용이다.
이것을 얻기 위해 동사무소에서 졸업 증명서까지 발부받았다.
현수가 찾아온 곳은 상계4동 다세대 주택 밀집 지대이다. 골목을 누비며 여러 사람에게 물은 끝에 간신히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