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29화 (129/1,307)

# 129

“아! 저기 있군. 짜식, 간판이라도 좀 크게 만들지. 쯧쯧!”

주변 간판보다 크기가 작아 옹색해 보이는 간판에 나직이 혀를 찼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말소리가 흘러나온다. 대학 동창 민주영의 음성이다.

“자아, 칠판을 잘 봐. sin 90。는 1이야. cos 0。도 1이지.”

“……!”

교실 창에 선팅을 해놓아 안에 몇 녀석이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 수업 중이기에 기다리기로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안에 있는 녀석들이 중3이라는 것이다.직각삼각형의 각 변에 길이의 비에 대해 배우는 삼각비가 중3 과정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확실한 것은 이 녀석들이 아주 공부를 못하는 놈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삼각비는 3학년 2학기 과정이다. 그런데 오늘은 6월 23일 일요일이다. 선행학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의 공부도 따라가기 힘든 녀석들은 선행학습의 효과가 없다. 그렇기에 이 녀석들의 성적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추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주영의 설명은 이어졌다.

“자아, sin 30。는 2분의 1이야. 그럼 cos 60。는 얼마라고?”

“2분의 1이요.”

“우와, 현석이 너 이제 공부 시작한 거야? 그동안 속만 썩이고 공부 안 하더니……. 짜식! 고맙다. 공부를 시작해 줘서.”

대체 현석이라는 녀석의 평상시 수업 태도가 어땠기에 이러는지 알 수는 없다.

하나 확실한 것은 개판이었음이 짐작된다는 것이다.

물론 공부를 아주 안 하는 애들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자신도 한때 그랬던 때문이다.

“자아, sin 45。와 cos 45。는 그 값이 같아. 지난 시간에 수업한 건데 혹시 이거 기억하는 사람 있어?”

“알아요. 2분의 2잖아요.”

“오……! 건국이, 너도 드디어 공부 시작이냐? 고맙다. 좋아, 오늘 선생님 기분이 왕창 좋아졌다.”

“……!”

칭찬을 해줬음에도 어찌 된 녀석들인지 별다른 대꾸가 없다.

“자아, 이번엔 sin 60。와 cos 30。의 값이 같아. 이 값은?”

“2분의 3이요.”

“혀, 현석아! 너 오늘 못 먹을 거 먹고 왔냐? 왜 이렇게 달라졌어? 너 현석이 아니고 헌석이 아니면 현식이지? 그치? 원래는 외계인인데 현석이로 변장한 거지?”

“아이, 왜 놀려요? 저 마음잡았단 말이에요.”

드디어 대꾸를 한다. 근데 전혀 기분 나쁜 대꾸가 아니다.

“좋아, 좋아! 자 이제부터 내가 칠판에 뭘 쓸 거야. 너희는 이걸 보고 여기서 어떤 규칙 하나를 찾아내야 해. 알았지?”

아이들의 대꾸가 있기도 전에 민주영이 칠판에 뭔가를 쓰는 소리가 난다. 창문을 통해 슬쩍 바라보았다.

“자아, 칠판에 쓰인 것에서 어떤 규칙을 찾을 수 있을까?”

“선생님! 이거 맞추면 뭐 줘요?”

“뭐 주냐고? 으음, 좋아! 오늘 니들 수업 태도 좋았으니까 이거 맞추면 내가 피자 쏜다.”

“우와아아……! 정말이요?”

몇 놈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책상 두드리는 소리로 미루어 짐작컨대 적어도 여덟 놈은 있는 듯하다.

“그래. 그러니 규칙을 찾아봐.”

주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웬 녀석이 소리친다.

“선생님, 저요.”

“그래, 오씨 집안의 장남 건국이……! 알아냈어?”

“네, 앞에는 전부 사인이고 뒤는 전부 코사인이잖아요.”

“아이쿠, 두야! 얌마, 그게 규칙이야?”

“그렇잖아요. 잘 봐봐요, 앞은 사인, 뒤는 코사인……!”

“그래,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바란 답은 아냐. 혹시 헌석이 아니며 현식이가 찾았냐?”

“선생님, 제 이름은 현석이거든요, 임현석……! 맘 잡았단 말이에요. 그리고 규칙 찾았어요.”

“좋아, 말해봐. 어떤 규칙이지?”

“네, 앞 뒤의 각을 합치면 전부 90。예요.”

“오옷……!”

“맞았지요? 그쵸? 제가 맞춘 거죠?”

임현석이 신난다는 듯 소리쳤다. 이에 민주영이 잠시 뜸을 들인다. 그러더니 칠판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자아! 오늘 우리는 새로운 공식 하나를 발견했다. 난 이 공식을 임현석 공식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현석이가 발견했잖아. 안 그래?”

민주영의 말에 아이들이 일제히 책상을 두드리며 환호한다.

우다다다다다다다!

“우와와아아!”

“피자! 피자! 피자! 피자!”

“자아, 조용 조용! 피자는 조금 있다 먹여줄 테니 일단 수업에 집중해.”

“네에.”

조금 있다 먹을 게 온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이들은 금방 조용해진다.

같은 시각, 현수는 건너편에 보이는 피자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십여 분쯤 지나서 수업이 끝날 무렵이다.

삐이꺽―!

“피자 배달 왔습니다.”

“와아아아아아!”

“……!”

아이들은 환호했지만 민주영은 웬일인가 싶은 표정이다. 주문도 안 한 피자가 온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달 총각이 피자 묶음을 내려놓으며 내용물을 확인시킨다.

“갈릭 스케이크 라지 하나, 올라 스페인 라지 하나, 크리미 쉬림프 라지 하나. 스위트 히든 엣지 라지 하나. 그리고 콜라 큰 거 두 병. 합이 13만 1,600원입니다.”

민주영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아이들에게 사주려던 것은 가장 값이 싼 것이다. 그런데 배달 온 것은 가장 비싼 것들로만 왔다.

하나 애들 앞에서 어찌 무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거금을 지출해야 하는 것이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한편, 아이들은 집에서조차 먹어볼 수 없는 프리미엄 급 피자 향에 침을 질질 흘리는 중이다.

“어이, 배달 총각! 그거 내가 시킨 겁니다. 이리 오세요.”

“어라, 너는 현수……? 김현수?”

“그래, 인마. 잘 있었지?”

느닷없는 현수의 출현에 주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피자 값을 치렀다.

“선생님! 우리 이거 먹어도 돼요?”

“엉……? 어, 그, 그래!”

“우와와와! 먹자, 먹어!”

“후와아! 이 토핑 좀 봐! 끝내준다.”

아이들은 걸신 들린 양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야, 이렇게 세워둘 거야?”

“응? 그, 그래. 안으로 들어가자.”

주영의 안내로 들어간 곳은 교재 및 교구를 보관하고, 학부모 상담 용도도 만든 듯하다.

두 평 남짓한 방엔 책상 하나와 테이블 하나가 전부이다.

주영은 늘어져 있는 것들을 거듬거듬 치우며 물었다. 여전히 왼 팔을 못 쓰는 모양이다.

“어쩐 일이냐? 여기까지…….”

“어쩐 일은? 엉아가 너 보고 싶어서 왔지. 반갑다, 친구!”

현수가 주영을 와락 껴안았다. 주영은 제 몸을 내주고 있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를 가늠하는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오늘 수업 언제 끝나냐?”

“응? 끄, 끝났다. 방금 전 수업이 마지막이야.”

“야, 아직 아홉 시도 안 되었는데 벌써 끝나면 어떻게 해?”

“으응, 애들이 별로 없거든.”

주영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교습소를 운영하기는 하지만 큰돈을 벌기는커녕 현상 유지에도 바쁜 때문이다.

“그나저나 수학에 언제부터 임현석 공식이 생겼냐?”

“아, 그거? 요즘 애들을 그렇게라도 관심을 끌어주지 않으면 공부 안 한다.”

“짜식, 그래도 제법 수업 연구는 하는 모양이네.”

“그래, 인마! 해야지. 안 하면 현상 유지도 힘들다. 요즘!”

“나도 대강은 안다. 밤 10시 이후 수업 금지, 방과 후 학교, 강제 야간 자율 학습 등으로 학원들 먹고 살기 힘들어진 거.”

“보습학원들도 힘들어서 근처의 몇 군데가 문 닫았어. 나는 그나마 덩치가 작아서 근근이 버티는 중이다. 내 월급만 포기하면 되니까.”

“하여간 엄살은……!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 한잔해야지?”

“그럼! 근데 나 돈 못 번다.”

“짜식! 엉아가 산다. 돈 걱정 말고 마시러 가자.”

“그, 그래!”

주영은 약간 어정쩡한 표정이다. 바깥에 더러워진 교실 때문인 듯싶다.

“야! 교실은 내일 치워도 되잖아.”

“그래, 알았어.”

3장 돌팔이, 기적을 일으키다.

둘이 택시까지 타고 간 집은 장위동에 위치한 유성집이란 곳이다. 참숯구이 한우 등심 전문점이다.

“야, 여기 비싸다.”

400g에 56,000원이란 메뉴를 보고 주영이 옷깃을 잡아당긴다. 이런 곳에선 먹어본 적도 없다는 뜻이다.

“괜찮아. 엉아, 성공했다. 너한테 이 정도 살 정도는 돼! 그러니 걱정 말고 먹자.”

“나중에 계산 많이 나왔다고 뭐라 하지 마라.”

“그래, 인마! 많이 먹기나 해라.”

자리에 앉아 주문하자 일사천리로 세팅이 끝났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숯불에 한우 등심을 올려놓자 특유의 소리와 냄새가 난다.

“크으으, 죽인다! 그런 의미에서 한 잔.”

“오케이!”

챙―!

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리곤 맛 좋고, 향도 좋은 한우 등심 한 점을 넣고 씹었다.

맛있는 육즙이 과연 소문대로이다.

“그간 어케 살았냐? 우리 졸업하고 처음이잖냐.”

“그래. 오랜만이지. 난 학교를 졸업하고…….”

주영의 인생 역정이 시작되었다.

4년제 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했지만 3류 대학 출신인지라 주영의 앞날은 밝지 못했다. 게다가 한쪽 팔을 못 쓰게 되었는지라 국방부에서도 초청하지 않았다.

주영은 정상적인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한쪽 팔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정상이건만 어느 누구도 정상인 대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반년 가까이 병석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이혼한 후 얻은 마음의 병 때문에 마신 술로 인한 간암이 원인이다. 본인이 세상을 살아갈 의지가 없다면서 항암 치료를 거부한 결과이다.

장남이자 외아들인 주영은 혼자서 장례를 치렀다. 그날 이후 지금껏 외톨이가 되었다.

작은 아버지와 고모도 장례식 이후엔 아예 연락을 끊었다.

주영은 전세 보증금을 빼서 상계동으로 이사했다. 그리곤 그 돈으로 원룸을 얻었고, 교습소를 차렸다.

일반 보습학원에서 경험이라도 얻었다면 어려움이 덜했을 것이다. 하나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몸인지라 학원 취직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수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아이들이 벌떼처럼 몰려드는 것도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모든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다 하여 잘 가르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터득했다.

돈 몇 푼 더 벌어보겠다고 심야 수업을 하다 걸려 적지 않은 벌금도 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당연히 여자친구는 한 번도 없었다. 한쪽 팔을 못 쓰는 데다 돈도 못 벌고, 모아놓은 돈도 없으며, 집안 배경도 전혀 없다. 누가 주영과 사귀어주겠는가!

어쨌거나 주영은 여전히 벌어놓은 돈 없고, 벌이도 시원치 않은 장래가 전혀 밝지 않은 청년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마친 주영이 술잔을 비웠다.

“난 이렇게 살았다. 너는……?”

“난, 학교 졸업하고 두 달 있다가 군대에 갔잖아. 그때…….”

현수의 거짓말이 시작되었다.

있지도 않은 군대 동기가 등장했다. 성은 유씨이며, 드라마 허준에서 스승으로 나왔던 유의태 의원의 후손이다. 또한 이 녀석의 조부는 일제시대 때 명의로 소문났던 사람이다.

아무튼 이놈과 둘이 휴가를 얻어 바다로 놀러 갔다.

그러다 발에 쥐가 나는 바람에 물에 빠져서 익사할 상황이 되었다. 이때 용감한 현수가 뛰어들어 멋지게 구해냈다.

동기를 구해낸 공으로 그의 조부로부터 침술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곤 제대를 했다.

천지건설에 지원서를 냈고, 뛰어난 성적을 얻어 입사하게 되었다. 회사에선 유능한 인재에게 외국 경험을 쌓게 하려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등으로의 지사 발령을 내려 했다.

하나 현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 콩고민주공화국을 택했다. 발전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라 하였다.

하여간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도 한다.

아무튼 콩고민주공과국의 내무장관과 우연히 연결되어 그의 지병을 치료해 주었다.

그 결과 잉가댐 및 발전소 공사를 따게 되어 일약 과장으로 승진했음을 이야기했다. 큰 줄거리만 사실이고, 곁가지 대부분은 거짓말을 교묘히 섞은 것이다.

주영은 한편의 활극을 감상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몸만 성하다면 자신이 했으면 할 일을 현수가 했기 때문이다.

“근데 너 손 좀 줘봐라.”

“왜?”

“인마, 명의께서 진맥하자고 하면 찍소리 하지 말고 손목 내놓는 게 환자 된 도리야.”

“그, 그래.”

현수는 짐짓 맥문을 쥐고 진맥하는 척했다.

“마나 디텍션!”

나직이 속삭이자 마나가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하나 주영은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몸인지라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예상대로 왼쪽 팔에 문제가 있다.

사고 당시 주영은 일곱 군데나 찔리거나 베였다.

응급수술을 담당했던 의사는 근육과 힘줄, 그리고 혈관을 이어주는 수술만 하고 봉합했다.

나머진 인체의 자연치유력에 맡긴 것이다.

검색해 본 결과 주영의 팔에는 마나 통로가 없다.

조폭이 휘두른 칼에 그 통로가 베어졌는데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때문이다.

마나의 움직임은 위장과 머리에서 정체되어 있었다. 하여 현수는 맥문을 놓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 밤에 잠 잘 못 자지? 그리고 소화도 제대로 안 되고. 가끔 머리도 아프지? 탈모도 많은 편이고.”

“어, 어떻게 알았냐?”

주영은 현수가 말한 모든 증상을 다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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