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32화 (132/1,307)

# 132

메모를 마친 현수가 밖으로 나왔다.

“이 실장님, 그리고 김수진 씨, 이지혜 씨! 지금 꼭 해야 할 업무가 있습니까?”

“……!”

“시간을 다투는 업무가 아니라면 지금 나하고 어딜 좀 가야 될 것 같아요.”

“사장님, 무슨 일인에요?”

“혹시 듀 닥터라는 화장품을 알아요?”

“어머, 저 그거 알아요. 되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김수진의 말에 은정과 지혜가 그러냐는 눈빛을 보낸다.

“우리 사촌 언니가 그걸 사서 썼는데 효능이 끝내준대. 얼마나 좋은지 얼굴이 아기 피부처럼 보드랍대.”

“정말……?”

지혜의 반문에 수진이 말하려 할 때 현수가 입을 열었다.

“지금 그거 실제로 좋은지 어떤지 확인하러 갈 겁니다. 다들 시간 돼요?”

“물론이에요. 사장님!”

넷이 간 곳은 태을제약 사무실 아래층에 있는 코스메틱 센터였다. 화장품 회사답게 화려한 인테리어로 치장되어 있다.

“어서 오세요. 김현수 사장님, 이은정 실장님!”

“어머, 이예원 차장님!”

“오랜만입니다. 이 차장님!”

“네에, 정말 반갑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저희 회사 김수진 사원과 이지혜 사원이에요. 오늘 듀 닥터를 체험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네, 그럼 이쪽으로…….”

이예원 판촉실장이 여직원들을 안내해 들어간 곳은 남성출입금지 구역이라 쓰여 있었다.

“쩌업……!”

“호호,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니 사장님은 저랑 같이 있어요.”

“네, 그런데 언제 이리로 오신 겁니까?”

“보름쯤 되었어요. 근데 실적이 없어서…….”

“무슨 말씀을. 이 실장님 능력있는 분이잖아요.”

현수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은정과 함께 태을제약을 찾아갔을 때 이예원 영업차장이 둘을 응대했다. 그리곤 아주 좋은 분위기에서 납품 계약을 체결했다. 다른 회사처럼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 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있는 것을 툭 터놓고, 원가가 이러니 이 정도 가격까지 줄 수 있다, 그러니 계약하자고 했다.

그때 현수는 환히 웃으며 단번에 도장을 찍어줬다.

태을제약에선 듣도 보도 못하던 이름도 없는 조그만 무역상사와의 계약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하나 약품이 출고된 날 전액 현금으로 대금이 입금되자 모든 의구심을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전의 두 배가 넘는 물량 주문이 들어왔다. 그것도 납품과 동시에 현금으로 결제되었다.

이 일로 이예원 영업차장은 사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고, 금일봉에 이어 휴가까지 얻는 일석삼조를 경험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뛰어난 능력으로 새로 런칭된 듀 닥터를 알려보라는 인사명령이 떨어졌다.

판촉실장은 부장급이니 승진된 셈이다. 하나 의약품과 화장품은 그 대상 자체가 다르다.

의약품은 의사와 약사, 그리고 병원 상대이다. 하나 화장품은 국민 전체가 대상이다.

게다가 화장품 업계 그 경쟁이 너무도 치열하다. 하여 혹자는 레드 오션이라는 표현을 쓴다.

경쟁업체의 상품 또한 뛰어난 효능을 지니고 있기에 하루 종일 텔레비전으로 광고하지 않는 이상 파격적인 매출 신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여 난감해하던 차이다. 뭔가 돌파구가 있지 않으면 힘들겠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도 받았다.

그러던 차에 현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실 듀 닥터는 상대적으로 고가이다. 게다가 콩고민주공화국의 흑인여성들에겐 별로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쪽은 피부 트러블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수의 방문을 흔쾌히 허락한 것은 이전에 입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함이다.

“사장님, 이전 사장님 덕에 받았던 표창장과 금일봉, 그리고 휴가에 대한 제 성의입니다. 약소하지만 받아주세요.”

이예원 실장이 내민 것은 듀 닥터 다섯 세트였다. 돈으로 치면 상당한 고가이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하면서 받을 줄 알았죠? 하하, 고맙습니다만 마음만 받을게요.”

“아니에요. 안 받으시면 제가 섭섭해요. 그러니 받아서 아는 분께 주세요. 대신 저희 제품 선전해 줄 능력 있는 분에게만 주세요. 아셨죠?”

“하하, 역시 대단한 이 실장님입니다. 알겠습니다. 고맙게 잘 받겠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알기에 소모적인 밀고 당기기를 하지 않았다.

현수는 그것 가운데 하나를 개봉하여 설명서를 읽어보았다. 효능에 대해 뭐가 써놓았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설명서엔 한글과 영어, 그리고 일본어와 지나어만 있다.

“실장님! 이거 다른 나라 말로는 왜 안 써놨습니까?”

“아직 초창기라 그래요.”

“그래요? 그럼 노트북을 주십시오. 제가 다른 나라 말 설명서를 써드릴 테니까요.”

잠시 후, 이예원 실장을 비롯한 판촉실 직원들의 눈이 하나같이 휘둥그레졌다.

사전도 없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베트남어, 태국어, 아랍어, 힌디어 사용설명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나, 맙소사!”

“끄으응!”

“우와아아!”

듀 닥터 직원 모두 탄성을 낸다. 이 실장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젊으신데 정말 대단하세요.”

“하하, 네에. 제가 외국어에 관심이 좀 많았거든요.”

“그래도 이렇게 설명서를 만들어주시니…….”

“사실은 제가 필요해서 그런 겁니다. 듀 닥터를 러시아에 수출할 생각이거든요.”

현수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예원 실장의 머릿속엔 빙고판이 그려졌다. 그런데 가로, 세로 및 대각선까지 모두 줄이 그어진 올 빙고판이다.

‘빙고!’라는 울림이 순간적으로 귀에 들리는 듯하다.

“이은정 실장님, 샘플 넉넉히 넣어드렸어요.”

“네, 고맙습니다.”

은정은 이예원 실장에게 윙크를 했다. 뒷일은 내게 맡기라는 의미이다. 수진과 지혜 역시 상당히 기분 좋은 듯하다.

생각했던 것 이상의 효능을 몸으로 느낀 때문이다.

현수의 차엔 감사의 뜻으로 이 실장이 준 다섯 세트 이외에 열 세트가 더 실렸다. 드모비치 상사로 보낼 샘플이다.

이동하는 동안 현수는 효과가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얼굴에 다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여직원들이 서둘러 올라갔다. 남은 업무를 보기 위함이다.

이때 전화가 진동을 한다.

부우우웅! 부우우우웅!

“어, 그래! 경빈이냐?”

“네, 형님! 지금 어디 계세요?”

“나? 내 사무실에. 근데 왜?”

“형님, 여기 놈이 나타났어요.”

“뭐……? 내 금방 갈 테니 붙잡아 놔. 알았지?”

차를 몰고 백두빌딩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퇴근 시간과 맞물렸다.

차를 아무 데나 세워두고 플라이 마법이라도 써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 하나 볼일 보자고 아무 데나 차를 세워둘 수는 없다. 하여 주차장을 찾았다. 그런데 다 만차라고 한다.

할 수 없이 답답한 흐름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가는 중이니까 꽉 잡아놔!

문자를 보내자 금방 답신이 온다.

네 형님! 빨리 오시기나 하세요.

백두마트는 상장 기업이다. 따라서 사규에 따라 일이 진행된다. 유진기는 지난주에 휴가를 냈다.

휴가 사유는 조부상이다. 그런데 오늘 휴가를 연장하러 왔다고 한다.

사규에 따라 휴가가 끝나는 오늘 안에 사인해서 연장하지 않으면 내일 아침 일단 출근해야 한다.

그리곤 처음부터 다시 휴가 결재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본사 사무실에 나왔기에 현수에게 전화한 것이다.

형님! 어디까지 오셨습니까?

조금만 더 가면 돼! 그러니 꼭 잡아놔.

어서 오시기나 하세요. 빨리요!

평상시의 현수는 운전할 때 난폭운전을 하지 않는다.

무리한 차선 변경 역시 당연히 하지 않는다. 교차로에 진입하지 않은 경우엔 노란 신호가 보이면 즉시 멈춘다.

이런 운전 습관을 가졌기에 면허를 딴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통경찰을 만나 낯을 붉힌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평소의 현수가 아니다.

조금만 틈이 보이면 일단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이미 노란 불이 들어와 있더라도 무리한 교차로 진입을 시도했다.

그럼에도 목적지에 쉽게 당도하지 못했다.

이제 다 왔다. 백두빌딩이 보여.

늦었습니다. 형님! 놈이 급하다고 갔습니다.

현수가 백두빌딩에 당도한 것은 최종 문자 이후 15분이나 지나서였다. 교차로 하나를 건너는 데 걸린 시간이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미안하다. 빨리 온다고 했는데 퇴근 시간이라…….”

“할 수 없죠. 이 시간엔 늘 그렇잖아요. 참, 혹시 몰라 비서실 김 대리로 하여금 미행하도록 했어요.”

“그래? 그거 잘 했네. 근데 미행 잘 할까?”

“그거야 모르죠. 하여간 조금 기다려 봐요.”

“그래, 할 수 없지.”

“그나저나 형님! 저 형님하고 동서지간이 되고 싶습니다.”

“동서지간? 나 아직 장가도 안 갔는데?”

“에이, 왜 이러세요? 저도 방송 봅니다. 그리고 그 이수연 씨 열렬한 팬이예요. 형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뭐야……?”

현수가 뭐라 하려는 순간 경빈의 전화가 진동을 한다.

“네, 네, 네! 알았습니다. 네, 할 수 없죠.”

“……!”

“형님! 지하철이 너무 혼잡스러워서 놓쳤답니다.”

“할 수 없지. 사흘 뒤 다시 와야지. 그럼 난 이만 간다.”

“네, 형님! 안녕히 가십시오. 형님!”

경빈의 음성에 놀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본다. 그 중 백두그룹 여직원들도 상당수 있었다.

“어머! 저분, 백두마트 상무님 아니니?”

“그래그래! 근데 왜 저런데? 저거 조폭식 인사 아니니?”

“맞아! 허억! 그럼 우리 회사 조폭 거야?”

“에이, 설마! 재벌 3세가 뭐가 아쉬워서 조폭을 하겠냐?”

“그래, 그렇긴 해! 근데 저 사람은 누구니? 조 상무님 형은 아닌데. 높은 사람인가?”

“글쎄……?”

여직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경빈은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이수연과 어쩌면 인연이 닿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 심리 때문이다.

“형님! 영원히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형님!”

현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러워 얼른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경빈은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

하나 이현우가 먼저 현수에게 이수연 씨를 소개시켜 달라고 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차고에서 시동을 걸려던 순간 민주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짜식! 벌써 결정한 거냐? 빨라서 좋다. 언제부터 나올래?”

“현수야!”

현수는 주영의 심상치 않은 음성에 얼른 낯을 굳혔다.

“왜, 인마!”

“너, 나 좀 도와줘야겠다. 지금 이쪽으로 와주면 안 되겠냐?”

“왜……? 무슨 일인데?”

“그건 와보면 알아. 너, 나 좀 도와줘라. 꼭이다.”

“알았다. 지금 갈게. 한데 지금 퇴근 시간이라 시간이 조금 걸릴지도 몰라. 알았지?”

“그래, 고맙다. 조심해서 와라.”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주영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가슴이 답답했다.

무적 1등 교습소 인근에 차를 댄 현수는 무거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교실 근처에 당도하니 주영의 음성이 들린다.

“자아, 오늘은 재미있는 얘기를 해줄 거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봐.”

“선생님! 또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이야길 하려고 그러는 거죠? 그쵸? 그럼 안 들어요.”

“아냐, 인마! 오늘은 그 얘기 아니니까 잘 들어봐. 알았어?”

“네에!”

공부가 아니라니까 힘차게 대답하는 듯하다.

현수는 주영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업은 진행되고 있었다.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그러니까 서기 1700년 대에 오일러라는 거지가 있었어.”

“보일러요?”

“아니, 오일러라고 하셨잖아!”

“얌마, 넌 귓구멍에 안개 꼈냐?”

“그래, 넌 왜 맨날 말귀를 못 알아듣냐?”

“그러게. 선생님 말씀하실 때 잘 들어. 중간에 잡음 넣지 말고. 알았지?”

보일러라는 소리를 했던 아이가 집단적으로 당하고 있다.

평상시 수업 시간에도 쓸데없는 말을 해서 시간 잡아먹는 녀석의 전형인지라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이때 주영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 거지의 정확한 이름은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야. 스위스 사람이지.”

“그런데요? 웬 스위스 거지 이야기예요?”

“그건 들어보면 알아. 아무튼 그 사람은 원래 거지였어.”

“거지요?”

“그래. 깡통 하나 꺼내놓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서 동냥을 받아서 먹고사는…….”

“에이, 또 거지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 되었다는 이야길 하려는 거죠?”

“흐음, 그건 일단 얘기를 들어봐. 너희들 거지가 동냥할 때 무슨 일을 하는지 아니?”

“아뇨!”

“거지가 무슨 일을 해요? 거진데…….”

“그래, 맞았다. 거지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지. 오일러라는 사람도 그랬어. 깡통 하나 꺼내놓고 앉아서는 작대기로 땅바닥에 낙서 비슷한 것만 했지. 그러다가 수학자가 되었어.”

“에이, 말도 안 돼요. 낙서하다가 수학자가 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오일러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나오는데? 하여간 이 오일러가 나중에 훌륭한 수학자가 되어서 너희 같은 아이들 앞에서 강연하게 되었어.”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요?”

“어! 어떻게 알았지? 그래, 맞아. 오일러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진짜 열심히 하라고 했어.”

“거봐. 결국엔 이 얘기라니까.”

누군가의 잡설에도 주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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