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35화 (135/1,307)

# 135

“사, 상부의 허락이 있어야…….”

드미트리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현수가 말을 자른 때문이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 허가를 받아주십시오.”

현수가 노트북을 바라본다. 지금 즉시 메신저로 연락해 보라는 소리이다. 하여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리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 때 드미트리가 입을 연다.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컨테이너를 봉인하기 전에 김현수 사장님이 확인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좋군요. 그럼 그 일은 일단락된 것으로 합시다.”

“네.”

“이걸 받으십시오.”

“이게 뭡니까?”

“한국의 태을제약에서 만든 기능성 화장품 듀 닥터의 샘플 열 세트입니다. 이걸 드모비치 상사로 보내주십시오. 이걸 수출하고 싶습니다.”

“네, DHL로 발송하지요.”

“그리고 이건 한국산 수제 스포츠카 스피드와 이륜, 삼륜 전기자전거 엘딕에 관한 브로셔입니다.”

“아! 스피드라면 압니다. 얼마 전 우연히 방송에서 보았습니다. 탑기어 코리아란 프로그램이더군요. 나도 하나 갖고 싶을 정도로 아주 잘 빠진 차였습니다.”

“그래요?”

“그 정도면 모스크바의 부자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 겁니다.”

“엘딕은 어떻습니까?”

6장 이게 꿈은 아니죠?

현수가 준 브로셔를 펼쳐 든 드미트리는 잠시 말을 잊었다. 자전거라 들었는데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역삼륜으로 만든 것은 자전거라기보다는 새로운 유형의 탈 것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드미트리가 다시 키보드 워리어로 변신했다. 신나게 자판을 두드리고는 잠시 기다렸다.

“스피드, 엘딕 모두 승인되었습니다. 원하는 물량만큼 보내도 된답니다.”

“어떻게 그리 빨리……?”

이번엔 현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있는 울림 네트워크 홈페이지 주소를 알려주었습니다. 보스께서 흡족해하신답니다.”

“흐음, 그렇군요.”

“오늘의 만남, 참으로 유익했습니다.”

“나 역시……! 듀 닥터에 대한 결정을 가급적 빨리 내려주셔야 합니다. 컨테이너에 담을 화물이 모두 준비되면 연락주십시오.”

“물론입니다.”

드미트리가 간 이후 현수는 한참을 고심했다.

아까 컨테이너가 무려 100개 가까이 늘어나게 되었다는 말을 할 때 반발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안에 담길 화기들이다.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콩고민주공화국의 군인 내지는 민간인이 죽을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

가에탄 카구지에게 은밀히 정보를 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 가장 먼저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처절한 보복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밀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대책을 세워야겠기에 현수의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팠다.

다들 퇴근한 이후까지 깊은 상념에 잠겼던 현수는 사무실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곤 앱솔루트 배리어를 치고, 타임 딜레이 마법을 구현시켰다. 또한, 마나 집적진이 그려진 스테인리스 철판 위에서 마나를 모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전 6시 무렵 결계가 해제되었다.

아래층에 아직 주인집이 입주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마나여, 나를 아르센 대륙으로……!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르릉―!

* * *

“역시 서늘하군.”

현수는 아공간에 담긴 의복을 꺼내 걸쳤다. 아르센 대륙의 평민들이 즐겨 입는 평범한 복장이다. 특히 위에 걸친 튜닉7)은 누가 봐도 평민임을 나타낼 정도로 평범한 것이다.

계산대로라면 오늘은 아르센력 2855년 4월 20일이다.

“아! 백작님, 오셨습니까? 한데 의복이…….”

“그냥, 이게 편해서.”

화려한 예복을 벗고 평범한 튜닉을 걸쳤건만 얀센은 단번에 알아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물었다.

“카이로시아는?”

“아가씨는 아직 기침 전입니다.”

“그래? 알겠네.”

계단을 딛고 이 층에 오르니 사내 넷이 보인다. 둘은 이번에 구해온 이레나 상단 소속 상인이고, 나머지 둘은 초면이다. 하나 걸치고 있는 의복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용병인 듯싶다.

“누구냐? 여긴 출입이 제한된 곳이다.”

“아! 비켜서시게. 하인스 백작님이시네.”

“헉! 죄, 죄송합니다!”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청년이 고위 귀족인 백작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현수는 부러 오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카이로시아는……?”

“지부장님은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들어가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상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입구를 막고 있던 용병 둘이 옆으로 비켜선다. 현수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갔다.

숲 속의 잠자는 미녀! 아니, 침대 속의 잠든 천사가 보인다.

고초를 당했건만 카이로시아의 미모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오히려 창백한 아름다움이 더해졌을 뿐이다.

현수는 카이로시아의 체내가 마나 불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기에 서둘러 마나 포션을 꺼냈다. 여섯 병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곤 확실한 효과를 보기 위해 천천히 이를 복용시켰다. 물론 목울대를 부드럽게 만져주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웨이크!”

마법이 구현되자 카이로시아의 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린다. 그리곤 잠시 깜박이는가 싶더니 별빛 같은 눈빛이 쏟아져 나온다.

“으으응! 여, 여긴……?”

현수는 문득 개구진 장난기가 돋았다.

“아, 로시아. 당신도 여기에 온 것이오?”

“네……? 무슨 말씀이세요?”

“로시아. 여기는 천국이오. 죽은 이들만 오는 곳이야. 그런데 로시아가 여길 왜 왔소?”

“그, 그럼 제가 결국 굶어죽은 건가요? 그래요? 근데 왜 배가 하나도 안 고프죠?”

잠들기 전에 오뚜기 3분 쇠고기 죽을 세 개나 먹고 잤으니 배가 고플 리 없다.

현수는 내친 김에 장난을 조금 더 치기로 했다.

“여기선 그런 걸 못 느끼나 보오. 근데, 로시아 당신은 그렇게도 배가 고팠소?”

“아아! 제가 정녕 굶어죽었단 말인가요? 그런가요? 백작님에게 시집도 못 가보고……. 흐흑! 억울해요.”

“뭐가 그리 억울하오?”

“저, 정말 백작님을 존경하고 사랑했어요. 백작님과 맺어지길 너무도 간절히 원했건만…….”

“아! 그랬구려.”

“백작님, 우리 내세에 다시 태어나면 그때는 꼭 맺어져요. 그러니 절 잊지 마셔요.”

“로시아……!”

“그런데 백작님의 옷이 왜 이래요?”

“로시아! 아무래도 난 평민으로 환생할 것 같소.”

“그럼 저도 평민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 거예요.”

“로시아……! 평민의 삶이 어떤지 정녕 몰라서 하는 말이오?”

“아뇨. 알아요. 제가 왜 모르겠어요. 귀족에 비하면 거의 짐승 같은 삶이죠.”

“그런데도 평민으로 환생하고 싶소?”

“네, 저는 다시 태어나도 백작님과 일생을 같이 하고 싶어요. 그러니 백작님! 환생하더라도 저를 잊지 마셔요.”

현수는 카이로시아의 처연한 표정과 음색에 더 이상의 장난을 할 수 없었다. 인격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로시아! 미안하오. 내 잠시 당신을 속였소.”

“네? 그게 무슨……?”

“어서 미망에서 깨어나시오.”

“네? 그럼……! 백작님! 아아! 이게 현실이군요. 사랑해요. 이 목숨 다 바쳐서 백작님을 사랑해요.”

“로시아……!”

현수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여인의 몸을 안았다. 조금의 엉큼한 마음도 없는 순수한 감동의 포옹이다.

“흐흑! 백작님, 이게 꿈은 아니죠? 고마워요! 흐흐흑!”

이제야 온전한 기억이 돌아온 듯하다.

현수는 눈물 흘리는 카이로시아의 교구를 보듬어안은 채 부드럽게 다독였다. 그러는 한편 마나 디텍션 마법으로 카이로시아의 체내를 점검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씩 풀리는 듯하다. 다시 말해 모든 면이 정상이다.

잠시 후, 현수의 품에서 떨어진 카이로시아는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었다. 이에 현수는 반쯤 거짓말을 섞어 상황을 설명했다. 이실리프 마법사라는 말은 아직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시아! 배고프지 않소?”

“그러고 보니 조금 고픈 것 같기도 해요.”

“그럼 내려가서 로사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달라고 합시다.”

“네에. 백작님!”

며칠 굶느라 약간 여윈 로시아가 방긋 웃음을 짓는다. 사랑하는 님과 함께 있게 되어 행복감을 느낀 때문이다.

문을 열자 마땅히 있어야 할 호위무사 등이 보이지 않는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주기 위해 철수한 것이다.

하인스 백작에게 뛰어난 실력이 있으므로 자신들이 있으나마나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로시아! 몸이 불편하면 내게 기대시오.”

“네, 백작님!”

로시아가 기다렸다는 듯 팔짱을 꼈다. 현수는 부축하려는 마음으로 그녀의 잘록한 허리에 손을 둘렀다.

“고마워요!”

“고맙긴, 당연한 일을……. 그나저나 계단을 딛고 내려갈 수 있겠소?”

“네에. 백작님만 계시면 전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절 버리지 마셔요.”

“……! 내가 왜 로시아를 버리겠소?”

“백작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 백작님의 반려가 되고 싶어요. 언제든 마음이 내키시면 저를 취하셔도 돼요.”

로시아는 심하게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속삭였다. 바람도 없건만 하늘거리는 귀밑머리가 너무도 섹시했다.

“로시아……!”

현수가 말을 하려던 찰나 사람들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지부장님의 무사 귀환을 감축드립니다.”

“지부장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이레나 상단 만세! 지부장님 만세!”

“와아아! 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빨랑 결혼하십시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두 분은 만난 지 이제 겨우 한 달밖에 안 되셨어. 그런데 결혼은 무슨…….”

“얌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저기 지부장님을 봐라. 얼마나 행복한 모습이냐?”

“맞다. 두 분은 얼른 결혼하십시오.”

“와와와! 결혼해! 결혼해! 결혼해!”

박자까지 맞춰 일제히 떠드는 사람들은 전원이 이레나 상단 소속 상인 및 호위무사 등이다.

이들은 코찔찔이 세실리아의 자세한 설명을 들어 둘이 이미 동침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토록 장난스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들의 출현에 부끄러워하던 카이로시아가 계단의 난간을 붙잡고 섰다. 그리곤 한 손을 들어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장내는 삽시간에 조용해진다. 아르센 대륙의 상단은 거의 군사 조직에 준하는 규율과 위계 질서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개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카이로시아는 이곳 미판테 왕국에 세워진 테세린 지부의 장이다.

그렇기에 손짓을 하자 즉각 고요해진 것이다.

“먼저, 여러분들의 환영에 깊은 감사드려요.”

카이로시아는 공식적인 자리이기에 높임말을 썼다.

“제 옆에 계시는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멀린 백작님 덕분에 유카리안 영지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짝짝짝―!

카이로시아가 현수를 바라보며 박수를 치자 밑에 있던 인원 전부가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낸다.

“와아아아! 고맙습니다. 백작님!”

짜짜짜짜짜짜짜짜짜짝……!

수많은 박수 소리에 이번엔 현수의 손이 진정하라는 듯 위아래로 흔들렸다. 즉시 조용해진다.

카이로시아는 지부의 장이므로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며, 현수는 제국의 백작이므로 명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너무 늦지 않은 시각에 당도하여 여러분들을 구할 수 있었다. 참으로 다행하다 여긴다.”

무뚝뚝한 소감이지만 일제히 환호한다.

“와아아! 감사합니다. 백작님!”

일제히 환호했다. 그러자 카이로시아가 또 진정하라고 한다.

모두의 입이 다물리고, 시선마저 한 몸에 부어지기까지 대략 20초쯤 걸렸다. 진정시키고는 정작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바라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카이로시아 에델만 드 로이어는 아르센력 2855년 4월 20일인 오늘!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멀린 백작님의 반려가 되고자 굳은 결심을 했답니다.”

아르센 대륙 역시 여자가 남자에게 청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오늘 카이로시아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뜻을 밝혔다.

명예를 중히 여기는 귀족가의 일원이기에 현수와 맺어지지 못한다면 평생 고독하게 살아야 할 발언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상단 사람 전부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이로시아의 발언은 이어졌다.

“아직 승낙 받지 못했지만 여러분은 제 곁의 백작님을 뵐 때 지부장인 저보다 더 높은 분으로 여기시길 바랍니다.”

“로시아……!”

현수가 제지하려 했을 때 발언은 이미 끝났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현수에게 쏠렸다.

지부장님의 청혼을 받아들이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현수는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나 어찌 부정하거나 불편한 기색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랬다간 카이로시아의 체면이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하는 잔인한 짓이다.

할 수 없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때 카이로시아가 팔짱을 낀다. 그리곤 계단을 내디디며 입을 연다.

“백작님! 그럼 이제부터 식사를 하실까요?”

“카이로시아 양!”

사람들이 보고 있기에 공식적인 이름을 불렀다. 그랬더니 살짝 눈을 흘긴다. 뇌쇄당할 정도로 매혹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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