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36화 (136/1,307)

# 136

“아이, 그냥 로시아라 불러달라니까요.”

“그래요. 로시아!”

“이그, 요 자도 빼구요, 그냥 로시아 그러세요. 백작님은 제 부군이시잖아요.”

“끄으응……!”

카이로시아는 솔직히 이 상황이 재미있다.

옴짝달싹 못하게 궁지로 몰아넣고 거래를 성사시킬 때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그래서인지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누가 봐도 행복에 겨운 아름다운 신부의 미소이다.

“지부장님, 신혼집은 어디에 마련하실 겁니까?”

“글쎄, 그건 백작님이 결정하실 내용이라……. 아마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백작가가 되겠지.”

“결혼하시면 자녀는 얼마나 낳을 계획이십니까?”

“그야, 여기 계신 백작님이 얼마나 힘써주시는가에 따라 다르겠지? 내 욕심 같아선 세 살 터울로 열둘쯤 낳고 싶어.”

“헉……! 세 살 터울로 열둘이요?”

“그래, 그만큼 백작님과 오래오래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뜻이야. 근데 가만, 세 살씩 열둘이래 봤자 삼십육 년이네.”

“36년이 짧아요?”

“당연하지……! 안 되겠어요, 백작님! 네 살 터울로 열둘 아니면 세 살 터울로 열여섯 중에 고르셔요.”

“끄으응……!”

현수가 ‘아이고 골치 아파!’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로시아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혀를 날름거린다.

“호호! 그럼 제 마음대로 결정합니다. 세 살 터울로 열여섯을 낳아드릴게요.”

농담일 것이다. 올해 스물셋인 로시아가 내년부터 애를 낳기 시작한다 하면 막내를 낳을 때 나이가 예순아홉 살이다.

한국식으로 따지면 칠순이 다 되어 애를 낳겠다는 뜻이다.

아르센 대륙의 여인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구의, 특히 한국 여인들은 대개 40대 중후반에 폐경을 맞이한다.

폐경되어 난소에서 난자를 더 이상 생산하지 않으면 임신이 불가능하다.

이곳이라 하여 어찌 크게 다르겠는가! 따라서 로시아의 말은 농담이다. 그런데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기어코 축구팀 하나와 농구팀 하나를 꾸릴 애들을 낳고야 말겠다는 표정이기 때문이다.

“지부장님! 여기 오신 지 한 달밖에 안 되었는데 어떻게 백작님과……! 정말 능력있으십니다. 존경합니다.”

귀족가의 결혼은 단기간에 결정되지 않는다.

이리 재고, 저리 재는 과정만 최소 10년이 보통이다.

그런데 카이로시아는 불과 한 달만에 하인스 백작이라는 대어를 낚아챘으니 실력있는 낚시꾼이란 소리이다.

“호호, 마음껏 존경하도록……!”

현수는 카이로시아와 나란히 앉아 스테이크와 스튜를 먹으면서 모든 대화를 들었다. 가끔 낯이 뜨거웠다.

그런데 카이로시아는 척척 잘도 받아 넘긴다. 순발력이 대단하다. 정말 타고난 상인인 듯싶다.

‘흐음, 이 여자랑 결혼하면 굶어죽지는 않겠군!’

식사를 마친 카이로시아는 지부 사무실로 갔다.

열흘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 결재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인스 백작님! 혹시 결혼하셨어요?”

카이로시아가 나가고 불과 30분도 되지 않아 로잘린이 왔다. 빨리 달려와서 그런지 숨은 거칠고 얼굴은 창백하다.

“아……! 로잘린 양.”

“어서 말씀해 주세요. 진짜 이레나 상단의 지부장이란 여자와 혼인을 한 거예요? 네……?”

“그건 아니고…….”

“휴우, 다행이에요. 전 혹시라도 그랬을까 싶어 정말 놀랬단 말이에요.”

로잘린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다는 듯 가슴을 쓰다듬었다. 열아홉 살임에도 발육이 좋아 당장 시집을 가도 좋을 정도이다.

“로잘린 양, 그나저나 왜 이리로 왔어요?”

“하인스 상점엔 현재 아무것도 없잖아요. 물건을 팔아야 하니 상품이 있는 곳을 말해줘요.”

“얀센!”

“네, 백작님!”

“이 층에 팔아야 할 물건들을 꺼내 놓았네. 로잘린 양과 같이 가서 물목을 확인해 보게.”

그렇지 않아도 얀센에게 물어보니 팔 물건이 없다 하여 후춧가루와 연막탄들을 꺼내 놓았던 것이다.

“네에, 알겠습니다.”

로잘린과 얀센이 후춧가루를 챙겨 상점으로 향한 후 현수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앉아 있다.

이곳에 온 것은 2월 6일이다. 그리고 오늘은 4월 20일이다.

두 달 하고 보름쯤 지났다. 그 사이에 로잘린과 카이로시아라는 두 여인을 알게 되었다.

젊은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을 알게 되었다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둘 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마냥 너무도 저돌적으로 대쉬한다.

젊은 시절 오드리 헵번을 닮은 로잘린, 그리고 캐서린 제타 존스보다도 더 예쁜 카이로시아, 둘 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그런데 이곳 여인들이 전부 이러는가 싶다. 너무도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부담을 느낄 정도이다.

“흐음, 떠날 때가 된 것 같군. 카이로시아야 어쩔 수 없다지만 로잘린은 한동안 못 보면 마음이 정리되겠지.”

먼저 만난 것은 분명 로잘린이다. 그리고 먼저 좋아해 준 것도 로잘린이다. 그럼에도 거리를 두려는 것은 한국식 사고방식 때문이다.

카이로시아와의 나이 차이보다 로잘린과의 나이 차이가 더 크다. 게다가 미성년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접근이 부담스런 것이다. 마음을 정한 현수는 밖으로 나왔다. 지도를 구하기 위함이다.

상점이 많았기에 별 어려움 없이 구할 수 있었다.

지도를 사며 물어보니 남동쪽으로 한참을 내려가라고 한다. 그런 다음 북동쪽으로 한참을 올라가는 길을 알려준다.

내려갈 때 1,500㎞, 올라갈 때 1,500㎞이다. 그런데 그냥 직진하면 1,000㎞이다.

“흐음! 이건 시간 낭비 같은데? 그냥 가로질러 가?”

지도를 보니 가로질러 갈 경우 사막과 라수스 협곡이라는 난관을 돌파하여야 한다. 호수들도 조금 있다.

사막엔 유사와 침사라는 난관이 있다. 라수스 협곡의 경우엔 드래고니안 거주 지역 인근을 지나야 한다.

“케이 상단의 알렌이 이쪽으론 가지 말라고 하긴 했는데, 흐으음! 어쩐다? 조금 더 알아볼까?”

현수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주점으로 가서 정보를 수집했다. 그런데 영 시원치 않다.

그러던 중 용병길드를 떠올렸다. 주점보다는 오히려 그쪽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왔나? 고용할 건가, 등록할 건가?”

“용병으로 등록하고 싶은데 가능합니까?”

“흐음, 용병은 S, A, B, C, D급으로 나뉘어 있는데 어느 등급으로 등록을 원하는 거지?”

40대 중반쯤 된 사내인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덩치가 산만 하다. 그런데 보기보단 싹싹하다.

“등급 별로 다른 점을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공짜로는 어렵지.”

손가락으로 수염을 비비꼬는데 내놓고 뇌물 달라는 뜻이다. 현수는 1실버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슬쩍 보고는 고개를 돌린다. 또 1실버를 놓았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 다시 1실버를 올려놓자 슬그머니 가져간다.

“S, A, B급은 많은 보수를 받을 수는 있지. 하지만 국경을 넘어가는 것엔 제약이 있어.”

“왜죠?”

“강한 전력이 타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지.”

“그럼 C급과 D급 용병은 국경 넘기가 쉽습니까?”

“실력이 낮으니 그 등급들은 국경을 넘어가도 뭐라 안 해. 대신 보수가 작지.”

“그렇군요.”

“좋아, 어느 등급으로 등록할 거지?”

“D급은 너무 낮으니 C급으로 등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기 저 문 보이지? 손때 묻어 시커멓게 더러워진 문 말이야. 글루 들어가면 젊은 놈 하나가 칼을 손질하고 있을 거야. 놈에게 말하면 돼! 아, 그놈 화나게 하지 마. 성질 더러운 놈이니까 잘해.”

“네에, 고맙습니다.”

안에 들어가니 시퍼렇게 날 선 칼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는 사내가 있다. 시험을 치르러 왔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공격을 한다. 시험이라는 것을 알기에 현수는 일부러 힘겨운 척하며 사내의 검을 막고, 피해냈다.

알고 있던 모든 검식을 버리고, 오로지 근육의 힘만으로, 그것도 반만 사용하여 내리긋고, 베는 검식만 시전했다.

그렇게 칼질 열 번을 감당해 내자 공격이 멈춘다.

“애송이, 제법인데? 상처도 안 입고……. 좋아, 그 정도면 C등급은 되겠어. 합격!”

“헉헉! 감사합니다.”

현수는 어린 시절 무협 소설 깨나 읽었기에 자신의 삼 푼은 늘 감추라는 구절을 잊지 않고 있다.

여긴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곳이다. 따라서 드러나지 않아야 안전하게 아드리안 공국까지 갈 수 있다.

그렇기에 현수는 아예 자신의 9할 이상을 감췄다.

C등급 용병이 되려고 하는데 너무 쉽게 통과해 버리면 오히려 이상한 시선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로니안 자작이 만들어준 평민 하인스의 신분증을 건네고 C급 용병패를 받았다.

구리로 만든 용병패엔 여러 가지가 기재되어 있다.

평민 하인스, 28세, 미판테 왕국 테세린에서 등록, C급 용병, 아르센력 2855년이라는 글씨가 그것이다.

나중에 용병을 그만두려면 이곳 테세린으로 와서 용병패와 신분증을 바꾸면 된다고 하였다. 하나 용병패는 신분증과 똑같은 효과를 내기에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런데 C급 용병은 매년 한 차례씩 용병지부에서 배당해 준 임무를 완수하여야 한다. 물론 고용비는 지불되지만 지부에서 내린 명령은 그 보수가 쥐꼬리만큼 된다고 한다.

이를 면하려면 매년 10실버를 내면 된다고 했다.

테세린에만 C급 용병이 800여 명이나 있다. 이들 가운데 매년 10실버를 내는 사람의 수효가 750여 명이다.

대부분 돈을 내고 마는 것이다.

이곳 테세린은 문물이 집산하는 항구도시이다. 그렇기에 호위 임무 등 돈을 만질 수 있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 갓 용병이 된 현수까지 그럴 수는 없다. 처음에 배당 받는 임무는 무조건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부 배당 임무 가운데 동쪽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았다.

적당한 것을 찾은 현수는 카운터로 가서 임무 배당 신청서를 작성해서 디밀었다.

이를 접수한 이는 덩치가 산만 한 그 사내이다.

알고 보니 B급 용병 하시쿤인데 임무 수행 도중 큰 부상을 당해 현재 요양 중이라 한다.

“그러니까 네가 영지 율리안의 영주 나후엘 자작가의 마차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겠다고?”

“네, 맡겨만 주십시오.”

현수는 부러 혈기왕성하지만 앞뒤 못 가리는 시늉을 했다. 그게 가장 적합하다 생각한 것이다.

하나 하시쿤은 이중 자신만만한 모습만 본 듯하다.

“큭큭! 웃기는군. C급 주제에 행동은 A급처럼 하니. 하긴, 처음 용병이 되었으니……. 좋아! 임무를 배당하지. 나후엘 자작가의 마차를 영지까지 호위하는 팀에 끼워주겠네.”

“고맙습니다.”

“조심해! 그리고 죽지나 말아. 상급 용병들의 지시는 철저히 따르고……. 아들 같아서 하는 말인데, 개울의 물을 떠먹을 때도 반드시 물어본 뒤에 떠먹어. 알았어?”

“네, 고맙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그래. 그리고 질문에 가장 잘 대답해 줄 사람은 줄리앙이야. 알았어? 딴 놈들한텐 묻지 말고 꼭 줄리앙에게 물어.”

“줄리앙이요? 네, 알겠습니다.”

“어쨌거나 줄리앙은 B급 용병이니 함부로 개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내일 아침에 이곳에서 출발하니 준비할 것 있으면 오늘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네에.”

“당분간은 아무것도 없는 산속을 헤매야 할 테니 살 것 있으면 사두란 말이야. 상점은 문을 나서서 좌측으로 200보쯤 걸어가면 있어. 참, 수통에 물 채우는 것 잊지 말고.”

“네, 감사합니다.”

현수는 보기보다 친절한 하시쿤에게 인사를 하곤 밖으로 나섰다.

“흐음! 첫 임무인데 목숨이나 건져올지 모르겠네. 마물의 숲을 지나야 하는데…….”

나직이 중얼거리던 하시쿤은 이내 팔베개를 하곤 몸을 뒤로 젖혔다. 애송이 용병을 보는 것이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관으로 돌아온 현수는 아공간을 뒤져 보유하고 있던 연막탄 대부분을 꺼내 놓았다. 약 500개 정도이다.

하나 후춧가루는 많았다. 라면 제조 공장을 털 때 그곳의 원료 창고에 상당히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병에 든 것은 2,000여 개, 생철통에 든 것은 6,000개를 꺼냈다. 이밖에 포대 단위로 포장된 것도 있다. 20㎏짜리 포대 700여 개다. 그러고도 제법 남아 있다. 혹시 몰라 남겨놓은 것이다.

“흐음! 이 정도면 판매하는 덴 지장이 없겠군.”

세실리아 여관을 나선 현수는 테세린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텔레포트나 워프 마법을 펼칠 안전한 좌표를 찾기 위함이다.

그런데 항구도시인지라 사람들의 유동이 상당히 많고 복잡하다. 다시 말해 안전하게 마법을 펼칠 곳이 없는 것이다.

“제기랄, 여기도 마땅치 않군. 숲속으로 들어가 볼까?”

용병패를 보여주니 찍소리 않고 문을 열어준다. 성을 나선 현수는 숲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숲도 안전하지 않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구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주변 몬스터들은 씨가 마른다. 지속적인 토벌 때문이다.

그래서 성내에 머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성 밖 숲속에 둥지를 튼 것이다.

한참을 돌아다녀도 마땅한 곳이 없다. 이곳에 하인스 상단을 냈으니 가끔 이곳으로 오긴 해야 한다. 그런데 마땅한 좌표가 없다. 도시가 계속 확장되는 추세이니 숲도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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