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기껏 좌표를 잡았는데 엉뚱한 건축물 등이 생겨나면 곤란하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의 이동조차 없을 곳을 찾아야 한다.
터벅터벅 걸어서 돌아오던 현수의 눈에 문득 로니안 자작의 영주성이 눈에 뜨인다.
두 개의 첨탑이 보인다. 중앙부가 영주 집무실이다.
7장 뱀처럼 휘감는 다리
일전에 시종의 안내를 받아 성의 내부를 구경할 때 오래전 무너져 내린 첨탑 하나에 대한 설명을 들은 바 있다.
로니안 자작이 영주가 되기 훨씬 전인 약 40여 년쯤 전에 엄청난 폭우를 동반한 뇌성벽력이 첨탑 하나를 때렸다.
그때 원인 미상 폭발로 인한 결과 세 개였던 첨탑이 두 개로 줄었다.
무너진 첨탑은 영주성 북쪽 끝에 있는 것인데 무너진 상태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보수하지 않은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필요없기 때문이다. 예전엔 북쪽의 첨탑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숲으로부터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것을 살펴보는 감시 초소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모든 몬스터가 토벌되어 이곳에 경비병을 배치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고 한다.
“첨탑! 거기가 적격이군. 흐음, 그런데 어찌 그곳엘 간다?”
로니안 자작에게도 마법사는 있다.
얼핏 듣기론 4써클 유저라고 한 것 같다. 따라서 텔레포트를 위한 마법진을 그리면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저써클 마법사라도 마나를 느끼기에 마나가 집산하는 걸 금방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일단 여관으로 돌아온 현수는 머리를 감싸고 한참 동안이나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그렸다.
워프보다는 텔레포트가 더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또한 안전하기도 하다. 따라서 텔레포트를 위한 마법진을 그리는데 4써클 마법사가 모르게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그려진 것은 텔레포트 마법진이다. 이것 역시 마나석 가루가 아닌 마나석 자체를 쓴다.
이 위에 덧그려지는 것은 오토 리차지 마법진이다. 마나석의 마나를 자동으로 충전시키는 마법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영구적인 텔레포트 마법진이 완성된다.
또한 지속적인 마나 공급이 이루어지므로 마법사가 상주할 필요가 없다. 양쪽으로 오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오기만 하는 마법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곳에 같은 용도를 지닌 마법진이 새겨지면 추가로 그곳의 좌표를 입력하면 된다.
아무튼 다음에 그려진 것은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 마법이다. 마법진 자체가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 위에는 미러 이미지 마법진이 추가로 그려진다.
마나의 꾸준한 유입 현상이 벌어지면 마법사들은 이를 의심할 것이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다.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하여 오토 밤(Auto Bomb) 마법진을 덧그렸다. 세상엔 없는 멀린만의 마법진이다.
이것은 누구든 강제로 마법진을 건드리려고 하면 스스로 폭발을 일으켜 모든 것을 지우는 마법이다.
그려야 할 마법진들을 모두 구상한 현수는 이것들이 충돌을 일으키는지 여부를 일일이 확인했다.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과연 멀린의 독창 마법답다.
확인을 끝낸 현수는 아공간을 뒤져 스테인리스 철판을 찾아냈다. 라면 공장 자재 창고를 털 때 딸려온 것이다.
두께 2㎜, 가로 세로 각각 1.5m쯤 되는 이것에 정교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실수해도 못 쓰게 된다.
하여 아주 세심히 확인해 가며 마법진을 그렸다.
이 과정에서 온갖 가공용 공구들이 망라되었다.
금긋기 바늘, 판금용 컴퍼스, 서피스 게이지, 센터 펀치, 판금 정, 버니어 캘리퍼스, 직각자, 각도기, 운형자 등등이다.
조금만 실수해도 전체를 버려야 하는 심력을 많이 소모하는 일이기에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휴우……! 이제 되었군.”
전기가 없어 구멍을 뚫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하나 현수가 누군가? 은근과 끈기의 대명사이다.
수십 년 동안 결계 속에서 마법만 익히기도 했는데 그깟 구멍 뚫는 일이 무어 대수이란 말인가!
이실리프 마법서를 뒤져봐도 구멍 뚫는 마법이 없자 하나를 창안했다. 워터 드릴 마법이다. 소량의 물만으로도 가능한 마법이다.
덕분에 마법을 구현시킬 때 마나의 배열이 어때야 효과적인지에 대한 공부가 되었다.
아무튼 모든 구멍까지 뚫어놓았기에 마나석만 끼우면 영구 텔레포트 마법진이 완성되는 것이다.
아공간을 뒤져 마나석을 꺼낸 현수는 각각의 구멍에 크기가 맞는 것들을 끼웠다. 마지막 구멍마저 끼우자 스테인리스 철판이 스르르 사라진다.
“후후, 성공이군!”
현수는 밤이 되길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세실리아와 놀아줬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참 붙임성이 좋은 아이이다.
쾌활하고, 명랑하며, 장난꾸러기인 세실리아랑 노는 동안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저녁나절, 카이로시아가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사람들은 둘이 부부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듯 자연스럽게 둘의 자리를 붙여놓았다.
그러는 동안 얀센과 로잘린이 당도하였다.
이전에 주었던 각각 200개나 되는 후춧가루를 모두 팔았단다. 병에 담긴 것은 2골드, 통에 담긴 것은 8골드나 받았다.
예상했던 금액의 딱 두 배이다.
로니안 자작의 적극적인 홍보 덕이다. 매출 총액이 무려 1,000골드이다. 한화로 10억원 어치나 팔아치운 것이다.
현수는 얀센에게 100골드를 주었다. 짧은 시간만에 1억을 번 것이다. 그럼에도 로잘린과 얀센은 더 팔게 없다면서 투덜댔다. 하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얀센은 생각지도 못했던 거금을 받아서 웃는 것이고, 로잘린은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장사가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식사가 준비되자 로잘린은 현수의 왼쪽에 붙어 앉았다. 카이로시아가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재잘재잘거리면서 식사를 하는 내내 아주 유쾌한 분위기였다.
이 층에 쌓아 놓은 엄청난 양의 후춧가루와 연막탄을 보고 내려온 때문이다.
식사 후 로잘린과 얀센은 다시 상점으로 갔다. 카이로시아 역시 이레나 상단 지부 사무실로 갔다.
하루 종일 뛰어놀던 세실리아는 금방 곯아떨어졌다. 로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설거지에 여념이 없다.
앞으로 세실리아 여관은 이레나 상단과 하인스 상단 사람들만 이용하는 곳으로 전용숙소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밖에는 당분간 내부 사정으로 폐업한다는 팻말을 달아놓았다.
사방이 고요해지자 현수는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 마법을 펼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곧장 영주성으로 갔다.
플라이 마법을 펼친 현수는 좌측 첨탑 중앙부에 위치한 곳까지 날아올랐다.
“마나의 힘이여, 깊은 꿈을 꾸게 하라. 딥 슬립!”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던 4써클 마법사는 맥없이 픽 쓰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코까지 골며 잠들었다.
곧장 영주성 뒤에 위치한 무너진 첨탑에 도착한 현수는 비교적 빗물이 덜 들이칠 곳을 골라 마법진을 그려놓은 판을 내려놓았다.
몇 번이나 제대로 되었는지를 확인하고는 곧장 몸을 돌려 날아올랐다.
영주 일가가 사용하는 공간 부근을 지날 즈음 현수는 세실리아 자작부인과 로니안 자작을 볼 수 있었다.
아직 깊은 밤도 아니건만 둘은 침대 속에 있다.
목욕을 자주해서 몸에서 나는 악취가 제거되자 부부생활이 즐거워진 모양이다.
‘좋은 일이지. 후후, 로잘린에게 어쩌면 동생이 생길지도…….’
여관으로 돌아온 현수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마나 심법을 운용했다. 역시 마나가 액체처럼 진한 곳이다.
모든 마나를 채워넣고는 단전호흡도 실시했다.
몇 번의 소주천에 이어 대주천까지 무리없이 진행된다. 한의학 서적을 많이 읽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샤워를 하곤 옷을 모두 갖춰 입었다. 혹시 얀센이 보고하러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밖은 아직 서늘하지만 장작을 때서 그런지 훈훈한 기운이 감돌아 쾌적한 기분이 되었다.
“흐음, 내일 아침에 말없이 떠나 버리면 뭐라 할 텐데. 으으음, 쪽지라도 써놔야 하나? 안 갈 수도 없고, 그냥 가자니 마음에 걸리고……. 에구, 모르겠다.”
현수는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레나 상단이야 이미 자리가 잡혀 있기에 카이로시아에겐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하인스 상단도 로잘린이 서기로 있는 한 적어도 테세린에서는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덕분에 얀센과 로사, 그리고 세실리아까지 안전하다.
그렇다면 못 떠날 이유가 없다. 다만 가고 난 뒤에 입을 마음의 상처 내지는 섭섭함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현수가 이런저런 생각에 전전반측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누구……? 세실리아니? 아까 자는 것 같더니……. 들어와.”
삐이꺽―!
“죄송해요. 세실리아가 아니라서…….”
“아, 카이로시아 양!”
“치이, 그냥 로시아라 불러줘요.”
하얗게 눈을 흘긴다. 그런데 되게 깜찍하게 느껴진다. 여자들은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우는 걸까? 몹시 궁금했다.
“그래, 로시아 양!”
“양도 빼구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주 남남 같잖아요.”
사실 둘은 남남이 맞다.
부부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며, 친척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며, 동창이나 같은 고향에서 자란 사이도 아니다.
완벽에 가까운 남남이다. 하나 현수는 반문하지 않았다.
“그럼……?”
“그냥 아까처럼 로시아라 불러줘요.”
“음! 알았소.”
내일 아침이 되면 떠날 것이다.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그렇기에 싱긋 웃음까지 지었다.
“주무셨어요?”
“아니, 그냥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소.”
“밤이 깊었는데 제가 여길 왜 온 거 같아요?”
“글쎄? 내가 그걸 어찌……?”
“백작님과 상의하고픈 게 있어서 왔어요. 시간 괜찮죠? 제가 방해하는 거 있어요?”
“아냐, 그런 거 없어.”
현수는 저도 모르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이야기 좀 해요.”
“무슨 이야기?”
현수는 자신이 반쯤 몸을 일으킨 침대에 털썩 주저앉는 카이로시아를 바라보았다.
“테세린은 항구도시라 여러 상단들이 들어와 있어요.”
“그렇겠지.”
“보고를 들어보니 경쟁이 아주 치열해요. 그래서 가끔 가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는군요.”
“안 좋은 일?”
“네. 거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면 상대의 물건을 훔치거나 못 쓰게 만드는 자들도 있다고 하더군요.”
“흐으음……. 그럴 수도 있겠지”
“가끔은 살인도 일어나나 봐요.”
“살인까지?”
“네, 그래서 백작님과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뭔지 말해.”
“하인스 상단과 이레나 상단이 전략적 제휴를 맺었으면 한다는 거예요.”
“전략적 제휴……? 서로 취급하는 품목이 완전히 다른데? 충돌할 일이 있을까?”
현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작님께서 제공해 주신 후춧가루랑 연막탄으로 얼마나 오래 동안 장사를 할 수 있을까요?”
“글쎄……? 그거야 난 모르지.”
“제가 보기엔 길어야 반년이에요. 엄청난 양이고, 막대한 가치를 지녔지만 아마 반년 안에 모두 팔릴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
“네, 대륙에 없던 물건이기에 귀족들의 사재기가 시작되면 더 빨리 팔릴 수도 있구요.”
“후후, 그럼 우리야 좋지.”
“그럼 그 뒤에는요? 계속해서 상품을 대주지 않으면 팔 물건이 없어 하인스 상점은 문을 닫아야 해요.”
“흐음, 그런가?”
“당연하죠. 문제는 로잘린 영애예요. 오늘 지나치다 보았는데 장사하는 맛에 푹 빠졌어요.”
“그래?”
“아주 행복해하는 표정이었어요. 그런데 그 맛은 마약과 같아서 한번 경험하면 계속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어지죠.”
“그럴 수도 있겠군.”
“따라서 백작님이 물건을 계속해서 대주지 않으면 하인스 상단은 결국 다른 품목에 손을 대게 될 거예요. 그럼 우리가 취급하는 물목과 겹치는 것이 반드시 발생하게 되죠.”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
현수는 턱을 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나 상단이 이곳에서 취급하는 품목은 매우 다양해요. 그래서 그 중 일부를 포기할 용의가 있어요.”
“……?”
“미판테 왕국은 산지가 많고, 험지 또한 많은 곳인지라 농사 지을 땅이 턱없이 부족해요. 그래서 많은 양의 곡식들을 사들이지요. 아무튼 전략적 제휴를 위해 저희 이레나 상단이 취급하던 곡식을 하인스 상단에게 넘길 수도 있어요.”
“그렇게 해서 이레나 상단이 얻는 것이 무엇이지?”
“상당히 많지요. 첫째는 이곳 테세린의 영주이신 로니안 자작님의 호의를 얻겠지요.”
“둘째는……?”
“심심하지 않게 해주었으니 로잘린 영애의 마음 또한 얻겠지요.”
“셋째는?”
“첫째와 둘째 덕에 우리는 호위 인력 대부분을 줄여도 되니 고정적인 지출이 대폭 감소할 거예요.”
“넷째도 있어?”
“물론이에요. 제 개인적으로는 이게 제일 큰 이득이에요.”
“그게 뭔데?”
“하인스 상단주인 백작님의 마음 또한 얻는 거지요.”
“으으음……!”
카이로시아! 말을 정말 잘한다. 혓바닥에 꿀이라도 바른 듯 조금도 지체없이 대답하는데 너무도 논리적이다.
하여 카이로시아의 얼굴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마침 흘러내린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넘기고 있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영리하고, 뇌쇄적이다.
“상단주인 아버지는 제게 거래를 함에 있어 이문만 남길 생각을 하지 말고 사람을 얻을 생각을 하라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