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38화 (138/1,307)

# 138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이다.

드라마 ‘상도’의 주인공 임상옥이 한 말인 듯싶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이로시아의 말은 이어지고 있다.

“곡식 하나를 포기하는 대신 우린 세 사람을 얻으니 이레나 상단은 아주 큰 이익을 보는 거랍니다.”

“그렇겠군.”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이득까지 산술적으로 계산할 능력과 강력한 추진력을 지닌 카이로시아를 새삼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언뜻 들은 바로는 카이로시아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이다. 로잘린보다 네 살 많고, 현수보다 다섯 살이 적다.

한국에서라면 이제 겨우 대학 졸업반이 되었을 나이임에도 카이로시아는 대단히 성숙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능력을 가졌다.

게다가 아프로디테8)에 비견될 미모와 슈퍼모델 뺨칠 몸매, 여기에 막강한 재력과 성숙한 사고방식을 지녔다.

사고 멀쩡한 사내라면 쫓아다니면서 사랑을 구걸해도 시원치 않을 무엇 하나 흠잡을 것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한국에서도 보기 드문 초특급 인재라 할 수 있다.

“로시아!”

“네……?”

“혹시 말이야. 내가 하인스 상단으로 소속을 바꾸라고 제안하면 어떤 대답을 할 거야?”

“왜죠……? 왜, 그런 걸 물으시죠?”

눈빛 반짝이는 카이로시아는 너무도 매혹적이다.

“그냥, 문득 떠오른 생각이야.”

“백작님! 잘못 물어보셨다는 거 혹시 아세요?”

“잘못 물어봤다고?”

“네.”

“내가 뭘……?”

“저는요, 몸은 이레나 상단 소속이지만 마음과 머리는 이미 하인스 상단 소속이에요. 백작님으로부터 반지를 받는 순간부터……!”

카이로시아는 넷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보인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오늘 되게 백작님의 품이 그리워요.”

“……!”

“그냥 안아만 주시면 돼요. 저번처럼……! 반지 주면서 하신 약속 지키실 거죠?”

“……!”

“오늘 되게 피곤했거든요.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는데 그걸 처리하느라 되게 힘들었어요. 히잉……!”

“……!”

현수는 쫑알거리는 카이로시아를 바라보았다.

“저 가서 씻고 올게요. 백작님은 먼저 주무셔도 돼요. 아셨죠?”

“로시아!”

몸을 일으켜 씻으러 나가려던 카이로시아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되돌아본다.

“왜요?”

“그냥……! 알았어. 가서 씻고 와. 가급적이면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게.”

“고마워요. 기다려 주신다 해서……!”

쪼옥―!

카이로시아는 허리 숙여 현수의 뺨에 뽀뽀를 했다.

점점 행동이 대담해지고 있다. 카이로시아가 나간 후 현수는 뺨에 닿았던 입술 감촉을 손으로 더듬었다. 홀린 기분이다.

“으으음……!”

한참을 지난 후 카이로시아가 들어왔다. 아예 이곳에서 밤을 지샐 작정을 했는지 얇은 잠옷 차림이다.

“어머, 진짜 안 주무셨네요. 호호, 저 기분 되게 좋아요.”

“……!”

“그렇게 옷 다 입고 주무실 거예요?”

“응……? 아, 아니. 난 옷 입곤 잠 못 자. 답답해서.”

“그럼 벗어요.”

조금 야한 말이다. 그런데 전혀 야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현수는 순순히 옷을 벗었다. 그리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카이로시아 역시 몸을 들이민다.

“아……! 포근해!”

그럴 것이다.

부드러운 감촉을 주는 패드는 극세사로 짠 순면이다. 이불은 오리털로 안을 채운 쟈가드 원단 이불이다.

처음 이 방에 왔을 때 현수는 냄새나는 이불 때문에 이마를 찌푸렸었다. 로사가 세탁해 준다 했지만 거절했다.

그래 봤자 여전히 냄새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벽이 되면 기온이 많이 떨어져 약간 추울 것이라 생각하여 꺼내 놓았던 것이다.

대낮 같으면 카이로시아가 눈빛을 반짝이며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리곤 극세사 패드와 오리털 이불이 또 있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묻지 않는다.

“백작님, 옆으로 좀 누우세요. 그렇게 똑바로 누워 계시면서 어떻게 절 안아줘요?”

현수는 혹시 실수라도 할까 싶어 잔뜩 긴장한 채 시체처럼 똑바로 누워 있었다.

“응……? 그, 그래.”

현수가 마지못해 몸을 돌리자 카이로시아가 품을 파고든다.

뭉클하면서도 되게 부드럽다. 얇은 잠옷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현수의 팔을 베고 누운 카이로시아는 잠시 뭐라고 종알거리면서 파고드는가 싶더니 이내 잠이 든다.

정말 피곤했는지 가늘게 코까지 곤다.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현수는 고역이었다.

혈기왕성한 나이의 청년이 꿈에서나 볼 수 있을 절세미녀를 품에 안았다. 욕심을 부려도 순순히 안겨줄 여인이다.

그런데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며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 했다. 덕분에 눈은 뻘겋게 충혈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이로시아는 가끔 가다 몸을 뒤척이면서 현수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카이로시아는 일찍 모친을 잃었다. 부친은 상행을 나가느라 늘 바빴다. 오라비들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제 앞가림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서 사람의 품에 제대로 안겨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우연히 현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너무 편했다! 그렇기에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쌕쌕거리면서 잘도 자는 것이다.

“로시아! 내가 만일 이곳에서 인연을 맺게 되면 꼭 로시아 당신과 결혼하겠소.”

현수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카이로시아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그때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현수는 미처 보지 못했다. 하필이면 그때 선잠에서 잠시 깨어나 있다가 현수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이다.

당연히 현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덕분에 밀착된 채 밤을 새는 현수는 고역을 겪어야 했다.

신체의 일부분이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어떻게든 엉덩이를 뒤로 빼려 했다. 하나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었다.

카이로시아의 다리가 뱀처럼 휘감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는 일도 없건만 진땀나는 밤이었다.

짹, 짹……!

한국시간으로 새벽 5시, 현수는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곤하게 잠들어 있는 카이로시아는 천사처럼 보인다.

천천히 의복을 갖추고는 용병 지부로 향했다.

가는 동안 카이로시아와 로잘린, 그리고 얀센에게 전해질 쪽지의 문구를 구상했다. 내용은 당연히 말없이 떠나 미안하다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용병 지부에서 쓸 생각이다.

모르긴 몰라도 쪽지를 받으면 되게 섭섭해할 것이란 생각에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곳에 온 목적은 아드리안 공국을 위기로부터 구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키지 않아도 언젠가는 반드시 떠나야 한다.

그래도 잠시나마 인연을 맺었던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다. 하여 쪽지에 쓸 내용은 가급적 정감있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용병지부 사무실 앞에 당도했다.

출행이 시작되려면 부산해야 하는데 웬일인지 매우 한산하다. 현수가 다가가자 벤치에 앉아 있던 여인 하나가 일어선다.

키는 168㎝에 몸무게 52㎏쯤 되어 보이는 날렵한 여인이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상이다.

‘어디서 봤더라? 맞아……! 안젤리나 졸리를 닮았어. 근데 여긴 왜 이렇게 섹시하고 예쁜 여자들이 많은 거야?’

아무튼 다가서는 여인은 안젤리나 졸리가 툼 레이더라는 영화에 나왔을 때처럼 젊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네가 C급 용병 하인스냐?”

“뭐라고……?”

얼굴은 예쁘지만 다짜고짜 반말을 하여 현수는 조금 깬다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봐도 23∼24살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그냥 보자마자 반말이다.

“네가 하인스라는 애송이 용병이냐고 물었다.”

또 한 번 반말이다. 슬슬 부화가 치솟는다.

“그렇다. 그런데 왜?”

“오늘 출발하려던 나후엘 자작가의 마차는 며칠 뒤로 미뤄졌다.”

“……!”

“네 숙소가 어딘지 적어두면 출발 전일에 연락할 것이다.”

대놓고 반말을 하는데 빈정 상한 현수는 대답 대신 여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인의 말이 이어졌다.

“넌 이미 명단에 올라 있으므로 다른 임무는 맡지 못해. 또한 첫 임무를 거절하면 용병 자격을 잃어. 알지?”

“좋아, 그건 알았고, 물어볼 게 있다.”

“뭐냐?”

“너, 도대체 몇 살이냐?”

“내 나이……? 그런 건 알 필요 없다. 자, 나는 전할 말 다 전했으니 이만 간다. 나중에 또 보자.”

말을 마친 여인은 즉각 몸을 돌렸다. 현수가 뒤에다 대고 물었다.

“이봐! 네 이름은 뭐냐?”

“나……? 줄리앙이다, 애송아! 그리고 용병은 나이보다 등급이 우선이야. 넌 C급, 난 B급. 그러니 다음에 볼 땐 꼭 존대를 하도록!”

여인은 더 할 말 없다는 듯 그대로 가버렸다.

‘저걸 확……! 어휴, 끓는다, 끓어. 어휴……! 싸가지를 밥 말아먹었나? 왜 말끝이 전부 반토막이야?’

아직 이 세계에 적응이 덜 된 현수이기에 나이 어린 여자의 반말에 기분이 상당히 상했다.

‘제길, 왜 늦어지는지, 언제쯤 출발 가능한지를 못 물어봤네. 에이, 이따 다시 와야겠군.’

돌아오는 길은 왠지 허탈했다.

대한민국의 남자들은 입대 날짜를 받게 되면 나름대로 정리를 한다. 그리고 입대 전날이 되면 대부분 길렀던 머리까지 깎는다.

다음 날, 긴장된 마음으로 신병훈련소에 들어간다. 그런데 가자마자 귀향 조치를 받게 되면 어떻겠는가!

현수의 마음이 바로 그렇다.

터덜터덜 걸어 세실리아 여관에 당도하니 다 나가고 아무도 없다. 졸지에 할 일이 없어진 현수는 제방으로 올라갔다.

침대가 텅 비어 있다. 극세사 패드와 이불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대신 쪽지 하나가 놓여 있다.

천애하는 하인스 백작님!

우리가 같이 덮었던 이불과 패드는 기념으로 제가 가져갑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찾지는 마셔요.

―당신의 로시아.

“쳇……! 기념으로 가져간 게 아니겠지.”

카이로시아의 신상품에 대한 집념과 열정을 알기에 현수는 혀만 찰 뿐이다.

모르긴 몰라도 샅샅이 분해될 것이다. 그리곤 그걸 상품화하려는 노력이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긴, 오늘 떠났으면 그게 기념품이 될 수도 있었겠네.’

말없이 떠나려 했던 미안함에 현수는 너그럽게 이해했다.

졸지에 할 일이 없어진 현수는 마나 심법을 운용했다.

그러다 점심식사 전에 용병지부 사무실에 다시 들렀다. 하지만 원하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 덩치 큰 용병 하시쿤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어보니 오늘은 나오지 않는 날이라고 한다.

내일 다시 오면 볼 수 있다는 말에 돌아와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곤 내내 단전호흡으로 시간을 보냈다.

세실리아가 들락날락 했지만 가부좌를 틀고 앉은 현수에게 말을 걸거나 건드리지 않았다. 혹시 몰라 꺼내 놓은 머리핀과 인형만 만지작거렸을 뿐이다. 참으로 기특한 녀석이다.

얀센과 로잘린은 장사가 잘 되는지 하루 종일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로사는 무거운 몸 때문에 요리할 때만 움직인다고 한다.

심심해진 현수는 이레나 상단 사무실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르센 대륙의 상단은 대체 어떤 모습으로 꾸려지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지금은 고작 테세린에서만 상행위를 하지만 하인스 상단도 언젠가는 미판테 왕국을 넘어 대륙 전체에서 장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하여 알아볼 것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물론 카이로시아가 어찌 일하는지에 대한 궁금한 점도 있었다.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니 이레나 상단 지부는 항구 근처에 있다고 한다. 천천히 걸어 당도해 보니 생각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서울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 두세 개를 합쳐 놓은 것만큼이나 크다. 과연 대륙을 경영할 만하다. 정문엔 수문위병이 근무 중이었다.

“멈춰서시오. 여긴 이레나 상단 사유지라오. 따라서 용무없는 자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소이다. 우리 상단에 용무가 있소?”

수문위병을 척 보니 40대 중반은 넘었다.

“네, 여기 지부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수문위병의 나이가 많기에 존대해 준 것이다.

“뭐라고……? 험험, 지부장님은 지금 매우 바쁘시다. 괜히 얼쩡거리다 욕먹지 말고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

조금 전엔 정중했는데 갑자기 반말이다.

“네? 방금 뭐라 했습니까?”

“너 같은 놈만 오늘 벌써 서른두 번째다. 주제를 알고 확실하게 찌그러져라. 지부장님은 너 같은 놈팡이에겐 할애할 시간이 없으시다.”

“이보시오. 이레나 상단은 누구에게나 친절한 상단인 걸로 아는데 좀 심한 거 아닙니까?”

“물론 고객에겐 친절하지. 하나 지부장님의 미모에 현혹되어 불나방처럼 쫓아다니는 놈들에겐 결코 친절하지 않다.”

“흐음! 그렇소? 나 말고도 다른 사내들이 왔었습니까?”

“방금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서른두 번째다.”

위병은 되지도 않을 일에 정력을 낭비하는 현수가 한심하다는 표정이다. 대놓고 하는 박대지만 현수는 왠지 화나지 않았다.

8장 드래곤도 이렇게는 못 만들어!

“당신이 보기에도 지부장님의 미모가 괜찮은 것 같소?”

“그걸 말이라고 하냐? 여기서 위병 생활만 이십 년이다. 그간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었지만 우리 지부장님만 한 미녀는 본 적도 없다.”

“그랬습니까? 근데 그런 미녀를 보고 싶어하는 것은 사내들의 본능 아닙니까?”

“어림도 없는 수작……! 괜한 말장난 하지 마라. 그리고 지부장님에겐 이미 부군이 계시다. 따라서 괜히 시간 없애 가며 헛물켜지 말고 얼른 꺼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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