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무슨 소리입니까? 지부장님이 여기 오시기 전까지도 미혼이었는데 한 달도 안 돼서 결혼을 했단 말씀입니까?”
“그래.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멀린 백작이라는 분과 결혼을 하셨다. 백작부인이 되신 거다.”
“에이, 거짓말! 그만한 귀족이 결혼을 했다면 테세린 전역이 왁자지껄했을 거 아닙니까?”
“어허! 내 말이 말 같이 들리지 않는다는 거냐? 결혼하셨다, 분명히……! 지부장님께서 우리 직원들 거의 전부가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셨으면 그런 거다.”
“에이, 거짓말!”
현수는 왠지 장난이 치고 싶어 슬쩍 건드려 보았다.
“어허! 이 녀석이……. 어서 썩 꺼지지 못할까? 높은 사람들 나오면 괜한 경을 칠 것이니 어서 물러가거라.”
“좋습니다. 그럼 물건을 사러 들어가는 것은 괜찮지요?”
“물건을 사러……? 으음, 그것도 안 된다.”
“무슨 소리입니까? 상단에 물건 사러 들어간다는데 못 들어가게 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장사 안 해요?”
“그래. 안 한다. 아니, 안 할 것이다, 너 같은 놈팡이에게는……. 괜히 그랬다가 지부장님 앞에서 알짱거리고 싶어 그러는가 본데 그건 절대 안 될 말이다.”
“좋아요. 그럼 지부장님에게 내 이름이나 전해줘요. 만나러 왔다고 전해주면 될 겁니다.”
“오냐, 네 이름이 뭐냐? 들어봐서 전해줄 만하면 그러지.”
위병 근무를 하던 40대 중반 장한은 현수에게 거꾸로 장난을 걸고 있었다.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는 표정이다.
“제 이름은 하인스입니다. 가서 전해주세요. 제가 왔다고.”
“네 이놈! 이런 경을 칠……! 하인스라는 이름이 아무리 흔해도 그렇지, 감히 하인스 백작님의 이름을 팔려 하다니…….”
잡히기만 하면 그냥 안 두겠다는 듯 눈을 부라리는 수문위병의 뒤로 마차 하나가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굵직한 사내의 음성이 들리자 수문위병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인다.
“아! 총서기님, 나가십니까? 지부장님의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온 잡것입니다. 현재 처리 중에 있습니다.”
“잡것이 감히……? 좋아, 알아서 잘 처리하도록!”
마차가 사라지자 위병은 이제 허락도 받았으니 마음 놓고 야단칠 생각을 먹었다.
“들었지? 순순히 꺼지겠느냐? 아님 매타작을 당하고 울면서 후회하겠느냐?”
“진짜 못 들어가게 할 겁니까?”
“물론이다. 돈을 보여줘도 넌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지부장님을 성가시게 할 것이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런 꼴은 못 본다.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썩 물럿거라!”
“좋습니다. 포기하지요. 그런데 이름이 뭡니까?”
“내 이름은 알아서 뭐하게?”
“카이로시아를 만나면 칭찬해 주려 합니다.”
“뭐? 카이로시아……? 네놈이 지부장님의 존함을 어찌 알았는지 모르지만 지부장님은 라이셔 제국 에델만 백작님의 영애이시다. 너 같은 평민이 함부로 부를 존함이 아니야.”
현수는 자신이 왜 문전박대를 당하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현재 전형적인 C급 용병 차림이다.
낡은 레더 아머에 더 볼 것도 없는 검 한 자루뿐이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알짱거리지 말고 꺼지라니 소생은 이만 꺼져 드리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잘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 네게 걸맞는 처자들이나 찾아봐라.”
‘뭐야? 여기도 이런 속담이 있었어?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는……?’
문득 박진영 대리가 떠오르자 현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람처럼 달달 볶아대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 인물의 면상이 떠올랐으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 것이다.
하나 이내 주름은 펴졌다.
아름다운 강연희 대리가 이어서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강 대리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한다는 걸 깜박하고 있었네. 영국 어딘데……. 그나저나 강 대리는 잘 있을까?’
현수는 몸을 돌려 터벅터벅 걸으며 상념에 잠겼다.
두두두두두……!
워 워 !
“멈추시오.”
다가오던 마차가 속도를 줄인다. 그리곤 마부가 소리쳤다,
“응? 누구……?”
현수가 고개를 드는 순간 열려 있던 마차의 창문으로 아름다운 얼굴 하나가 나온다.
“어머, 백작님! 백작님이 어떻게 여길……? 근데 복장이 왜 이러세요? 어디 갔다 오셨어요?”
“아! 카이로시아. 아니, 로시아!”
“네, 저예요. 한데 어떻게 여기에……? 참, 마차에 타세요. 안에 가서 차라도 한잔 마셔요.”
“차……? 흐음, 그럼 그럴까?”
현수는 사양치 않고 마차에 올랐다. 이곳에 온 목적이 안을 들여다보기 위함이 아니던가!
한편, 제법 떨어진 곳에서 다가오는 마차를 보던 수문위병은 얼른 자세를 가다듬었다.
분명 지부장인 카이로시아 아가씨의 전용마차이기 때문이다.
두두두두두……!
마차가 막 정문을 통과하려는 순간이다.
“잠시 멈춰요.”
“네, 지부장님!”
마부가 대답하자마자 카이로시아가 위병에게 말을 건다.
“거기 위병, 발루네 씨죠? 나 좀 봐요.”
“네. 수문위병 발루네 맞습니다, 지부장님!”
위병이 즉각 허리를 꺾고는 다가선다.
“여기 계신 하인스 백작님께서 위병 근무를 철저히 잘 하신다고 상을 주라고 하네요. 자, 여기……! 근무 끝나면 코찔찔이 세실리아 여관 주점으로 가서 한잔하세요.”
카이로시아로부터 10실버나 되는 거금을 받은 발루네는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한 달 월급과 맞먹었기 때문이다.
“네……? 아, 네에! 감사합니다, 지부장님! 그런데 하인스 백작님이라니요? 부군이신 하인스 멀린 백작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분께서 절 안다고 하십니까? 오늘 그분은 여기에 안 오셨는데요?”
발루네라는 수문위병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하인스라 하지 않았습니까?”
옆 창문에서 현수의 얼굴이 나타나자 발루네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난다.
“너, 넌 아까 그……! 어떻게 네놈이 감히 지부장님의 마차에……. 네 이놈! 어서 썩 내리지 못할까?”
“내리다니요? 발루네 씨. 지금 감히 본인의 부군이신 하인스 멀린 백작님께 너라 하셨습니까?”
카이로시아의 음성은 서릿발이 내린 것처럼 싸늘했다.
“네, 네에……? 저, 저놈이… 아니 저, 저분이… 그럼 지부장님의 남편이신 하, 하인스 백작님이시라는 말씀이십니까?”
“보면 몰라요? 내 전용마차에 타고 계신 것을……?”
“헉, 헉!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털썩―!
발루네라는 위병은 다리에서 힘이 빠져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고의로 그러는지 알 수 없지만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카이로시아를 보려고 오는 불나방이 있거든 조금 전처럼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이, 또 그러신다! 카이로시아라고 하지 말고 그냥 로시아라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로시아가 눈웃음을 치며 아양을 떤다. 그리곤 조막만 한 주먹으로 현수의 가슴을 콩콩 두들겼다.
“하하! 그래, 알았어. 로시아! 이제 됐지?”
“헤에, 네에.”
카이로시아가 기분 좋은 듯 배시시 웃음 짓는다. 보는 눈이 없다면 와락 껴안고 키스 세례를 퍼부을 만큼 매력적이다.
“아, 알겠습니다. 백작님! 그, 그리고 조금 전엔 대단히 많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하하, 아닙니다. 근무에 철저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럼 계속해서 근무하시길……. 로시아, 이제 그만 들어가자. 저분 추운가 봐. 덜덜 떨고 있잖아.”
“호호, 네에. 알았답니다. 어느 분의 명이신데요. 토렐! 이젠 출발해도 좋아요.”
“네, 지부장님!”
마차가 안으로 들어가고도 한참 동안 발루네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진짜로 다리가 확 풀려 버린 때문이다.
“지, 진짜 백작님이시라니……. 아이구, 이 바보! 하마터면 목이 잘릴 뻔 했네. 어휴……!”
발루네는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이 구사일생한 날이기 때문이다. 또한 뜻밖의 횡재를 한 날이기도 하다.
“여기에요. 여기가 제 집무실이에요.”
“좋군.”
짧게 대답했지만 내심 현수는 놀라고 있었다.
겉은 별 볼일 없어 보였다. 웅장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큰 건축물이긴 하다. 하나 볼 건 없었다.
크기는 한데 별다른 멋을 내지 않아 밋밋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부는 확연히 다르다.
어느 귀족이 공들여 치장한 성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장중하고, 아름다우며, 세련미 넘쳤기 때문이다.
현수의 반응은 사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 누구나 보이는 것이기에 카이로시아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버지는 겉만 번지르르한 외화내빈(外華內貧)보다는 외빈(外貧)하더라도 내화(內華)를 추구하는 분이세요.”
“현명한 생각이시군.”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여기, 앉으세요.”
고풍스런 의자에 두툼한 방석이 깔려 있다. 그런데 의자가 보통의 것보다 약간 크다.
“흐음! 앉아보니 편하네.”
“그렇죠? 저도 그래서 그 의자 좋아해요.”
“이거 로시아 것이야?”
“맞아요. 하나 백작님이 오셨으니 당연히 내드려야죠.”
“그래……? 고맙군.”
“아이, 그런 표현 쓰지 마세요. 고맙긴요. 당연한 거잖아요. 안 그래요? 백작님!”
“뭐, 로시아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앞으론 그러지.”
“근데 왜 안 물어보세요?”
“뭘, 물어봐?”
“미치도록 부드러운 패드와 너무나도 따뜻하면서도 포근했던 우리 이불 말이에요.”
로시아는 짐짓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 속셈을 뻔히 짐작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수는 문득 장난기가 동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왔어.”
“저, 정말이요? 혹시, 화나신 거예요?”
행여 심기를 건드린 것은 아닌가 싶어 조심스런 표정으로 현수의 눈치를 살핀다. 현수는 일부러 시선은 다른 데 두고 있지만 어찌 이런 분위기를 모르겠는가!
“당연하지. 그게 어떤 건데…….”
“미, 미안해요. 가서 가져오라고… 할까요?”
“그래. 가져와. 꼭 그래야 해.”
“아,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카이로시아는 풀죽은 목소리를 냈다. 야단맞았다 생각한 것이다. 그리곤 지시를 내리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현수의 입이 열린다.
“그게 어떤 패드이며 이불이야……? 로시아가 쪽지에 쓴 것처럼 우리가 처음 함께했던 기념할 만한 것이잖아. 그런데 그걸 뜯어보고 분해해서 상품화하려고 했어?”
“……!”
“그건 우리의 추억으로 소중히 간직해야 할 물건이야. 근데 그거보다 장사가 더 중요한 거야?”
“……!”
“난 말이야. 우리가 이 다음에 결혼해서 애를 낳고 산다면 그걸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엄마랑 아빠가 처음으로 같이 깔고 덮었던 기념할 만한 패드와 이불이라고…….”
“……!”
“그러니 당장 가서 가져와. 차라리 새 걸 꺼내 달라고 하지. 그런 정도는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이면……. 에이!”
“흐흑!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전 백작님이 그걸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모르고……. 흐흑! 미안해요.”
카이로시아가 와락 달려들며 눈물을 뿌린다.
교구를 보듬어안은 현수는 슬며시 웃음 지었다. 악동의 웃음이다. 그리곤 카이로시아의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우리가 결혼을 해서 첫날밤을 보낸다면 그때 그걸 깔고 싶어. 그럼 더 기념할 만한 것이 될 테니까. 안 그래?”
“흐흑! 미안해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흐흑! 당장 가져오라고 할게요. 흐흑! 미안해요. 흐흐흑!”
“됐어, 울지 마.”
“아니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흐흐흑!”
“어허! 됐다니까. 이제 그만 뚝!”
“흐흑! 흐흐흑! ……!”
눈물은 금방 잦아들었다. 눈물 젖은 카이로시아의 눈은 그 어떤 별빛보다 영롱한 빛을 뿜어낸다.
불과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운명적인 사랑을 만났다. 그리고 더없이 깊은 사랑의 교감을 나누었다는 듯한 눈빛이다.
이슬에 촉촉이 젖은 꽃잎들을 보았는가?
함초롬한 꽃잎에 내려앉은 이슬은 꽃에 화사함을 부여하고, 영롱함을 부여하며, 극치의 미를 부여한다.
습기 찬 카이로시아의 눈이 그랬다.
현수는 극기를 해야만 했다. 환한 대낮이건만 카이로시아의 집무실에서 사고를 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똑똑똑!
“흐흠, 들어와요.”
삐이꺽―!
“지부장님,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다과와 차를 올릴까요?”
들어선 이는 하녀인 듯하다. 둘만의 시간을 깨는 것일 수도 있기에 지극히 조심스런 음성이다.
카이로시아가 대답하려는 찰나 현수가 먼저 입을 연다.
“다과……? 좋지. 있으면 부탁하네. 아, 갖고 오는 김에 뜨거운 물도 부탁해. 한 이쯤 있으면 될 거야.”
“네에, 알겠습니다.”
현수의 손짓으로 대강의 양을 가늠한 하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현수가 묻는다.
“로시아, 집무실에 침대도 있어?”
“그건 왜요?”
“일을 하다가 피곤하다거나 할 때도 있잖아. 그럴 때 쉬는 침대 같은 거 없어?”
“이, 있기는 해요. 근데 그걸 왜…….”
왠지 카이로시아의 대답이 시원치 않다.
여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