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현수는 조금 전에 뜨거운 물을 부탁했다. 손짓으로 보인 양은 결코 씻을 용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마시려는 용도이다.
그리고 하녀가 나가자마자 침대의 위치를 묻는다.
그렇다면 가져오라던 뜨거운 물은 센트 오브 워머너이저를 만들려는 것일 수도 있다.
훤한 대낮에, 그것도 자신의 집무실에서 오입쟁이의 향기라는 그 음료를 마셔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약효가 발효되면 오늘 이곳이 자신의 순결을 잃는 곳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저어, 침대는 있는데 전 아직 씻지도 못했어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다과를 가져온다기에 뜨거운 커피가 생각났을 뿐이다. 그런데 엉뚱한 소리를 하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아니, 이따 밤에 저 다 씻고 나면 그때…….”
“……?”
뭔 소리냐는 표정을 짓자 카이로시아는 입술을 깨문다. 그리곤 결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현수와 결혼하는 것으로 마음먹었다.
아직 식도 안 올렸지만 상대가 원한다면 그것을 들어줘야 한다. 그게 결혼한 여인의 미덕인 남편에 대한 순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대낮이고, 자신의 집무실이지만 이곳에서 순결을 잃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알았어요. 지금 씻고 올게요. 그러니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로시아! 지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백작님, 조금 이르긴 해요. 그래도 백작님이 원하시니 정갈하게 씻고 오겠다는 거예요.”
“로시아! 나는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가져오라고 한 거야. 로시아 더러 씻으라고 하려는 게 아니고.”
“알아요. 그래도 어떻게 더러운 몸을 드려요? 첫날밤, 아니, 첫날 낮인가……? 아무튼 씻고 올게요.”
“뭐어……?”
현수는 이제야 로시아의 말뜻을 이해했다.
“근데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백작님이 주시는 커피라는 거요. 그거 센트 오브 워머나어저의 한 종류잖아요.”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 오입쟁이의 향기……? 그게 뭐야?”
“치이, 모르는 척 하시기는……? 여자들에게 그걸 먹이면 남자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
“주로 바람둥이들이 그걸 쓴다고 들었어요. 근데 대체 어디서 그런 걸 만든대요?”
“뭐어……?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현수는 한참을 웃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겼던 것이다.
그래서 첫날부터 커피를 다 마실 테니 거래하게 해달라고 했던 것까지 모두 이해되었다.
현수는 그런 걸 마시라고 권했다. 이는 어떻게 해보겠다는 뜻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카이로시아는 그걸 마셨다.
두 잔이나!
현수는 카이로시아가 어떤 생각이었는지를 거의 완전히 이해했다. 그러는 동안 카이로시아는 왜 이러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시아! 이쪽에 앉아봐.”
“네에.”
“로시아! 커피는 말이야,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가 아니고…….”
현수의 차근차근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카이로시아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너무도 부끄럽고 창피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별 오해를 다 한 셈이다.
“하여간 그런 거니까 앞으론 걱정 말고 마셔. 알았지?”
“네에. 그럴게요.”
“후후, 후후후! 그런데 좀 웃겼지?”
“치이, 또 놀리시려고……. 뭐, 그래도 난 좋아요. 그게 그건 줄 알았으니까 백작님의 마음을 얻은 거잖아요.”
“사실은 나도 좋아. 덕분에 우리 로시아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잖아. 안 그래?”
현수가 귀밑머리를 쓸어서 넘겨주자 살짝 눈을 흘긴다.
“치이……. 근데 이거 말이에요.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아셨죠? 남들에게 알려지면 창피해서 죽을 거란 말이에요.”
“하하, 알았어.”
“근데 말이에요. 혹시 커피를 로잘린 양에도 주신 적이 있어요?”
“아니? 그건 왜?”
“나중에 장난 좀 치려구요.”
“장난? 어떤 장난?”
“저녁 때 결산하러 올 거잖아요? 그럼 그때 커피를 권하세요. 전 그 전에 그게 어쩌면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슬쩍 흘릴게요.”
“후후, 재미있겠군, 로잘린 양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볼 수 있어서.”
“호호, 아마 펄쩍 뛰면서 도망갈 거예요. 로잘린은 아직 어리잖아요. 세상 물정도 잘 모르고. 그래도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에 대한 이야긴 들었을 거예요. 호호호!”
웃고 있는 사이에 하녀가 다과와 뜨거운 물을 가져왔다.
둘은 커피를 만들어 담소를 나누면서 그것을 즐겼다. 그런데 이 세상의 과자라는 것은 너무 뻑뻑하고 달지도 않다.
그냥 밀가루에 설탕용액을 조금 넣고 구워낸 것이다.
결국 현수의 아공간에서 두 종류의 과자가 나왔다. 약간 짭짭하면서 바삭바삭한 크래커와 달디단 버터링 쿠키이다.
카이로시아는 과자에 환장한 여자처럼 먹었다. 현수는 킬킬거리면서 이런 모습을 즐겼다.
카이로시아는 크래커 봉지를 뜯어보고는 탄성을 질렀다.
“어머나,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만든대요? 어머! 끝이 톱날 같은데 그것까지 다 똑같아요. 드래곤도 이렇게는 못 만들어요.”
한참을 경탄하더니 이내 본색을 찾는다. 그리곤 더 있으면 다 내놓으라며 성화를 부렸다.
당연히 있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제과공장을 통째로 털어오지 않았던가!
잠시 후 카이로시아의 집무실은 과자로 가득 찼다.
보는 것만으로도 질릴 정도로 많이 꺼내 주었다. 카이로시아의 마음을 알았기에 현수는 기꺼운 마음으로 내놓은 것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카이로시아는 판매고를 7대 3으로 나누자고 한다. 현수는 조건을 걸었다.
팔기는 팔되 비닐류는 모두 회수하는 조건이다.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물건이라 생각한 것이다.
포장을 뜯으면 저장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그러면 가격이 떨어질 수도 있다. 하나 이는 곧 해결되었다.
보존 마법이라는 훌륭한 해결 방법이 있지 않은가!
이레나 상단 소속 마법사로 하여금 마법을 걸게 하여 판매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다음엔 카이로시아의 집무실 곁 침실로 이동했다.
당연히 연막탄이 터졌다. 다음엔 환기이다.
수많은 벌레들의 사체를 본 카이로시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자게 되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 어찌 안 그러겠는가!
현수는 침대를 통째로 걷어냈다.
그리곤 에이스 침대를 하나 꺼냈다. 널찍한 데서 편안히 자라고 퀸 사이즈로 꺼냈다.
극세사 패드가 등장했고, 쟈가드 원단 오리털 이불도 나왔다. 자는 동안 목을 보호해 준다는 라텍스 베개까지 꺼냈다.
물건이 나올 때마다 카이로시아는 탄성을 질렀다.
세상에 어찌 이런 물건들이 있다는 말인가!
결혼하면 모든 것을 다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코리아 제국으로 가리라 마음먹었다. 문물의 격차가 엄청난 그곳으로 가면 평생토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현수가 다음에 꺼낸 것은 여성용 잠옷이다. 온갖 종류의 잠옷이 다 나왔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속이 훤히 비치는 망사 잠옷부터 앞가슴이 푹 파인 섹시 잠옷까지 별의별 것이 다 나온 것이다.
잠자리 날개 같은 잠옷을 본 카이로시아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어찌 이렇듯 얇은 원단으로 깜짝 놀랄 만큼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아름다운 옷을 만들 수 있는지 경탄에 경탄을 거듭한 때문이다.
그러다 속이 훤히 비치는 잠옷을 들고는 낯을 붉혔다. 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마음이 든 것이다.
실크 잠옷을 들고는 그 오묘한 감촉에 탄성을 질렀다.
현수는 과도한 문물 전수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 약 10여 벌만 꺼내 놓았다.
카이로시아도 이것만은 팔자는 소리를 못했다. 하긴 속이 훤히 비치는 잠옷을 어떻게 꺼내 놓고 팔 수 있겠는가!
아직 아르센 대륙은 그런 면에서 고지식한 세상이다.
하나 아무런 소리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이런 잠옷이 있다면 다른 종류의 속옷도 있을 것 아니냐면서 꺼내 보라고 하였다.
현수는 브래지어와 팬티 세트를 몇 개 꺼냈다. 그 화려한 문양과 촉감에 카이로시아는 또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설명하기 남세스러웠으나 현수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 나온 현빈처럼 브래지어 착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웃으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착용법을 배운 카이로시아는 현수를 잠시 침실 밖으로 쫓아냈다. 잠시 후, 낯을 붉히며 나타난다. 그리곤 스스럼없이 현수의 품에 안기며 나직이 속삭인다.
“백작님, 정말 고마워요.”
“고맙긴……. 로시아에게 주는 건 하나도 안 아까워.”
현수는 저녁나절이 될 때까지 이레나 상단에 머물면서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덕분에 이쪽 세상의 문물에 대해 상당히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저녁까지 먹고는 세실리아 여관으로 되돌아왔다.
하나 로시아는 올 수 없었다. 휘하 상인들과 더불어 보존 마법이 걸린 크래커와 버터링 쿠키를 판매할 전략을 짜야 했기 때문이다.
처소로 올라갈 때 현수는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에이, 이럴 때면 꼭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또 가야 해? 온 지 얼마 안 되는데. 제길! 언제쯤이면 마음 푹 놓고 있다 갈 수 있을까?”
사실 이곳에 머무는 기간이 한 달 이내라면 언제든 원하는 시간대로 갈 수 있다. 하나 그 기간 내내 불안한 마음을 느껴야 한다.
그렇기에 불안한 마음이 들자마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테세린의 외곽으로 나간 현수는 결계를 치고 그 안에서 마나를 모았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지구로 귀환했다.
“마나여, 나를 지구로…….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안개처럼 부드럽게 사라졌다.
* * *
이실리프 무역상사 옥상에 나타난 현수는 사무실로 내려갔다.
제일 먼저 컴퓨터를 부팅시켜 날짜를 확인해 보았다. 예상대로 2013년 6월 27일 목요일이다.
이제 차원 이동을 하는 동안 시각이 잘못되는 일은 없을 듯하여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뉴스를 확인했다. 별다른 일은 없는 듯하다.
‘흐음, 그렇다면 내 주변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건데……. 무슨 일이지?’
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은정이 출근한다. 사장실의 문이 열려 있기에 시선이 마주쳤다.
“어머, 사장님! 오늘은 일찍 출근하셨네요.”
“아! 이은정 씨!”
“사장님, 아침 식사 하셨지요?”
“아침 식사……! 아, 먹었어요.”
약간 출출했지만 혹시라도 또 자기 집으로 가자 할 것 같아서였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사과 주스 만들어 드릴게요.”
“네……? 아, 네에.”
몸에 좋다는 걸 해준다는 데 왜 마다하겠는가!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 접속하여 뉴스를 보던 현수는 주영이 아직 연락하기 않았음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꺼져 있다.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된 듯하다. 하여 배터리를 바꿔 끼웠다. 그랬더니 곧바로 진동한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응? 경빈이가 왜……? 여보세요.”
“형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왜……? 무슨 일 났어?”
경빈의 음성에 다급함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형님, 비서실 김 대리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
“김 대리가 우연히 유진기를 발견해서 미행한 듯합니다.”
“그런데?”
“두어 시간쯤 전부터 문자를 보냈는데 그게 끊겼습니다.”
“무슨 소리야? 다시 천천히 말해봐.”
경빈의 말만으론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백두마트 상무 비서실 김 대리는 조경빈 상무의 지시에 따라 유진기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이내 종적을 놓쳤다.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았던 때문이다. 그러다 오늘 김 대리는 우연히 유진기를 발견하였다. 그리곤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냈다.
유진기 발견!
조경빈은 당연히 놈의 뒤를 추적해 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새로운 문자가 왔다.
들켰음. 도망갈 곳이 없음!
이후론 문자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진동이 아니라면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할 수 있음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경찰엔 연락할 수 없다. 조경빈 본인이 마약 복용 혐의로 체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급한 마음에 이현우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했다.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 하여 현수에게 전화를 했는데 전원이 꺼져 있다는 메시지뿐이었다.
조경빈은 현수 이외엔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기에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그러다 통화가 된 것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어디에 있었대?”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나라정밀이란 공장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나라정밀? 알았어. 내가 가볼게.”
“고맙습니다. 형님!”
“그래.”
9장 옥황상제의 명이니라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은정이 사과 주스를 가지고 들어온다.
“사장님 이거……! 꿀을 넣어서 조금 달 거예요.”
은정은 어제 자비를 들여 몸에 좋은 잡화꿀을 구입했다. 수진과 지혜가 한 입만 달라고 했지만 어림도 없다고 잡아뗐다.
오로지 현수에게만 먹이기 위해 구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과 역시 마트에 가서 좋은 것으로 골라서 샀다.
주스를 만들 것이라 믹서로 갈겠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 해서 빛깔 좋고 상태 좋은 것으로만 골랐다.
쇼핑을 하는 동안 은정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장을 보는 주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