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이거 맛이 상당히 괜찮을 거예요. 호호, 사장님 아니면 아무도 안 드리는 건데 김 과장님이니까 특별히 드려요.”
조 대리가 가져온 것은 인삼을 갈아 만든 음료이다.
뿐만 아니라 조청 바른 한과와 검은깨와 송홧가루로 만든 다식, 그리고 꿀과 참깨를 뿌려놓은 약과까지 있다.
색깔과 맛, 그리고 건강까지 생각한 다과이다.
모처럼 차려왔는데 한두 개 집어 먹고 갈 수 없어 종류별로 먹어보았다. 맛이 상당히 좋다. 하여 상당한 시간을 지체했다.
그러는 동안 조인경 대리는 여러 가지를 물었다. 비서실 발령을 받아 별탈없으면 최연소 차장이 될 텐데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리곤 이실리프 무역상사의 매출을 물었다. 회사에 난 소문에 의하면 월 소득이 1억을 넘는다는 소리가 있다면서 눈빛을 반짝였다.
돈을 얼마나 버나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냥 알고 싶은 정도이다. 하여 현수는 이제 막 시작하여 별 수익이 없다며 엄살을 부렸다.
조인경 대리는 첫술에 배부르진 않지만 차차 나아질 것이라며 환히 웃는다.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곤 자재과로 내려갔다. 오랜만에 사수인 곽 대리를 만나기 위함이다.
“아니 이게 누구야? 김현수 씨! 아니, 이젠 과장님이시지? 그래, 김현수 과장님 여기엔 웬일이십니까?”
“에이, 사수! 그러지 마요, 불편하니까요. 한번 사수는 영원한 사수가 아닙니까? 그러니 그냥 예전처럼 말씀하셔도 돼요.”
“그, 그럼 그럴까?”
곽 대리가 조금 불편해하는 기색이다. 하긴 부하직원이 갑자기 상사가 돼서 나타났으니 어찌 편하겠는가!
현수는 배려 차원에서 예전처럼 환히 웃었다.
“사수! 그간 잘 계셨죠?”
“나야 뭐……. 그러는 김 과장님은, 아니, 현수 씨는……?”
“저도 잘 있죠. 근데 바쁘세요?”
현수는 불편함을 덜어주려 화제를 돌렸다
“바쁘냐고? 오늘 표본검품이 있어서……. 현수 씨도 알잖아. 그거 마치려면 시간 꽤 걸리는 거. 참, 인사부에 한번 들려봐.”
“인사부요? 아! 겸직 금지 사규 위반 때문이죠?”
“그래. 사규 위반은 맞잖아. 어쨌거나 인사부에 갔다와. 그리고 그냥 가지 마. 이따 퇴근하면 술이나 한잔하자.”
“네, 사수!”
기분 좋게 자재과를 나선 현수는 계단을 딛고 11층까지 올라갔다. 무려 일곱 개 층이나 걸어서 올라간 것이다.
아르센 대륙을 다니려면 무엇보다도 기초 체력이 중요하기에 에너지 절약 겸 체력 단련 목적으로 일부러 계단을 이용한 것이다.
그렇게 9층쯤 올랐을 때 위에서 누군가 대화를 하고 있다.
“박 과장! 정말 전무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
“네, 삼류 대학 출신이 사장 비서실에 있게 된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회사 체면과도 관련있는 일이지요.”
“그,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럼요. 아시다시피 우리 회사는 사장 비서실의 맨파워가 막강하잖아요. 전부 외국 유학을 다녀온 박사 급으로 채워져 있으니.”
“그건 그렇지. 국내 대학 중엔 S대 출신 이외엔 아무도 없으니.”
실제로 천지건설 사장 비서실의 구성원들은 대단히 유능한 인재들이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외국의 유명 대학 출신 및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다. 조인경 대리 역시 S대 출신이다.
“네, 그래서 외부에선 우리 회사의 브레인들이 거기에 있는 줄 압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기획실은 개털이고…….”
“무슨 소리! 기획실이 왜 개털인가? 그곳 역시 인재들만 모여 있는 곳인데. 모두 장래가 촉망되지. 안 그런가?”
“그럼 뭐합니까? 기획실에서 올리는 기안은 번번이 퇴짜 당하지만 사장 비서실 기안은 잘만 시행되잖습니까.”
박 과장은 불만족스러운지 볼멘소리를 한다.
“그건… 아, 아닐세! 아암, 아니고 말고!”
“아무튼 차장님은 마음 푹 놓고 밀어붙이셔도 됩니다.”
“흐음, 사장님이 김 과장을 사장 비서실로 발령내라고 하셨는데 우리 인사부에서 반기를 들어도 되나?”
“차장님! 사장님도 힘이 있지만 전무님이 실세라는 거 아시죠?”
“그야……!”
박준태 전무는 천지건설 회장 부인의 동생이다. 신형섭 사장의 경우는 외부에서 영입한 경영 전문가이다.
둘 사이에 파워게임이 벌어질 경우 누구의 손이 들릴지는 뻔하다.
그렇기에 차장이라는 사람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박 과장이라는 자가 말을 잇는다.
“그러니 그렇게 처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차장님도 이번 가을 정기 인사 땐 진급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진급……?”
“네. 그럴 때도 되셨잖아요. 그러니 눈 딱 감고 밀어붙이세요. 부장님이 되시도록 제가 특별히 힘 좀 써볼게요. 우린 남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이건 은근한 협박이자 당근이다. 힘없는 월급쟁이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아, 알겠네. 내, 그리함세.”
“네! 인사부장님도 그렇게 하기로 하셨으니 별탈 없을 겁니다. 그럼 전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이만 물러갑니다.”
“그, 그러게. 잘 가게.”
현수는 대화한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기획3팀장 박진영 과장이 인사부 이 차장을 은근슬쩍 닦달하는 소리였던 것이다. 이들의 대화 내용 중 비서실로 가지 못하게 된 인물은 아마도 자신일 것이다.
“대체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러는 걸까? 진짜 강 대리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박 과장은 사내도 아니야.”
나직이 투덜댄 현수는 천천히 걸어 11층 인사과로 올라갔다.
“안녕하십니까? 해외영업부 소속 김현수 과장입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우리 회사의 영웅이 오셨구먼. 하하, 어서 오시게. 그래, 어쩐 일로 인사부를 찾으셨나?”
이 차장은 조금 전의 대화는 잊었다는 듯 너털웃음까지 터뜨리며 현수를 맞이했다. 내심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네에. 인사차 들렀습니다.”
“커피, 주스……? 뭘 줄까?”
나이차가 많은 데다 상급자이기에 자연스레 말을 놓고 있었다.
“전 다 좋습니다. 아무거나 주십시오.”
“잠시 기다리게.”
이 차장이 손수 탕비실로 들어가더니 커피 두 잔을 내온다.
“알다시피 우리 회사는 여우회 입김이 워낙 세서…….”
이 차장의 웃음엔 처연함이 배어 있었다.
현수가 입사하기 전 회사를 그만둔 직원이 있다. 어느 날, 자재과 옆에 있는 견적실 여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스 김, 미안하지만 여기 커피 한 잔!”
미스 김이라 불렸던 여직원은 자신이 시골 다방 레지 취급을 받아 몹시 불쾌하다면서 여우회에 정식으로 항의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막강한 여우회의 입김 결과 징계위원회가 열렸고, 그 직원은 소환당했다.
자재과 신입사원이던 그는 몹시 불쾌하다면서 사표를 내던지고 다른 회사로 옮겨갔다. 꼴 같지 않은 페미니즘9)의 득세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일종의 마초10)주의자였던 것이다.
이후로 천지건설에선 여직원들에게 커피나 차를 달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사장 비서실 같은 경우는 예외이다.
어쨌거나 이 차장이 가져온 커피를 사이에 두고 앉게 되었다.
현수는 이 차장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가끔 지나치면서 보기는 했지만 이처럼 가까이서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다.
입고 있는 의복이며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컨대 전형적인 샐러리맨이다. 지금이야 인사부 실세이니 잘 나가는 듯 보이지만 회사에서 잘리면 갈 곳이 없는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한 가장의 생계를 이끄는 가장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박진영 과장의 말에 힘없이 따라야 했을 것이다. 현수는 이 차장의 처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내색하지 않고 용건을 말했다.
“이 차장님! 제가 겸직을 금지하는 사규를 어겨서 문제가 되었다는 말을 들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하나 부장급 이상으로 구성된 징계위원회에서 이번 일은 특별 케이스로 삼기로 했네. 천지약품 덕에 본사 이미지도 상당히 좋아졌다는 현지 보고가 있었던 때문이네.”
“아! 그럼 저 안 잘리는 겁니까?”
“잘리긴……. 창사 이래 최고의 공을 세워 두 계급이나 특진한 기록을 만든 자넬 어찌 자르겠는가! 어쨌거나 그건 호산데 다마도 있네.”
“다마라니요?”
“아무래도 자네의 비서실 발령은 어려울 듯하네. 사장님은 비서실로 끌어주시려 하지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네.”
“반대하는 사람이요?”
현수는 짐짓 모르는 척했다.
“그렇네. 자네가 출세하는 걸 몹시 시기하는 사람이 있네. 그런데 힘이 좀 있지. 아! 누군지 묻지는 말게. 대답해 줄 수 없으니…….”
“흐으음……!”
현수가 짐짓 침음성을 내자 이를 실망의 뜻으로 받아들인 이 차장이 위로의 말을 한다.
“위에서 시키는 일인지라 어쩔 수 없지만 난 자네 편일세.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거든 연락하게. 미력하지만 돕겠네.”
“감사합니다, 차장님!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제가 차장님께 해드린 게 아무것도 없는데…….”
“아니네, 내가 자네의 구만리 같은 앞길을 막는 것 같아 미안해서 그러네. 그러니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만 하게.”
“네에, 고맙습니다. 그럼 이제 내부의 적도 있지만 아군도 생긴 거군요.”
“아군……? 하하,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그렇네, 내가 자네 아군 내지는 지원군 역할을 하겠네. 힘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 차장과의 면담은 그리 길지 않았다.
딱히 더 할 말이 없었던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은 사장 비서실로의 발령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현수는 내심 좋다고 생각했다.
똑똑하고 패기 넘치는 사람들로 가득한 비서실에서 경쟁할 생각을 하면 아득했는데 그로부터 해방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차장은 앞날이 창창할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기분이 들어 그러는지 정말 친절하고 살갑게 대해주었다.
다시 자재과 사무실로 내려왔는데 아무도 없다. 대신 아깐 보이지 않던 박스들이 키 높이 이상으로 쌓여 있다.
어디선가 반입된 자재 샘플들인 듯싶다.
“사수! 사수, 어디 있어요?”
박스 사이의 통로를 비집고 들어가 곽 대리의 업무 공간 쪽으로 가보았지만 아무도 없다.
“표본 검사하러 내려가셨나?”
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누군가의 음성이 있었다.
“누구십니까?”
“아……!”
몸을 돌려보니 신입사원 티가 팍팍나는 청년이 서 있다.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여긴 자재과 사무실입니다만…….”
무슨 용무로 아무도 없는 방에 와 있냐는 뜻일 것이다.
“아, 난 김현수라고 여기서 근무하던 직원이에요.”
“네에? 김현수 씨라고요? 그럼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엄청난 공을 세워 두 계급이나 특진한 김현수 과장님이시란 말입니까?”
상대가 너무도 놀라는 표정을 지었기에 현수는 계면쩍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현수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신입사원이 덥석 손을 잡은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아니, 과장님! 저 자재과 신입사원 유민우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네에.”
현수가 어정쩡한 웃음을 지을 때 곽 대리가 박스 하나를 들고 들어온다.
“어, 벌써 인사했어?”
“네, 김현수 과장님이 제 전임자시죠?”
“그래. 현수 씨, 벌써 볼일 다 본거야?”
“네, 인사부에 갔는데 별 다른 일 없던데요?”
“그래, 그럼 조금만 기다려. 이제 한 30분 있으면 퇴근이니까.”
“어라, 두 분 어디 가십니까?”
유민우가 끼어들어 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어, 오랜만에 술 한잔 하려고.”
“사수! 그리고 과장님! 저도 끼워주십시오.”
유민우가 애원하는 눈빛을 낸다. 현수로부터 직접 영웅담을 듣고 싶은 때문이다.
“에구, 그러지 뭐! 젓가락 한 쌍만 더 놓으면 되니까.”
곽 대리가 박스를 내려놓으며 대꾸한 직후 쌓아둔 박스 저쪽에서 웬 여자가 소리친다.
“저도요! 저도 회식에 끼워줘요.”
“……?”
셋 모두 누군가 싶다는 표정이다. 잠시 후, 박스 사이의 통로로 걸어온 여인은 사장 비서실의 조인경 대리이다.
“어라, 조 대리님이 어떻게 여길……?”
“사장님이 오늘 도착한 박스들 내용물 확인해 보고 연락 달라고 하셔서요. 이거 다 사장님이 보내신 거잖아요.”
“아! 네에.”
“근데 저도 회식에 끼워주면 안 돼요? 우리 비서실은 너무 개인주의가 팽배해서 회식 잘 안 하거든요. 젓가락 한 쌍만 더 놓으면 되잖아요. 그쵸?”
조 대리가 허락을 구한 사람은 곽 대리가 아니라 현수였다. 유민우는 가장 직급이 높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아니다.
현수로부터 직접 허락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찌 미인의 청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네, 그러세요. 그래 주면 우리야 고맙죠. 조 대리님과 같은 미인과 함께하는 술자리라……. 기대가 되는걸요?”
“호호, 네에. 술 그렇게 약하지 않으니 폐 끼치지는 않을 거예요.”
눈치 빠른 유민우는 이쯤해서 상황을 완전히 접수했다.
지금 장래가 촉망되는 김현수 과장에게 비서실 실세인 조인경 대리가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회사를 위해 엄청난 공을 세웠다. 그 결과 두 계급 특진과 3개월 유급 휴가라는 전무후무할 기록 또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