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그러는 사이에 무역회사를 설립해 일찌감치 CEO가 된 사람이다. 회사에선 겸직 금지 사규를 어겼지만 특별 케이스로 가납해 주었다.
승승장구만이 남은 미혼인 청년이다. 게다가 키도 크고, 몸매 날렵하며, 호감 가는 마스크의 소유자이다.
조인경 대리 같은 미녀를 차지할 충분한 자격 요건을 갖춘 셈이다.
유민우는 입사 직후 곽 대리와 함께 다니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현수가 천지건설 최고 미녀인 강연희 대리와 매 주말을 함께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란 원래 이야기 꾸며내길 좋아한다. 곽 대리라 하여 어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겠는가!
이야기는 각색되어 현수와 연희가 연애를 했고, 이를 질투한 기획3팀장 박진영 과장이 해외영업부로 발령 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했다. 지어낸 이야기지만 절반가량은 사실에 근접했다.
그렇기에 대체 김현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오늘 만났기에 두 손을 덥석 잡은 것이다.
그런데 강연희 대리와 쌍벽을 이룬다는 비서실의 조인경 대리마저 김현수 과장에게 접근을 한다. 그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민우는 같은 사내로서 김현수를 존경하기로 마음먹었다.
“과장님! 존경합니다.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느닷없이 허리까지 숙이며 뜬금없는 소리를 하자 곽 대리와 조 대리, 그리고 현수는 눈만 끔벅였다.
퇴근 후, 일행은 횟집에서 배를 채웠다. 2차는 유민우 사원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나이트클럽으로 결정되었다.
일행이 간 곳은 강남 최고의 나이트클럽이라고 소문이 난 청담동 클럽 제이(Club J)이다.
쿵쿵쾅쾅! 쿵짝쿵짝! 쿵쿵쿵쿵!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진동과 소리가 유민우의 젊은 혈기를 자극한 듯 벌써부터 어깨를 들썩인다.
“앗싸! 이런데 진짜 오랜만입니다. 지금부턴 제가 모시겠습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간 유민우는 조금 놀아봤는지 일사천리로 모든 것을 마쳐 놓았다.
나머지 일행은 잠시 스테이지 구경을 했다.
유민우의 말대로 훈남훈녀들의 전시장인 듯 미남미녀들이 많았다.
모두들 빠른 템포에 맞춰 격렬하게 몸을 흔들며 젊음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 룸에 발을 들여놓으며 현수는 요즘 이런 데 자주 온다는 생각을 하곤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사실 입사 전엔 이런 곳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그럴 만한 돈도 없었고, 시간적 여유도 없었으며, 춤도 출줄 모르기 때문이다.
탁자엔 양주와 맥주, 그리고 안주들이 놓여 있었다.
“하하, 제가 돈을 내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 정도는 기본으로 시켜야 한다고 해서요.”
“잘 했네요. 오늘 계산은 제가 합니다.”
1차도 현수가 냈다. 곽 대리가 오랜만에 사수 노릇 하겠다며 무리하려 했지만 극구 만류하였다. 카드 청구서가 날아오는 날 어부인에게 혼나고 싶으냐는 말로 협박했던 것이다.
그리곤 회사에서 받은 상금이 있으니 그걸로 내겠다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수가 1차를 냈으니 2차는 나눠내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모처럼 기분 내는 것이니 신나게 놀라는 뜻에서 계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역시 과장님, 멋지십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건배하죠.”
유민우가 각자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우리 김현수 과장님을 위하여!”
“위하여!”
“에구…….”
현수는 곽 대리의 얼굴을 보고 계면쩍어했다. 미안한 기분이 든 것이다. 하나 곽 대리의 얼굴엔 조금도 우려하던 빛이 어려 있지 않다.
오히려 대단한 후배를 부사수로 두고 있었다는 것이 영광이라는 듯 환히 웃고 있었던 것이다.
“자아, 그럼 지금부터 제가 노래 한 곡을 뽑겠습니다.”
술잔을 비우곤 총알 같은 속도로 노래 제목이 쓰인 책을 뒤적인다. 그러는 사이에 곽 대리는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곤 그걸 이마에 묶는다. 곽 대리가 기분 좋을 때 하는 퍼포먼스이다.
조인경 대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웃기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교소(嬌笑)를 터뜨렸다.
그러는 사이에 노래방 기계에선 전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아, 그럼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방금 입국한 대한민국의 카수 유민우의 노래가 시작되겠습니다.”
너스레를 떤 유민우는 가사 따위는 모두 외운다는 듯 그럴 듯한 폼을 잡으며 노래를 시작했다.
“언제나 거침없던 내가 조금씩 눈치를 보고 있어. 겉으론 관심없는 척 차가운 도시의 남자인 척……. 우리 연애할까? 나 오랫동안 솔로여서 연애가 서툴지 모르지만 네 전 남자친구보다 네가 만난 모든 남자보다 가장 널 사랑할게.”
유민우가 조인경 대리를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진짜로 사랑을 구하는 듯한 모습이다.
곽 대리와 현수가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자 조인경 대리는 현수의 곁에 바싹 다가앉는다.
그리곤 팔짱을 끼우면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하하! 하하하……!”
노래 가사에 대한 절묘한 대답이 된 셈이기에 현수와 곽 대리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이에 유민우가 실망했다는 듯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사실은 가사의 뒷부분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노래가 끝났다. 그런데 노래 실력이 영 시원치 않다. 아무래도 음치에 가까운 쪽인 듯싶다.
빰빠라 밤, 빰 빰 빠암―!
화면에 나타난 점수는 98점이다.
“어휴! 저 기계 망가진 거 아니에요? 어떻게 저런 점수가 나오죠?”
“글쎄요? 아마 점수가 후한 기곈가 보죠.”
현수의 대꾸에도 조인경 대리가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민우의 멘트가 이어졌다.
“자아, 오늘은 우리 자재과의 회식입니다. 따라서 전통에 따라 다음 타자를 지명합니다. 천지건설의 자랑! 천상 선녀보다도 아름다운 우리 조인경 대리님! 자아, 마이크를 받으소서!”
부러 한쪽 무릎을 꿇어가며 마이크를 넘긴다.
웬만하면 부끄러워할 텐데 조 대리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번호를 누른다.
전주가 흘러나오자 가볍게 고개를 숙이곤 안무를 시작한다.
그 순간 곽 대리와 현수, 그리고 민우는 넋이 나갔다.
모니터에 등장한 가수들과 똑같은 안무였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노래까지 훌륭하다.
“빠졌나 봐, 빠졌나 봐, Lovin’ my boy! 빠질 거야, 빠질 거야, 너의 맘도! 오늘 밤도 내일 밤도 만날 My boy. 100%는 아녀도. Baby Oh∼! 내 거 해줄 거지, 으응? Baby Oh∼! 보고 싶은 내님아. Baby 샤샤샤 오! 나의 샹하이 러브. 자꾸자꾸 나타나. Baby 샤샤샤! 대체 넌 뭐야. 훌쩍훌쩍 날 울려…….”
곽 대리는 물론이고 유민우와 현수는 깜짝 놀랐다.
가수들과 거의 똑같은 안무를 하면서도 음정, 박자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춤을 추는 조 대리의 시선은 현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노골적인 유혹이다.
현수는 내심 불편했지만 환히 웃어주었다.
빰빠라 밤, 빰 빰 빠암―!
“우와아! 100점이다. 100점! 조 대리님 감축드립니다. 벌금 만 냥에 당첨되셨습니다.”
“어머, 100점인데 왜 벌금을 내요?”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말도 안 된다는 듯 반문했다.
“저희 자재과 전통이 그렇습니다. 100점은 벌금 만 냥, 91점부터 99점까지는 통과! 81점 이상 90점도 벌금 만 냥, 그리고 71점 이상 80점은 이만 냥, 끝으로 70점 이하는 벌금이 삼만 냥입니다.”
유민우가 벌금 어서 내라는 듯 손을 내밀자 조 대리가 현수를 바라본다. 맞느냐는 뜻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할 수 없다는 듯 만 원을 냈다. 하지만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천지건설의 천상선녀께서 내신 이 벌금은 저희 집 가보로 삼아 대대손손 물려주겠습니다. 자아, 다음 순서를 지목해 주십시오.”
“네, 다음은 곽 대리님! 멋진 노래 부탁해요.”
예상외라는 듯 편안한 자세로 있던 곽 대리가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현수를 지목하리라 생각했던 때문이다.
잠시 후,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시작했다.
“Come On, Come On, Come On, Come On, 넌 아직 나를 몰라. 얼마나 잘 나가는지. 네가 쉽게 볼 남자가 아닌걸. No No No. 사랑은 원래 지키는 게 어려워. Love Love Love. 아! 정말 미치겠어. 왜 졸졸 따라와. 나쁜 여자 아니라며 따라와. No No No. 근데 어떡해. 가끔 나도 흔들려. 있을 때 잘해…….”
넥타이를 이마에 질끈 동여맨, 다소 뚱뚱한 곽 대리의 댄스에 실내는 자지러졌다. 노래도 노래지만 너무도 웃겼던 때문이다.
“하하, 하하하하!”
“어머……! 호호, 호호호호!”
“으하하하하하!”
사실 곽 대리는 뚱뚱하기도 하지만 못 생기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천지건설 직원만 아니었다면 장가도 못갈 얼굴이라고 했다. 그런 그를 여자들이 졸졸 따라온다는 가사로 바꿔 노래를 부르니 어찌 웃기지 않겠는가!
노래가 끝날 즈음 실컷 웃은 조인경 대리가 귓속말을 한다.
“김현수 과장님! 저 이런 데 처음이에요. 조금 있다가 스테이지 구경시켜 주시면 안 돼요?”
천하절색의 부탁인데 어찌 안 된다 하겠는가!
“알았어요. 조금만 있다가 구경 가요.”
곽 대리의 노래 점수는 82점이다. 벌금으로 만 원을 냈다. 다음 순서는 당연히 현수이다. 번호를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우리 가는 길에 아침 햇살 비치면 행복하다고 말해 주겠네. 이리저리 둘러 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현수가 이 노래를 택한 건 부르기 쉽다는 것과 멜로디가 감미롭다는 것 외엔 없다. 그렇기에 가사를 외우고 있는 것도 아니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조인경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현수의 곁으로 다가와 화음을 넣었다.
그러면서 간간히 현수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노래에 심취한 현수는 모르지만 민우과 곽 대리는 이 모습을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천지건설의 두 미녀 모두의 마음을 현수가 훔쳤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유민우는 새삼 존경스럽다는 듯 현수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노래는 끝났다. 그런데 투덜댄 것은 조 대리이다.
“치이, 이 기계 진짜 망가진 거 아니에요? 어떻게 63점이 나와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벌금은 3만 냥입니다.”
현수는 기분 좋게 벌금을 냈다. 그리곤 자리에 앉아 잠시 술을 즐겼다. 다음엔 유민우와 곽 대리가 번갈아가며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 스테이지 구경 가요.”
“네, 그러지요.”
둘에게 이야길 하니 아예 룸을 하나 더 잡아서 둘만 놀고 오라면서 놀렸다. 조인경 대리가 정말 그래도 되냐고 물어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
결국 노래 부르기가 취미인 곽 대리만 남기고 셋이 나왔다. 민우는 같이 놀 여자친구를 구하겠다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현수와 조 대리는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췄다. 땀이 날 정도로 한참을 흔드는데 누군가가 툭 친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는 얼굴이다.
“어라? 너희들은……?”
“형님, 그러는 형님은 여기에 어쩐 일이세요?”
“근데 곁에 계시는 분은…….”
“놀러 왔어. 그리고 이쪽은 우리 회사 조인경 대리님이셔.”
“안녕하세요? 형수 후보님, 저 이현우라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조경빈이라 합니다.”
“어머……! 전, 조인경이라고 해요.”
조 대리가 형수님이라는 소리가 부끄럽다는 듯 어정쩡하게 인사를 하자 경빈이 현수의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형수님 알면 어쩌시려고……. 지금 바람피우시는 거죠?”
“아냐, 우리 회사 직원이라니까. 오늘 회식이 있어서…….”
“하하, 농담이에요. 형님, 저희는 갑니다. 재미있게 노세요.”
“형수님, 좋은 밤 되십시오.”
현우과 경빈이 익살스런 표정으로 물러났다.
이때 현란하던 댄스 음악이 끝나고 블루스 음악으로 바뀐다. 이런 춤을 춰본 적 없기에 현수가 들어가려는데 조 대리가 바라본다.
“저, 블루스 한 번도 못 춰봤어요. 가르쳐 주실래요?”
“엥……? 나도 경험이 없는데요?”
“그럼 우리 다른 사람들 추는 것 보면서 배워요.”
조 대리가 손을 내밀었기에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곤 다른 사람들처럼 자세를 잡자 바싹 품으로 다가와 안긴다. 바로 곁의 커플이 그러고 있어 의당 그런 줄 알았다.
“……!”
현수는 불편했지만 밀어내지 않았다. 자칫 마음 상해할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묻는다.
“근데요. 조금 전에 만났던 조경빈이라는 사람을 제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거든요?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해줄 수 있나요?”
“경빈이요? 걘 백두마트 상무예요. 백두그룹 회장의 손자지요.”
“네에……? 아! 그래서…….”
어째 이름도 익고 얼굴도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신문지상에 이름과 사진이 가끔 오르내렸기에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그냥 친한 동생이에요.”
현수는 별 뜻 없이 한 말이지만 조 대리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체 정체가 뭐기에 재벌 3세를 동생으로 둔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현수의 어깨를 툭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