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쪽에서 제공하는 교통편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시선을 돌렸다. 좌측 위쪽에 영국이 보인다.
“참! 그걸 물어봐야지.”
현수는 지갑에서 받았던 명함을 꺼냈다. 그리곤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천지건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저는 해외영업부 김현수 과장인데요.”
“네, 김현수 과장님! 반갑습니다.”
“인사부의 이준섭 차장님과 통화하고 싶습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돌려 드리겠습니다.”
띠리링! 띠리리링! 띠리리리링!
“네, 인사부 이준섭 차장입니다.”
“아! 이 차장님, 저 김현수 과장입니다.”
“그래요. 김 과장!”
“저어,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부탁? 뭔 부탁……? 말하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줄 테니.”
“네, 전에 업무지원팀에 있던 강연희 대리가 현재 영국 출장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잠깐만……. 흐음, 강연희 대리라……. 아! 여기 있군. 그래, 무엇이 알고 싶은 건가?”
“네, 그녀가 머무는 곳이 어딘지 알고 싶어서요.”
“그건 왠지 물어도 되겠나?”
“강 대리님은 제가 자재과에 있을 때 상당히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제가 이번 휴가의 마지막을 영국에서 보낼 생각인데 가는 김에 한번 뵈었으면 해서요.”
“그래? 알겠네. 잠시만 기다리게.”
전화기를 내려놓는 소리에 이어 서류 비슷한 것을 뒤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대략 4분쯤 지났다.
“하도 자주 숙소를 옮겨서 찾기가 힘들었네. 최종적으로 머물렀던 곳을 일러주겠네. 하지만 현재에도 거기에 있다는 보장은 없네.”
“네, 알려주시면 다음은 제가 알아서 하지요.”
“그러게. 받아 적을 준비 되었나?”
“네, 말씀하십시오.”
“런던에 있는 노보텔 런던 웨스트에 머물렀네. 전화번호는 런던 8741―1555이네. 참고로 영국의 국가번호는 44, 런던의 지역번호는 20이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강 대리가 업무 보는 곳 전화번호는 없습니까? 천지건설 런던지사, 이런 데 머무는 거 아닙니까?”
“아니네. 강 대리는 여전히 업무지원팀 소속이네. 그리고 영국에서의 임무는 업무지원팀장의 지시에 따른 거라 우리도 모르네.”
“아! 네에, 알겠습니다. 그럼 업무지원팀에 물어보죠.”
“물어보나 마나일 거네. 천지건설 런던지사는 없으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런던은 물론이고 영국 전체에도 우리 지사는 없네. 그러니 업무지원팀장에게 물어봐도 강 대리 업무 공간의 전화번호는 알 수 없을 것이란 말이네.”
“아, 네에.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게, 즐거운 여행이 되길 비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각 부서에서 발생되는 문제점 해결에 도움을 주는 업무지원팀에서 영국으로 출장을 보냈다. 그런데 사무실조차 없다면 대체 어떤 임무가 부여되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해리포터 시리즈가 탄생된 동네군, 영국은! 그리고 오래 전이지만 스승님이 한때 활약을 하셨던 곳이고. 가는 길에 혹시 스승님의 흔적이 남아 있나 찾아봐야겠구나.”
현수는 즉각 멀린에 대한 흔적을 찾기 위함 서핑을 시작했다.
영국의 전설적인 왕 아더를 도운 궁정마법사이며, 그의 모습은 반지의 제왕에 나왔던 간달프와 유사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아울러 엑스칼리버와 그에 걸린 마법에 관한 이야기도 볼 수 있었다. 그러다 프랑스의 부흐실리온드(Broc liande) 숲에 멀린의 무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은 아더가 엑스칼리버를 뽑은 곳이다.
“흐음, 휴가가 끝나 콩고민주공화국으로 갈 때엔 이 숲을 방문해 봐야겠구나.”
멀린의 시신은 현재 자신의 아공간에 미스릴로 만들어진 관 속에 담겨 있지 않은가!
따라서 부흐실리온드의 무덤은 분명한 가짜이다. 그래도 스승과 관련이 있다 하니 한번 방문해 볼 마음을 품은 것이다.
현수는 은정과 수진, 그리고 지혜에게 러시아 출장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업무 차질이 빚어지지 않도록 결재권을 은정에게 넘긴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수진과 지혜는 이제 전 세계를 누비며 출장 다니게 될 현수가 몹시 부럽다 하였다.
* * *
“손님! 불편하신 점은 없으신지요?”
“네, 괜찮습니다.”
“무엇이든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A항공 스튜어디스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네, 그러지요.”
현수의 말에 또 한 번 생끗 미소를 짓는다. 그런 그녀를 보며 현수는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다. 이륙 직전에 음식물을 섭취했다 하더라도 앞으로 아홉 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먹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 오후, 티케팅을 마쳤을 때 이수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고생했으니 저녁을 사주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사양했다. 그랬더니 오늘 저녁은 어떠냐는 것이다. 하여 러시아로 출장가게 되어 그것 역시 곤란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비행기에 탑승해 일등석에 앉았다. 일반석과 프레스티지석이 모두 매진되어 할 수 없이 일등석으로 예약한 것이다.
어쨌거나 자리에 앉고 얼마 되지 않아 항공기가 이륙했다.
안전고도에 도달했다는 방송이 나온 직후 어떤 승무원이 와서 좌석 업그레이드를 해준다고 한다.
이 항공사는 일반석, 프레스티지석, 일등석으로 좌석 등급을 매겨놓았다. 그런데 일등석에서 무얼 또 업그레이드 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옮기라 하여 승무원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일등석 코스모 스위트에 빈자리가 있어 편안히 가도록 배려한다는 설명을 했다.
아홉 시간이 넘는 비행을 해야 하는 입장에선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자신이 비운 자리를 프레스티지석에 있던 누군가가 옮겨 앉을 것이기에 흐뭇했다.
일등석 코스모 스위트는 일등석보다도 좌석 간격이 길고, 너비도 컸다. 일등석 위의 특등석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만큼 넓고 안락했다.
기분이 좋아졌기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스튜어디스가 다가왔다. 음료수를 주려는 듯하여 뭘 마실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수정이었던 것이다.
“호호, 오빠 놀라셨죠?”
“수정 씨가 어떻게…….”
“헤헤, 어제 제가 수를 조금 썼어요. 오빠, 서 있지 말고 앉아요. 그 자리 되게 편하고 좋거든요.”
“그럼 이 자리를……?”
“헤헤, 제가 힘이 조금 세답니다.”
만개한 장미처럼 활짝 웃는 얼굴에 뭐라 할 수 없었기에 현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쩌업!”
“오빠, 유치장에서 고생하셨잖아요. 그러니 조금 편히 가시라고 제가 윗분들에게 떼를 좀 썼지요. 뭐, 어차피 빈자리로 가는 거잖아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상은 다르다.
현수가 러시아행 항공권을 티케팅했다는 소리를 들은 수정은 즉시 이를 알아보았다. 다행히 자신이 근무하는 항공사였다.
잠시 고심하던 수정은 전화를 걸어 현수의 좌석을 변경시켰다.
VIP들만 이용하는 일등석 코스모 스위트로 바꾼 것이다.
이에 대한 비용은 수정이 부담했다. 물론 재직 중인 항공사인지라 상당 부분 할인을 받아 큰 비용이 든 것은 아니다.
그리곤 비행 스케줄 담당 스튜어드를 졸라 이 비행기에 탄 것이다.
수정은 남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을 때엔 업무적인 말만 했다. 자칫 문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편한 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현수의 속내까지 편한 것은 아니다. 이수정과 조인경에게 헛물켜지 말라는 소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 그런 이야길 할 기회는 없었다.
결국 영화만 두 편 보고, 잠시 조는 수밖에 없었다.
“오빠, 모스크바는 처음이시죠?”
“응!”
“호호,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래, 그럼!”
수정은 신난다는 듯 팔짱을 낀다.
현수는 말쑥한 양복 차림, 수정은 몸에 달라붙는 투피스를 걸치고 있다. 선남선녀이기에 마치 신혼여행 온 부부처럼 보인다.
남들이 보기에 남자는 조금 쑥스러워 하는 것처럼 보이고, 여자는 마냥 행복에 들뜬 모습이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7월은 낮엔 덥고, 아침저녁엔 추운 날씨이다.
조금 서늘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춥다. 하루에 초봄 또는 늦가을이 여름과 공존하는 계절이다.
“조금 덥지?”
“네, 오빠. 저기 보이는 바실리 성당 아세요?”
“당연히 알지. 러시아어로 흐람 바실리야 블라줴나바(Храм Василия Блаженого)라고 하잖아. 붉은 광장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이고. 맞지?”
“어머! 발음 좋네요. 오빠 러시아어도 할 줄 아는 거예요?”
“그냥 조금……!”
“우와! 대단해요. 아무튼 전 여기에 다섯 번쯤 왔나 봐요. 근데 올 때마다 바실리 성당을 꼭 봐요. 너무 예쁘잖아요. 꼭 동화 속에 있는 건물 같아요.”
“그래, 러시아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되어 아주 아름답지. 나도 사진으로만 봤는데 수정 씨 덕분에 직접 보겠네.”
“치이, 또 그러신다.”
“뭘……?”
“저요, 수정 씨라고 하지 말고 그냥 수정이라고 불러주면 안 돼요? 그게 더 정감있고, 가까운 느낌이 들잖아요.”
이쯤해서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정이 한계를 정해놓지 않고 마냥 접근해 옴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여 현수는 잠시 말을 끊었다. 생각을 굳히기 위함이다. 그리곤 다소 굳은 표정으로 말을 했다.
“……! 사실 나 사귀는 여자가 있어.”
“네에……? 저, 정말요……? 저, 정말 그, 그런 거예요?”
고개를 디밀어 시선을 맞춘 수정의 눈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뿐만이 아니다. 삽시간에 축축한 습기를 머금고 있다.
그리곤 곧 글썽글썽한 눈이 되어 현수를 바라본다.
‘에이구……! 휴우∼!’
현수는 나직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절망 내지는 낙담으로 바뀌는데 불과 1초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물을 머금은 눈망울이 너무 애처로워 보인다.
이때 수정의 볼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눈물을 닦고는 다시 묻는다.
“오빠, 정말 그런 거예요? 정말이요?”
“끄으응……!”
“농담인 거죠? 그쵸? 수정이 떠보려고 농담하신 거죠? 그쵸? 저, 정말 놀랬단 말이에요. 저, 정말 오빨 좋아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니라고 말해줘요. 네? 수정이 마음이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오빠!”
“끄으응……!”
“오빠, 저 오빠 없으면 죽을 거 같아요. 오빠 없는 세상은 이제 세상이 아니에요. 온통 회색빛일 거고, 슬프고 절망적일 거예요.”
“……!”
현수는 대꾸 대신 수정의 눈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굵은 눈물이 쏟아져 나온다. 너무 안쓰럽다.
‘제기랄……! 대체 나더러 어쩌라고?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면 안 되나?’
마음 약한 현수가 내심으로 투덜거릴 때 수정이 말을 잇는다.
“저 정말 잘 할게요. 오빠가 하라는 건 뭐든지 할게요. 하지 말라고 하면 아무것도 안하구요. 네? 그러니 제발 절 버리지 마세요.”
“끄으응……!”
“수정인, 수정인 이제 오빠 없으면 못 살 거 같단 말이에요. 흐흑!”
수정이 와락 품속을 파고들었기에 현수는 등을 다독여 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 상황을 보고 있던 노인이 한마디 한다.
“이보게, 청년! 예쁜 아가씨를 울리면 쓰나? 자넬 몹시 사랑하나 본데 아껴주고 사랑해 주게. 인생은 사랑만 하면서 살기에도 그리 길지 않다네.”
예순쯤 된 노인의 곁에는 비슷한 또래의 귀부인이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 있다. 부부가 산책이라도 나온 듯하다.
“네에, 어르신! 충고 고맙습니다.”
“그래, 신혼여행을 왔는가? 그렇담 더 잘해 줘야지. 그치, 여보!”
“그럼요. 여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했던 첫 번째 여행을 늙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다네. 그러니 얼른 사과하게.”
“네, 충고 고맙습니다. 부인!”
“허허, 제대로 된 젊은이지?”
“네, 여보!”
“자, 우린 이만 가네. 행복한 신혼이 되길 빌면서…….”
말을 마친 노부부가 갈 길을 간다. 노인은 집고 있던 지팡이로 허공을 두어 번 찌른다. 잘하라는 뜻인 듯하다.
그런데 어느새 수정의 울음이 그쳐 있다.
“오빠! 웬 러시아어를 그렇게 잘해요?”
수정은 현지인과 대화하는 현수를 괴물 바라보듯 보고 있었다. 여전히 축축하게 젖은 눈망울이다.
“그냥, 조금 배워둔 거야. 그나저나 이제 다 울었어? 눈물 때문에 화장 많이 지워졌는데?”
“어머! 정말요? 오빠, 잠깐만 기다려요.”
수정이 화들짝 놀라며 좌우로 고개를 돌리더니 오른쪽에 있던 건물 쪽으로 뛰어가며 소리친다.
“오빠, 기다려요. 금방 올게요.”
4장 얼떨결에 대통령 구하기
수정이 들어간 건물은 3층짜리로 대단히 호화로운 양식의 건물이다. 한때 러시아 최고의 백화점이란 명성을 얻었던 굼 백화점이다.
“저게 굼 백화점인 모양이구나. 흐음, 온 김에 구경 한번 해야지?”
수정의 뒤를 따라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하늘이 보인다.
3층 지붕이 유리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햇볕이 들어올 수 있어서인지 나무도 있고, 꽃도 피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