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57화 (157/1,307)

# 157

바닥엔 여러 색깔로 이루어진 대리석이 깔려 있고, 매대와 매대 사이의 간격은 널찍해서 좋았다. 한낮인지라 약간 붐비는 느낌이다.

현수는 수정이 들어갔음 직한 화장실 쪽으로 이동하여 구경을 했다. 백화점이라기보다는 박물관 비슷한 분위기였다.

“미안해요. 제가 조금 오래 걸렸죠?”

언제 울었느냐는 듯 수정의 얼굴은 밝았다.

“여기 들어온 김에 구경이나 해볼까?”

“호호, 네에.”

현수와 수정은 백화점 내부를 돌아다녔다.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것들의 집합소인 듯하다.

“어머! 이거 너무 예뻐요.”

수정이 걸음을 멈춘 곳은 굼 백화점 3층에 위치한 ‘앰버 룸(Amber room)’이란 상호를 단 보석상이다. 물론 러시아어로 쓰여 있다.

Янтарная комната! 호박방이라는 뜻이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호박방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궁 안의 여러 방 가운데 하나의 이름이다.

사방 14m, 높이 5m짜리 이 방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가 표토르 1세에게 선물한 것이다.

약 6톤에 달하는 호박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었던 방이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들이 약탈하여 현재는 빈 채로 남아 있다.

아무튼 수정은 진열장에 이마를 대고 진열된 보석들을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면서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세공에 혀를 내둘렀다.

보석엔 별다른 관심이 없기에 그저 한번 휘 둘러본 현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왠지 낯이 익은 사람이 앞에 있고 그 주위로 이십여 명이나 되는 양복 차림 사내가 뒤따르고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잘 훈련된 경호원인 듯하다. 대체 누군가 싶어 기억을 더듬는 사이에 일행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이 순간 현수의 뇌리로 맹렬한 불안감이 느껴진다. 즉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위기 조성용으로 배치한 화분이 보인다. 다른 것들은 전부 생생한데 하나만 시들해 보이는 것이 눈에 뜨인 것이다.

즉시 시선을 돌려 사방을 살폈다.

반대쪽 회랑에서 이쪽을 주시하는 사내가 있다. 머리털이 별로 없는 40대 사내이다. 긴장된 시선으로 현수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는 사내를 따라 시선이 이동되고 있다.

그 순간 현수의 뇌리로 다가오는 이가 누군지 스치고 지났다.

드미트리 아나토예비치 메드베데프(Dmitry Anatolyevich Medvedev)!

푸틴의 정치적 후계자로 지목되어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70%에 이르는 압도적 지지로 제3대 러시아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현수는 여전히 전시된 보석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수정의 허리를 잡아챘다. 그 순간 화들짝 놀라는 소리를 냈다.

“아악! 왜, 왜 이래요?”

현수는 대답 대신 수정을 기둥의 뒤쪽으로 잡아챘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을 목격한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무슨 일인가 싶은 시선을 보냈고, 경호원들도 일제히 긴장의 빛을 띄웠다.

이 순간 현수는 손으로 화분을 가리키곤 폭탄이 터지는 모양을 흉내 냈다. 제스처로 버섯구름을 나타낸 것이다.

머리 좋은 메드베데프가 몸을 돌려 기둥 뒤쪽으로 돌아서려는 순간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꽈아아앙―!

귀청이 찢어질 듯한 폭음 속에서도 전능의 팔찌는 제 기능을 다해냈다. 거의 즉각적인 보호막이 쳐진 것이다.

샤르르르릉―!

앱솔루트 배리어가 구현되었지만 현수와 수정을 감싼 마나의 장벽은 투명했기에 아무도 볼 수 없었다.

그 순간 현수는 혹시 있을지 모를 불상사로부터 수정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교구를 품에 안았다.

이 순간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쒜에에에엑! 퍼퍽! 퍼퍽! 퍼퍼퍼퍽!

챙그랑, 와장창창, 퍼억―!

콰쾅! 와장창! 와당탕탕! 콰당! 콰르릉!

범인의 귀에는 결코 들리지 않을 각종 소음이 현수의 귓전을 울렸다. 위기의 순간이 지난 후 배리어를 해제한 현수의 눈에 엉망이 된 현장이 뜨였다. 폭발로 인해 유리창이 깨지면서 수많은 파편이 사방에 흩어졌는지라 온통 엉망이다.

메드베데프 대통령 쪽을 보니 미처 피하지 못한 경호원들이 사방에 쓰러져 있다.

“오, 오빠……!”

“괜찮아. 우릴 노린 테러는 아니었어.”

“테, 테러……?”

“그래, 잠시만 기다려 봐.”

수정이 무언가를 또 물으려 했지만 현수는 개의치 않고 메드베데프 쪽으로 갔다. 경호원 둘이 위에서 보호하는 모양새였는데 심상치 않았던 때문이다.

“끝났습니다. 괜찮은 겁니까? 괜찮아요? 이런……!”

상황이 종결되었음을 알렸으나 움직임이 없다. 하여 흔들려던 양복 아래쪽으로부터 흥건한 피가 흘러나옴을 보게 되었다.

확인해 보니 폭발로 인한 파편이 박혀 즉사한 것 같다.

나머지 하나는 더 볼 것도 없는 사망이다. 화분의 파편이 뒤통수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님! 괜찮습니까?”

경호원들의 시신을 밀어내니 메드베데프의 등이 보인다.

혹시 다쳤을까 싶어 확인해 보았다. 하여 일으키려는 순간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선혈이 있다.

뒤집어보니 경호원을 관통한 파편이 박힌 것 같다.

“이런……!”

허리춤을 뚫고 들어간 파편은 쇠로 만든 갈고리처럼 생긴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것이 몸에 박혔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냥 놔두면 과도한 실혈로 사망하게 생겼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불행히도 경호원들은 모두 정상이 아닌 듯하다. 엄청난 굉음에 고막들을 상했거나, 부상을 입어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이런 제기랄! 할 수 없지. 이이잇! 큐어(Cure)!”

허리춤에 박혀 있던 갈고리를 뽑아내고는 마법을 구현시켰다. 그러자 부드러운 은빛 마나가 메드베데프의 허리춤으로 스며든다.

이제 미생물에 의한 감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상처가 서서히 아물면서 출혈량도 줄어들고 있다.

상위 마법인 컴플리트 힐을 쓰지 않은 이유는 혹시 모를 추가적인 공격을 제어하기 위함이었다.

철컥, 철컥―!

“꼼짝 마라!”

“경찰이다. 두 손 머리 위로 올려!”

현수는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하는 메드베데프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천천히 일어서라. 그리고 뒤로 돌아!”

경찰이 시키는 대로 뒤로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다치신 분은 메드베데프 대통령님이오. 어서 구급차를 부르시오.”

“뭐어……?”

“진짜다! 뭐해? 어서 구급차 불러!”

당황한 경찰들이 황급히 움직이는 동안에도 현수에게 겨눠진 총은 내려지지 않았다.

“나는 무고한 관광객이오. 쇼핑하다 테러 현장에 있었을 뿐이오.”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경찰서까지 가야 한다.”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거기에 대고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좋습니다. 가죠!”

현수는 수갑을 찬 채 모스크바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리곤 취조가 시작되었다. 단순한 진술이 아니기에 취조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외국인이며 동양인이다. 하여 다소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진술을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사 결과는 혐의 없음이다.

요즘 들어 부쩍 국력이 신장된 대한민국의 국민이며, 정상적인 비자로 입국했다.

러시아는 초행이며, 갓 도착하여 두 시간 정도 지났을 뿐이다.

입국 목적은 비즈니스이다. 물어보니 러시아로 약품 수출에 관한 상담을 하기 위함이다. 거래 상대는 드모비치 상사라는 곳이다.

확인해 보니 모든 것이 사실이다.

혐의점이라곤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자 더 이상 강압적이거나 무례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 이후이다.

풀어주지 않고 계속 방치해 놓은 상태를 유지한 것이다.

“이보시오. 무고함이 밝혀졌으면 보내줘야 하는 거 아니오?”

“잠시만 기다리시오. 상부의 지시가 아직 없소.”

“끄으응! 이런 경우가 어디 있소?”

나지막이 투덜거렸으나 러시아 경찰들은 본 체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진다.

“……!”

“김현수 씨! 당신은 석방이오. 이제 가도 좋소.”

“잠깐! 석방이라니? 내가 무슨 죄인이오?”

“아! 미안하오. 사과하오, 아무튼 혐의 없으니 가도 좋소. 즐거운 여행되길 바라오.”

다소 경직된 표정을 한 경찰의 성의없는 말에 어이가 없었으나 어쩌겠는가! 내 나라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을 상대로 핏대 올려봤자 나만 손해이다.

“오빠! 괜찮아요?”

경찰서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수정이 쪼르르 달려와 품에 안긴다. 한 번 안아줬더니 습관 들이려는 기세이다.

“응, 괜찮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그나저나 다친 덴 없어요? 아까 거기서 세 명이나 죽고 열여섯 명이 부상당했대요.”

“난 다친 데 없어.”

“휴우! 정말 다행이에요.”

“거기에 기둥이 있어서 운이 좋았던 거지.”

“그래도요. 그 근처가 아주 엉망이 되었어요. 우리만 멀쩡했던 거 같아요. 고마워요. 오빠! 제가 멀쩡한 건 오빠 덕이에요.”

“그래.”

현수는 앱솔루트 배리어에 수없이 부딪쳤던 파편들을 떠올렸다.

만일 마법 방어막이 없었다면 최소한 수십 군데 이상 파편이 박혔을 것이다.

“이제 가요.”

“그래, 어디 가서 뭘 좀 먹자.”

“네,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팠어요.”

냉큼 팔짱을 낀 수정이 현수를 이끌었다. 레스토랑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몸짓이기에 끄는 대로 따라갔다.

“이 집 음식이 아주 맛있어요.”

“안젤리코스?”

“네, 얼마 전에 새로 지은 건데요, 지중해 특산요리가 아주 맛이 있는 집이에요. 디저트도 좋구요.”

“오케이.”

둘은 다정스레 식사를 하는 동안 여러 이야길 주고받았다.

하지만 현수에게 진짜 여자친구가 있느냐는 것은 묻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듯하다. 현수 역시 그것에 대해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사람 많은 식당에서 울리기 싫었던 때문이다.

식사 후 둘은 자리를 옮겼다. 분위기 좋은 카페이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도록 둘이 나란히 앉는 자리를 택했다.

수정이 팔짱을 끼고 머리를 기대자 현수가 수정의 손을 잡았다.

이제 다시 비행하여 귀국해야 하는데 또 아홉 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나 디텍션!”

수정이 들을 수 없도록 나직이 중얼거리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곤 수정의 체내를 샅샅이 살폈다.

전과 다를 바 없이 건강하다.

‘그렇다면 정신 쪽에 문제가 있다는 건데……. 어떻게 하지? 으으음! 에라, 모르겠다. 한번 해보자.’

“슬립!”

현수의 중얼거림에 수정의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잠이 든 것이다.

“메모리 스캔!”

상대의 기억을 읽어내는 7써클 마법이 시전되자 감겨 있는 수정의 눈이 심하게 흔들린다. 램 수면 상태 비슷하게 된 것이다.

수정은 꿈에서 자신의 기억을 빠른 속도로 읽어갔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 무렵이다.

수정의 기억을 함께 보고 있던 현수는 일곱 살쯤 된 꼬맹이가 비행기 화장실에서 몹시 괴로워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왜 그런가 싶어 이전 기억을 보니 수연과 먹을 것을 가지고 다투고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귀엽다면서 준 수제 쿠키를 서로 먹겠다고 싸운 것이다.

수정은 힘으로 두 개 모두를 차지하고는 빠른 속도로 먹어치웠다. 그것이 체해 고통스러워한 것이다.

나머지 기억까지 모두 읽었으나 별다른 것이 없었다.

“매직 캔슬! 메모리 리스캔! 흐음, 메모리 일리머네이션!”

다시 기억을 읽은 현수는 비행기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의 전후를 일괄 삭제시켰다. 백업되어 있는 무의식에서조차 지워 버렸다.

세계 최고의 정신과 의사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흐음, 이게 효과가 있으면 좋겠는데.”

현수의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대단히 많은 마나를 소모시키는 일이며, 아울러 심력 소모 또한 큰일이기 때문이다.

“어웨이크!”

“끄으응……!”

“잘 잤어?”

“어머나, 죄송해요. 제가 깜박 잠이 들었나 봐요.”

“배부르면 누구나 그런 건데 뭘!”

현수가 별일 아니라는 듯 식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저, 보기 흉했죠. 코는 안 골았어요?”

“골았어, 드르렁드르렁……! 그리고 침도 흘렸고.”

“네에? 정말요……? 어머나, 나 어떻게 해요.”

수정이 화들짝 놀라더니 핸드백에서 거울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살핀다. 그러는 동안 현수는 묵묵히 나머지 커피를 마셨다.

카페를 나온 둘은 택시 정류장 쪽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가면서 뭣 좀 먹어봐. 아홉 시간이면 너무 길잖아.”

“그럼 꼭 체해서 안 돼요.”

“그럼 착륙하기 30분 전쯤에 먹어보든지.”

“알았어요. 오빠가 하라고 그랬으니 한번 해볼게요.”

“잘 가!”

“네, 서울에서 만나요.”

수정이 택시를 타고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현수는 공중전화박스로 들어갔다. 그리곤 천천히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이바노프 상사입니다.”

“실례합니다만 뭣 좀 여쭙겠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어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미얀마 선적 부르뎅호가 입항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잠깐만요. 흐음, 서류상으론 그런 배가 입항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오늘 입항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도 입항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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