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그럴 리가 없는데요?”
“그래요? 의견차가 있군요. 지금 계신 곳은 어디입니까?”
“붉은 광장 부근입니다.”
“그렇다면 만나서 이야길 하죠. 한 시간 후에 바실리 성당 입구에서 뵈었으면 합니다.”
“네. 저는 성당 구경이나 하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현수는 진짜로 바실리 성당 구경을 했다. 과연 세계적인 관광지가 될 만한 곳이었기에 계속해서 탄성을 터뜨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건다.
“서울에서 오셨습니까?”
“네, 드미트리 씨의 소개로 왔습니다.”
“차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죠.”
현수는 주차되어 있던 벤츠에 올랐다.
유리창 안쪽에 자그마한 스티커가 있어 읽어보니 ‘уленепробиваемым стеклом’라 쓰여 있다. 방탄유리라는 뜻이다.
“어디로 가는 거죠?”
“공항으로 갑니다.”
“공항? 비행기로 이동하는 겁니까?”
“네, 귀빈께선 노보로시스크까지 비행해서 가시게 될 겁니다.”
“그렇군요.”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현수는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에만 시선을 두었다.
잠시 후, 현수는 항공기에 탑승했다. 그리곤 곧장 노보로시스크로 날아갔다.
“김현수 사장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르코프라 불러주십시오.”
호텔 커피숍에서 기다린 사람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상당히 인상이 괜찮아 보이는 사내였다.
드미트리와 관련이 있으니 분명 레드 마피아의 조직원이다. 그럼에도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중후한 사업가 같다.
“네, 반갑네요. 미스터 지르코프!”
“와우! 우리 러시아어를 아주 잘하시는군요.”
지르코프는 고르고 흰 이를 드러내며 웃음 지었다.
“네에, 러시아어에 관심이 많아 공부 좀 했지요.”
“하하, 그러셨군요. 아무튼 대단히 유창합니다.”
현수가 있는 곳은 ‘이든 노보로시스크 호텔’ 최상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이다. 바닷가에 자리 잡아 풍광이 제법 괜찮은 곳이다.
“비행하느라 힘드셨을 테니 음식부터 먹죠.”
“그럽시다.”
지르코프가 손짓을 하자 멀찌감치 서서 기다리고 있던 웨이터가 쪼르르 달려와 주문을 받았다.
지르코프는 현수에게 무엇을 먹고 싶으냐고 메뉴판을 넘겼다. 이에 가장 러시아적인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지르코프는 몹시 흡족한 듯 큰 소리로 웃고는 주문했다.
샤실릭2)과 삘메니3), 그리고 샤우르마4), 블린5), 보르쉬6), 솔랸카7), 흑빵 등을 주문한 것이다. 물론 보드카도 포함되어 있다.
잠시 후, 음식들이 나왔다.
요리장의 솜씨가 좋아서인지 아주 맛있게 먹었다.
하여 어떻게 요리하는 것인지를 물었다. 이에 요리장이 직접 조리기구를 가져와 시연까지 해서 보여주었다.
현수가 이것을 물은 이유는 모두 아르센 대륙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요리였기 때문이다.
일전에 머물렀던 테세린에서 먹은 음식이라곤 스튜와 스테이크 종류가 전부였다. 다른 것들이 또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밖에 없다면 새로운 요리를 전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요리장은 딱 한 번 보고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었지만 현수의 뇌리엔 모든 조리 과정이 영화의 필름처럼 찍혀 있다.
간간이 물어봤던 것들까지 더해지면 똑같지는 않겠지만 아주 비슷한 정도까지는 가능할 것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치고는 한 층을 내려갔다. 바(Bar)가 있다. 고급스런 인테리어를 갖춘 칵테일 바였다.
바텐더가 원하는 것이 있냐고 묻기에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레인보우를 주문했다.
바텐더는 그쯤은 문제없다는 듯 상냥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곤 그레나딘 시럽, 크렘 드 카카오 브라운, 크렘 드 민트그린, 블루 큐라소, 갈리아노, 트리플섹, 브랜디를 각기 1/7씩 플로팅했다.
일곱 가지 색깔을 가진 칵테일이 만들어진 것이다.
알콜도수가 36 쯤 되는지라 약간 독했지만 달콤한 맛이 더 강했다.
현수가 한잔을 거의 비웠을 즈음 지르코프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김 사장님! 모처럼 러시아에 왔는데 나 같은 사람보다는 젊고 발랄한 아가씨와 함께 있는 게 좋지 않겠소?”
“네……?”
무슨 뜻이냐는 물음이었지만 지르코프는 그러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듯 환한 웃음을 짓는다. 그리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한국인의 기상을 보여주시오. 그럼 나는 이만! 김 사장님을 모실 아가씨는 금방 올 것이오.”
“……!”
무슨 기상을 보여 달라는 뜻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지르코프는 사라졌다.
현수가 이렇듯 맹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레인보우를 비우는 동안 지르코프가 한 말 때문이다.
내일 오후 2시에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보내질 화물에 대한 확인 작업이 실시된다. 현수는 모든 컨테이너를 일일이 확인하겠다고 했다.
그럴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지르코프가 일일이 확인하기엔 너무 많으니 몇 개만 골라서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을 했다.
하여 그럴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약간 불만족스런 표정이었지만 지르코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담기는지 보여주려고 부른 것이니 그러라 한 것이다.
대신 오후 6시는 넘기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했다. 왜 그러느냐는 물음에 모스크바로 가서 보스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2009년 10월, 러시아 마피아의 대부인 이바노프가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이후 누가 두목이 되었는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를 만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지르코프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혼자만 남겨놓고 지르코프가 사라지자 현수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어딘가에 있으면 데리러 올 것이다. 하여 편한 마음으로 바텐더에게 레인보우 한 잔을 더 청했다.
아주 조심스런 플로팅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현수는 칵테일이 제조되는 과정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때 향긋한 냄새와 더불어 누군가가 곁에 앉는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리냐 파블로비치 체홉이라 해요.”
“……? 누구신지요?”
“지르코프 사장님이 모시라고 해서 왔어요.”
“미스터 지르코프가……?”
현수는 이제야 조금 전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았다.
시커먼 사내랑 있는 것보다는 늘씬하게 빠진 미녀와 있으라는 뜻으로 사라져 준 것이다. 하긴 더 이상 나눌 말도 없었다.
화물 확인 이외엔 공통적인 관심사항이 없기 때문이다.
“저도 술 한잔 마셔도 되죠?”
“물론이에요.”
흘깃 바라보던 현수의 눈이 커진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대단한 미녀였다. 이 세상 어떤 슈퍼모델 선발대회에 나가든 단박에 대상을 거머쥘 만큼 늘씬하면서도 뇌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미녀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른 치열을 드러낸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황홀한 웃음이다.
“그럼, 미스트르 킴(Мистер Ким)이 권해주는 칵테일을 마시고 싶네요. 무엇으로 권해주실 거죠?”
“으음……!”
평상시 칵테일을 즐기지 않기에 이름만 아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중에서 여성에게 적합한 것을 생각해 내느라 잠시 말을 끊은 것이다.
“데낄라 선라이즈(Tequila Sunrise) 어때요?”
이것은 오렌지 주스와 그레나딘 시럽8)이 주원료인 칵테일이다.
데낄라라는 술의 고향인 멕시코의 일출을 형상화한 것으로 시각적인 아름다움까지 즐길 수 있다.
“어머! 저, 그거 좋아해요. 달콤하잖아요.”
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다. 그러는 사이에 눈치 빠른 바텐더는 부지런히 데낄라 선라이즈를 만들고 있었다.
“이리냐라고 불러도 돼요?”
“물론이에요, 미스트르 킴! 그런데 어디서 오신 분인가요? 일본인이세요? 아님 지나인? 그것도 아니면 베트남……?”
“아뇨, 한국인이에요.”
“아, 코리아(Корея)! 저 알아요. 초코파이, 도시락, 마요네즈 진짜 맛있어요. 핸드폰, 텔레비전도 정말 좋아요.”
“하하, 그래요?”
“네, 그중에서도 전 도시락이 제일 맛있어요.”
“그건 많이 먹으면 뚱보 돼요.”
“네에. 알아요. 근데 너무 맛이 있어서 자꾸만 먹게 되요.”
“이리냐, 몸매 망가지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K―pop에 맞춰 춤을 춰요. 그럼 살이 빠지거든요.”
이리냐가 춤추는 동작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키도 크고, 팔다리도 길어서 그런지 조금 어색한 느낌이다.
“이리냐, 직업은 뭐예요?”
“지금은 대학 다녀요. 졸업 후엔 모델 할 거예요.”
“모델?”
“네, 나하고 이름이 비슷한 이리냐라는 모델을 아시나요?”
“으음, 혹시 축구선수 호날두의 여자친구 이리냐 샤크(Irina Shaykhlislamova)를 말하는 거예요?”
“맞아요. 그 이리냐처럼 되고 싶어요.”
“슈퍼모델이 되고 싶은 거예요? 아님 세계적인 축구선수의 여자친구가 되고 싶은 거예요?”
“당연히 모델이죠.”
“그럼 술도 적게 마셔야 하고, 도시락도 덜 먹어야 하고, 운동은 열심히 해야겠군요.”
이리냐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에요. 그래서 날마다 운동 열심히 해요.”
이리냐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팔 근육을 보여주려고 했다. 물론 늘씬하기만 할 뿐 울퉁불퉁한 근육 따윈 보이지 않는다.
현수는 지르코프가 어떤 의도로 이리냐를 보냈는지 알지만 같은 침대를 쓸 생각은 없다. 그렇기에 일부러 일상적인 대화만 했다.
한 시간쯤 지난 뒤 이리냐가 보챈다. 룸으로 가자는 것이다. 그리곤 이든 노보로시스크 호텔에서 가장 좋은 스위트룸으로 인도했다.
창밖의 풍광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앉은 현수는 따끈한 커피를 마시고 있다.
같은 순간, 이리냐 파블로비치 체홉이란 긴 이름을 가진 아가씨는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룸에 들어와 먼저 샤워를 하도록 하고 침대에 누우라고 말을 했다.
이리냐는 잠시 머뭇거리긴 했으나 현수의 뜻대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물론 목욕 가운만 걸친 채이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눕자 현수는 딱 두 글자, 슬립이란 말을 했다. 그래서 잠들어 버린 것이다.
잠시 후, 몸을 일으킨 현수는 아공간에 담긴 각종 판금재료들을 꺼냈다. 그리곤 자그마한 스테인리스 철판에 기하학적이면서도 예술적인 문양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네 시간쯤 지난 후, 자신이 만든 것을 세심히 살핀 현수는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크기가 조금 크군. 리듀스드 하프(Reduced half)!”
가로 세로 각기 1m쯤 되던 스테인리스 철판이 사방 50㎝ 정도로 줄어들었다.
“리듀스드 하프! 리듀스드 하프!”
두 번 더 마법을 구현시키자 25㎝ 정도로 줄더니 다시 12.5㎝로 줄어들었다.
“흐음, 이 정도면 될까? 아냐, 조금 크다. 리듀스드 하프!”
가로 세로 6.25㎝ 정도로 줄어들자 손안에 딱 들어온다.
고개를 끄덕여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짓고는 아공간에서 중급 마나석 자루를 꺼냈다. 그리곤 그중 일부를 골라냈다.
직경이 4㎜쯤 되는 것들이다.
“워터 드릴!”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지정한 곳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섯 개의 구멍이 뚫리자 아공간에서 스테인리스 철판을 꺼내 같은 크기로 재단해 냈다.
그것들은 최초로 제작된 것들 위에 차곡차곡 쌓았다.
“퍼펙트 카피!”
샤르르르릉―!
마법이 구현되자 똑같은 문양이 새겨진 것들이 제작되었다.
“흐음, 이제 되었나? 워터 드릴!”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각각의 철판에 구멍을 뚫는 작업도 만만치 않은 심력을 소모시켰다. 정확한 자리에 일정한 크기의 구멍을 뚫는 일은 현대적인 공구로도 신경 쓰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새벽이 다가오자 현수는 슬그머니 호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인적 드문 곳을 찾아 결계를 쳤다. 다음엔 타임 딜레이 마법을 구현시켰다. 물론 마나 집적진을 깔고 앉은 채였다.
오전 6시 30분, 체내의 마나량을 점검한 현수는 호텔로 되돌아갔다. 그리곤 샤워를 했다.
“어웨이크!”
“끄응……! 어머나!”
깊은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던 이리냐는 자신이 했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도브라에 우뜨라(доброе утро)!”
현수가 한 러시아어로 좋은 아침(Good morning)이라는 말에 이리냐는 울상이 되었다.
“미스트르 킴!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어제, 이리냐는 지르코프로부터 상당히 많은 돈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윤락녀들이 받는 화대는 대개 100달러 정도 된다. 물론 그보다 많은 돈을 받는 경우도 있다.
최고등급이라도 700달러는 넘지 않는다.
5장 제발 살려주세요
어쨌거나 이리냐는 윤락녀가 아니다.
그런데 어제 지르코프로부터 2,500달러나 받았다. 처녀인데다 얼굴 예쁘고, 몸매까지 받쳐주었기에 그 돈을 준다고 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상대해 줄 사내에게 최상의 만족감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수가 이곳에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지르코프는 드미트리로부터 장문의 이메일을 받았다.
그 결과 한국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들에 대한 것들을 알게 되었다. 드미트리는 성경험이 없는, 몸매 날씬하고, 어여쁜 처녀를 준비해 놓는 것이 좋을 것이란 충고를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