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부활한 사람을 다시 시체로 되돌리는 것보다는 죽이는 편이 빠르기 때문에 취소 마법이 없는 것이다.
매혹 마법 역시 그러하다. 한 번 시전되면 그 효과가 다 할 때까지 캔슬이 불가능한 마법이다.
따라서 책임질 수 없는 여자에게 극도의 호감을 갖게 하여 평생 고독한 삶을 살게 할 수는 없다.
현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나하곤 상관없으니까…….”
나직이 중얼거린 현수는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조용히 잠들었다.
“으응……?”
문득 느껴지는 괴이한 촉감에 눈을 뜬 현수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어느새 깨어난 이리냐가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냐!”
“어머나!”
화들짝 놀라 떨어지려던 이리냐가 다시 달려든다. 가슴에서 뭉클한 느낌이 든다.
“미스트르 킴! 아직 이른 새벽이에요. 조금 더 자요.”
“……!”
현수는 품에 안긴 이리냐를 보곤 얼른 몸을 움츠렸다. 완전히 발가벗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냐! 나 일어나야 해.”
“미스트르 킴……! 이리냐는 이제 미스트르 킴의 것이에요. 언제든 가지셔도 돼요.”
“아냐! 우린 만난 지 이제 겨우 이틀이야. 이리냐가 좋은 여자라는 것은 알지만 이렇게 맺어지는 관계는 싫어.”
“미스트르 킴……!”
“난 러시아를 떠나면 언제 다시 올지 몰라. 그래서 이리냐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아.”
“……! 그래도 괜찮아요. 이리냐는 미스트르 킴이 좋아요.”
“이리냐, 이러지 마. 인생은 한 번뿐이야. 그리고 이건 실수일 수도 있는 일이야.”
“……!”
이리냐는 현수의 말에서 의미를 찾는 듯 잠시 침묵했다.
“그래도 괜찮아요. 이리냐는 미스트르 킴을 좋아해요.”
“……!”
이번엔 현수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리냐의 눈빛에서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인연을 맺겠는가!
인종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며, 살아온 세월도 다르다. 결정적인 것은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리냐! 그래도 이건 아냐. 우리가 만난 지 이제 겨우 이틀이잖아. 이리냐가 생각한 만큼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그러니까 이러지 마.”
이리냐는 잠시 현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미스트르 킴은 분명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일 수가 없어요. 이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어요. 휴우……! 좋아요. 이토록 배려하시니 더 깊이 생각해 볼게요. 하지만 하나는 약속해 줘요.”
현수는 이리냐가 한발 물러선다는 생각에 얼른 반문했다.
“뭐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는 꼭… 날 가져요. 아니, 이리냐의 몸과 마음을 모두 받아줘요.”
현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 머릿속으론 수많은 상념이 흘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시 러시아에 올 일은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드모비치 상사와의 거래는 서류만으로도 충분하고, 방문해야 할 일이 생기면 새로 뽑을 직원을 보내면 된다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그래, 그때는 기쁜 마음으로 이리냐를 안아줄게.”
“약속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그냥은 안 돼요.”
“고마, 으읍……!”
현수의 두 번째 키스 역시 여인이 능동적이었다. 첫 번째는 대구의 권지현, 두 번째는 러시아의 이리냐이다.
또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프렌치 키스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입술과 입술이 잠시 맞닿았다 떨어지는 그런 입맞춤이었다.
현수와 이리냐가 아침 식사를 마쳤을 즈음 알렉세이 이바노비치가 부하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아! 미스터 알렉세이!”
“오늘 떠난다고 들었소.”
“네, 11시 30분 비행기로 떠납니다.”
“다음에 또 만났으면 좋겠소.”
“네, 저도 보스와의 만남이 좋았습니다.”
현수는 접대용 인사를 했다.
“아직 시간이 있는데 무엇을 할 참이오?”
“이리냐와 노보데치비 수도원 구경을 가려 했습니다.”
“이봐, 억시모프!”
“네, 보스!”
“미스트르 킴과 이리냐 양이 수도원 구경을 잘 하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네, 알겠습니다.”
억시모프라는 사내가 조치를 취하기 위해 황급히 물러났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알렉세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스트르 킴! 있는 동안 내 차를 이용하시오.”
“……! 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건 내 명함이오. 언제든 연락 주시오.”
마피아의 전화번호는 국가 비밀 수준으로 보호된다. 위치 추적의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직통 전화번호를 준 것이다.
현수는 정중히 고개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잠시 후, 현수는 리무진의 뒷좌석에 앉아 창밖 풍경을 감상했다. 그의 품에는 이리냐가 안겨 있었다.
그녀의 눈엔 존경과 사랑의 빛이 감돌았다.
마피아 보스들조차 정중하고, 대통령과 단독 면담을 할 정도로 거물이면서도 조금도 거만하지 않다.
키도 크고, 잘 생겼으며, 싸움도 엄청 잘 한다.
코만도 삼보를 익혔기에 어젯밤 현수의 현란한 움직임이 어느 수준인지를 가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자를 배려할 줄 아는 이 사내의 여인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기에 스스로 품속을 파고든 것이다.
둘이 수도원 입구에 당도한 시각은 오전 8시경이다.
이곳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만 입장 가능하다. 하나 현수와 이리냐를 위해 정문이 활짝 열려 있다.
단둘만의 아침 산책이 시작된 것이다.
과연 러시아의 보물이라 할 만큼 아름답고 잘 가꿔진 곳이었다. 천천히 걷는 동안 이리냐는 수없이 다짐을 요구했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꼭 자신의 몸과 마음 모두를 가져갈 것을 거듭해서 확인한 것이다.
현수는 했던 약속이기에 매번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나 러시아에 다시 올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에 아주 상냥하고 부드럽게 대해주었다.
아름다운 수도원 건물을 거쳐 연못가를 산책하던 현수는 미안한 마음을 대신할 것을 생각해 냈다.
하여 이리냐가 눈치채지 못하는 순간 아공간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꺼냈다.
패랭이 꽃 모양으로 세팅된 작은 반지이다.
가운데엔 붉은 루비가 박혀 있고, 다섯 장의 꽃잎을 상징하는 자수정이 둘러싼 앙증맞은 것이다.
본초강목에 의하면 자수정은 심장의 기가 부족한 것을 보하고, 경계증을 치료하며, 정신을 안정시키는 효능이 있다.
또한, 자궁을 따뜻하게 해주며, 얼굴에 윤기가 나게 한다.
이밖에도 여러 효능이 있는 보석이다.
어쨌든 가운데 박힌 루비는 루비가 아니다. 루비 같은 색을 지닌 상급 마나석이다.
사실 이 반지는 마법이 인챈트된 일종의 아티팩트이다.
멀린이 마법 연구를 위해 레어에 머물던 때 사랑하는 아내 프리실라 드 카세리온을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들고 나왔을 때 아내는 두 아들과 함께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은 뒤였다.
그렇기에 주인을 잃고 아공간에 처박혀 있었다.
아무튼 이 반지는 자수정이 가진 효능을 극대화시켜 여인의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질병으로부터 안전을 유지하게 하는 면역력 증진 마법 임플로빙 이뮤너티(Improving Immunity)가 걸려 있다.
마법 연구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멀린의 마음이 담긴 반지이다.
“이리냐! 아까부터 자꾸 다짐해 달라고 하는데 그런다고 했잖아. 내가 그 증표로 이걸 줄게.”
방금 전에도 이리냐는 다시 만나면 반드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지라는 약속을 하라 하였던 것이다.
“네? 증표요?”
“그래! 자, 이거 받아.”
“어머! 이거 웬 반지에요? 와우, 너무 예뻐요.”
현수가 내민 반지를 받은 이리냐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에 끼웠다. 약간 클 것이라 생각했는데 꼭 맞는다는 느낌이 드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실 반지가 스르르 줄어든 것임을 이리냐는 당연히 모른다.
“이제 다시는 약속하라고 하지 말아. 알았지?”
“호호, 네에.”
이리냐는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반지를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러던 중 어디서 많이 본 형태라는 생각을 했다.
“어머, 이건 Chinese pink 모양이네요.”
“맞아, 한국어론 패랭이꽃이라 하지.”
“혹시 이 꽃의 꽃말을 아세요?”
“꽃말……?”
사내인 현수가 어찌 꽃말까지 알겠는가!
하여 말끝을 흐렸다. 알려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리냐는 가르쳐 줄 마음이 없다는 듯 반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녀의 뇌리로 패랭이꽃의 꽃말 ‘영원하고 순결한 사랑’이라는 뜻이 스치고 있었다.
‘그럴게요.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당신을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이리냐는 미스트르 킴만 생각할 거예요.’
일정을 마치고 공항에 당도하여 런던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시간이 되자 이리냐가 눈물 흘린다.
“흐흑! 꼭 오셔야 해요. 아셨죠? 꼭이요.”
“그래. 온다고 했잖아. 그러니 울지 마. 알았지?”
“네, 이리냐는 미스트르 킴을 믿어요. 그리고 이리냐는 미스트르 킴만의 여인이에요. 잊지 마세요.”
현수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고 이리냐는 그걸 철석같이 믿는 표정이다. 내심 미안했지만 어쩌겠는가!
잠시 후, 현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리냐는 잘 보이지도 않건만 잘 가라고 손을 흔들며 눈물 흘렸다.
“쩝……!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군. 하지만 세월이 약이겠지? 몇 년 지나면 나를 만난 것조차 까맣게 잊게 될 거야.”
안전벨트를 맨 현수는 눈을 감았다.
이리냐는 현수를 볼 수 없지만 현수에겐 이리냐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이륙한 직후 이리냐는 억시모프가 운전하는 리무진을 타고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에게 불려갔다.
그리곤 굼 백화점에서의 쇼핑이 시작되었다. 알렉세이는 돈을 아끼지 않고 이리냐를 치장시켰다.
이날 밤 이리냐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노보로시스크로 향했다. 놀랍게도 공항까지 마중 나온 사람은 지르코프이다.
정중히 고개 숙인 지르코프는 이리냐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알렸다. 보스의 손님이자 대통령과 단독 면담하는 김현수의 여인으로 공식 인정된 것이다.
이날 이후 이리냐는 돈 걱정하지 않는 여자가 된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충당되고, 살던 낡은 아파트를 떠나 맨션으로 이사한다. 모든 집기가 바뀌며, 24시간 경호를 받는 여인이 된다.
이리냐는 왜 이런 대접을 받는지 안다. 그렇기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하고, 몸매를 가꾼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몽땅 한국어 공부에 매진한다. 언젠가 만나게 될 현수와 한국어로 대화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리냐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될 사람은 조금 독특하다.
현수와의 인연을 모두 듣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따라하게 만든다.
“서방님을 사랑해요! 이리냐는 서방님의 여자예요. 서방님만 있으면 늘 행복해요. 서방님의 아이를 낳고 싶어요.”
“이리냐, 조금 더 나긋나긋하게. 그래 가지고 이리냐를 사랑해 주려는 마음이 들겠어? 자, 다시 따라해 봐.”
“네에.”
“서방님, 전 서방님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 수 없어요. 꼭 안아줘요. 그리고 입 맞춰줘요. 아아, 서방님, 사랑해요.”
이리냐를 가르칠 여인은 올해 마흔세 살 된 한국인이다.
못생긴 외모 때문에 남자친구가 없었던 이 여인은 이리냐에게 이상한 것만 가르친다. 하여 현수가 웃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된다.
* * *
“여기 투숙객 중 강연희 씨를 만나려고 왔습니다. 연결해 주시겠습니까?”
현수의 정중한 말에 ‘노보텔 런던 웨스트 호텔’의 데스크 직원이 잠시 키보드를 두드린다.
모스크바에서 곧장 런던으로 날아온 현수는 인사부 이준섭 차장으로 이야기 들은 이 호텔로 직행했다.
그리곤 부푼 마음으로 데스크로 온 것이다.
“손님, 죄송한데 강연희 씨는 어제 체크아웃 했습니다.”
“네에? 어제요?”
“네, 어제 체크아웃 하셨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시나요?”
“아뇨. 알지 못합니다.”
“이런……!”
현수가 눈에 뜨이게 실망하는 표정을 짓자 데스크 직원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연다.
“강연희 씨는 체크아웃 할 때 혹시 연락이 있을지 모른다면서 이틀 후에 전화하신다고 했습니다.”
“정말요?”
“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한국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메모해 달라고 했습니다. 내일쯤 전화주신다고…….”
현수는 반색하며 지갑을 꺼냈다. 그리곤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려진 50파운드짜리 지폐 두 장을 건넸다.
“강연희 씨로부터 연락이 오면 저와 통화할 수 있도록 해주실 수 있습니까?”
데스크 직원이 빙그레 웃으며 지폐를 챙긴다.
“물론입니다. 어디에 머무시는지요?”
“이 호텔에 체크인 하겠습니다.”
“네, 그럼 여권을 주십시오.”
투숙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룸에 발을 들여놓은 현수는 샤워를 하곤 밖으로 나섰다.
영국에 오기 쉽지 않는데 기왕에 왔으니 구경이나 하려는 것이다.
먼저 버킹검 궁전 구경을 했다. 마침 전통 복장을 한 근위병 교대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음엔 타워 브릿지와 빅벤 구경을 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세인트 폴 대성당도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