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164화 (164/1,307)

# 164

여러 건축물들을 보던 중 문득 아르센 대륙이 떠올랐다. 비슷한 양식의 건축물이 있기 때문이다.

오후 늦게까지 관광을 하곤 호텔로 되돌아와 간단히 저녁 식사를 했다. 데스크 직원은 시선이 마주치자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문득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희미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밤이 되자 할 일이 없다. 현수는 다시 호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아무 버스나 집어탔다.

한국에선 볼 수 없는 2층 버스이다. 2층에 올라 여기저기를 구경하던 중 제법 웅장한 건물이 보인다.

내려서 물어보니 윈저성(Windsor Castle)이라고 한다.

템즈 강변에 위치한 윈저성을 보니 테세린에 있는 로니안 자작의 영주성이 떠올랐다.

밤이 이슥한 시각인지라 출입은 금지되어 있었다.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 플라이!”

현수가 투명 은신 마법과 비행 마법을 써서 오른 곳은 헨리 8세 게이트라는 곳이다.

참고로 헨리 8세는 여섯 명의 왕비를 두었던 유명한 왕이다.

“흐음! 좋군.”

밤이 깊어가는지라 게이트 위에는 쥐새끼 한 마리 없었다. 바람도 상쾌하게 불고 있었다.

하나 마냥 멍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앱솔루트 배리어! 타임 딜레이!”

결계를 치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도록 한 뒤 마나 집적진을 깔고 앉아 마나를 모았다. 별로 오래지 않아 전능의 팔찌에 박힌 마나석의 색깔이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서울보다 마나의 밀도가 훨씬 더 높은 듯하다.

“마나여, 나를 아르센 대륙으로!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스르르 사라졌다.

* * *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아직 식사 안 하셨으면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냐. 간단히 먹었어.”

“아! 네에. 그럼 간식이라도 준비하지요.”

현수는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자신이 안 먹으면 코찔찔이 세실리아나 로사가 먹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얀센이 주방으로 향하는 모습을 본 현수는 손을 꼽아보았다. 로사가 이제 아기 낳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흐음, 며칠 후면 낳겠군. 선물로 뭘 줄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현수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곤 아공간에서 여러 가지를 꺼냈다.

이리냐에게 주었던 반지와 비슷한 성능을 지닌 것을 만들어볼 생각을 한 것이다.

“이실리프여, 열려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법서가 허공에 둥둥 떠 있다. 표지에 손을 대고는 목차에서 원하는 페이지로 곧장 이동했다.

마법을 각종 기물에 인챈트하는 방법이 기록된 곳이다.

잠시 안력을 집중시켜 내용을 읽었다.

전능의 팔찌 안쪽에 새겨진 브레인 리프레쉬 마법 덕분에 두뇌가 나날이 좋아지는 중이다. 하여 단 한 번 읽는 것만으로도 내용을 충분히 숙지할 수 있었다.

“흐음, 이게 그런 내용이었군. 좋아, 이론은 알았으니 이제 실제를 행해 보실까? 참, 그 전에…….”

방을 나선 현수는 얀센을 불러 자신이 부르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의 접근도 막아달라는 말을 했다.

이에 카이로시아 아가씨와 로잘린 영애도 포함되느냐고 묻기에 그렇다 대답하고는 문을 닫았다.

연후에 씰(Seal) 마법으로 아예 문을 봉인했다. 마법 인챈트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다음엔 아공간에서 작업대를 꺼냈다. 멀린의 레어에 있던 것이다. 그리곤 각종 공구와 마나석 등을 꺼냈다.

메가 라이트 마법으로 붉을 밝힌 뒤 작업이 시작되었다. 해보니 여간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수가 누구인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결과 이리냐에게 주었던 것보다도 뛰어난 아티팩트를 만들어냈다.

제일 먼저 면역력 증진 마법을 걸었다. 새로 태어날 아이가 질병 없이 무럭무럭 자라나게 하기 위함이다.

다음엔 울트라사운드 커즈즈(Ultrasound causes) 마법을 인챈트했다. 3m 이내에 벌레나 짐승이 다가올 경우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초음파를 발생시키는 마법이다.

반지만 끼고 있으면 평생 벌레 물리지 않고, 짐승들로부터 해를 입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후후, 이제 확실히 알았네.”

무려 열두 개를 실패한 뒤에 성공시킨 반지를 집어 든 현수의 입가엔 만족스럽다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런데 배가 좀 고프군. 얀센!”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소리를 쳤다.

“네, 백작님!”

“배가 좀 고프네.”

“알겠습니다. 준비하죠.”

다시 방으로 들어간 현수가 주섬주섬 꺼냈던 물건을 정리할 때 카이로시아가 로잘린을 바라보며 눈빛을 빛냈다.

현수가 출입을 금한다는 말을 했다고 했기에 노크조차 하지 않고 옆방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로잘린! 이따가 백작님이 이상한 액체를 권할 수도 있어.”

카이로시아가 일부러 심각한 표정으로 나직이 속삭이자 로잘린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액체라니요?”

“색깔은 짙은 갈색이고, 향기는 매우 뛰어나. 그런데 뜨겁게 해서 마시는 거래. 로잘린이 아는 지식 중에서 혹시 이것과 관련된 거 없어?”

대놓고 말하긴 무엇하다는 표정이다.

“흐으음, 짙은 갈색에 좋은 향기, 뜨겁게 해서 마시는 거라면… 아……! 그거. 엄마한테 들은 적 있어요.”

“뭔지 알았어?”

“네, 그거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죠? 엄마가 그러셨어요. 그거 잘못 마시면 신세 망친다고…….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그걸 권하면 절대 마시면 안 된다고 했어요.”

“으음, 아는구나. 하긴 귀족가의 영애이니 그것에 대한 이야길 듣기는 했겠어.”

카이로시아는 나직이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기억을 떠 올렸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인 에델만 백작이 자신을 불렀다. 그리곤 아주 심각한 음성으로 똑같은 이야길 해주었다.

어미 없이 자라는 여식의 신상에 혹시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싶어 해준 이야기였다.

로잘린에겐 엄마가 있다. 그러니 당연히 들어봤을 것이다.

“근데요. 백작님이 그걸 왜 저한테 주신대요?”

“남자들한테는 그저 향기 좋은 음료밖에 안 된다잖아.”

“정말요? 백작님이 그걸 내게 권해요? 뭔지 알면서……?”

“백작님은 무의식중에 그러실 수 있어. 남자들에겐 아무런 효과도 없는 거니까. 그러니까 혹시라도 그걸 권하면 정중히 사양해. 알았지?”

“네에. 고마워요, 언니!”

로잘린은 카이로시아가 제국의 백작 가문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는 언니라 부르며 따르고 있다.

이때, 방문이 열리고 코찔찔이 세실리아가 들어온다.

“로잘린 아가씨, 카이로시아 아가씨! 식사 준비 다 되었대요. 내려오시래요.”

“그래. 알았다. 세실리아.”

“네에. 얼른 내려오세요. 전 백작 아저씨 데리러 갈게요.”

“그래, 그러렴. 애쓴다. 우리 세실리아!”

“네에에!”

잠시 후, 식탁엔 세 사람만 앉았다. 중앙엔 현수, 왼쪽엔 로잘린, 오른쪽엔 카이로시아이다. 맞은편엔 아무도 없다.

조금 전 현수는 문득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 오늘의 요리 재료 전부를 꺼내 놨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요리는 브로콜리와 베이컨 등이 주재료인 샐러드이다.

자두와 감자, 피칸(Pecan), 다진 양파, 마요네즈, 머스타드 소스, 식초, 설탕, 후추, 올리브유가 어우러진 것이다.

브로콜리는 위암과 위궤양을 일으키는 헬리코박터균을 억제하는 성분이 있다. 또한 항암, 항노화 기능이 있으며, 면역과 성장에 좋은 셀레늄을 함유한 식품이다.

부드러우면서도 맛이 있는 음식이었기에 둘은 먹기 경쟁이라도 하는 듯 아주 잘 먹었다.

현수는 식사 중간에 포도주 한 잔씩 권했다. 달착지근한 맛을 내는 레드 와인이다.

라벨을 보니 ‘모건 데이비드 콩코드’라 쓰여 있다.

마트에서 파는 미국산 와인이 그러하듯 발효과일 특유의 단맛을 낸다. 가격표엔 16,000원이라 쓰여 있다.

로잘린과 카이로시아 모두 달콤한 맛이 너무 좋다고 난리이다.

그러면서 말하길 아르센 대륙엔 이런 술이 없다고 한다. 코리아 제국의 위상이 또 한 번 올라가는 순간이다.

로잘린은 한국으로 따지면 열아홉 살 미성년자이지만 이 동네는 열여섯 살만 되도 시집을 간다.

따라서 미성년자 어쩌고 할 사람이 없기에 계속해서 건배를 하며 마셨다. 그런데 평상시에 술을 즐기지 않았는지 둘은 금방 취기를 느끼는 듯하다.

식사를 마친 후엔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가수 송창이 CM송을 부른 투게더 아이스크림이다.

시원하고 달콤한 맛에 당연히 환장을 한다. 숟가락으로 서로 많이 퍼 먹겠다고 다투기까지 할 정도였다.

8장 심야의 방문

다음에 등장한 것은 비장의 무기인 커피였다.

헤이즐넛 향이 피어오르자 로잘린의 코가 찡긋거린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달콤한 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짙은 갈색 액체에서 나는 향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로잘린의 움직임은 멈췄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다.

모르긴 몰라도 취기가 한 번에 가신 듯하다.

세실리아 자작부인은 로잘린에게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에 대한 설명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잘못 마시면 평생 남자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 한다고 과장해서 설명하기까지 했다. 그리곤 노예가 어떤 삶을 사는지 견학까지 시켜줬다.

당시의 로잘린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를 마시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바로 그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가 지금 눈앞에 있다.

자칫 잘못해서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씻을 수 없는 흔적이 남게 되며, 그것으로 인해 평생 사내의 성노(性奴)가 되게 된다는 것이다.

현수는 느긋한 표정으로 커피를 즐겼다. 그러던 중 문득 생각났다는 듯 로잘린을 바라본다.

시선을 받는 순간 로잘린은 흠칫했다. 독사의 눈길을 받은 생쥐가 꼼짝도 못하게 되는 그런 느낌이다.

“로잘린 양! 오늘 하루 종일 장사하느라 애썼는데 이거 한 잔 만들어 줄까요?”

“아, 아니에요. 괘, 괜찮아요. 전 진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 거 안 마셔도 돼요. 진짭니다.”

로잘린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진저리까지 쳤다.

“흠……! 그래요? 뭐 그렇다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시선을 돌린 현수는 또 한 모금을 마셨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번엔 카이로시아를 바라본다.

“로시아! 이거 한 잔 만들어 줄까?”

“저, 저요……?”

카이로시아는 짐짓 긴장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로잘린과 시선이 마주친다. 의도적인 것이다. 그런데 로잘린이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절대 그러지 말라는 뜻이다.

“어때? 한잔 마셔 볼래?”

“아, 아니에요. 됐습니다. 저도 안 마실래요.”

“그래? 뭐 그럼…….”

현수는 또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한 모금 들이켰다.

잠시 후, 카이로시아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로잘린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곤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연다.

“저어, 생각이 바뀌었어요. 저, 그거 한 잔 주세요. 한번 마셔보고 싶어요.”

“그래? 그럼. 흐음, 여기…….”

현수가 커피 한 잔을 만들어 건네자 로잘린의 눈이 커진다. 그런 그녀의 시선은 카이로시아에게 향해 있다.

대체 어쩌려고 이런 위험한 일을 자초하느냐는 눈빛이다. 하나 카이로시아는 로잘린을 바라보지 않았다.

현수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다.

한참을 그러더니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찻잔을 들어 커피를 마신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고도 남을 만큼 멋진 연기였다.

후루룩―!

“향을 즐기면서 조금씩……. 그렇게 조금씩 마셔야 제대로 마시는 거야.”

현수의 설명에 카이로시아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곤 시키는 대로 향을 깊게 들이켜고는 한 모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한편, 로잘린은 대체 어쩌려고 그러느냐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시선이라도 마주치면 눈짓이라도 하겠건만 카이로시아는 고요한 시선으로 커피 마시기에만 열중할 뿐이다.

그러다 가끔 현수의 얼굴을 바라본다. 왠지 붉게 상기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여 둘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번개처럼 스치는 상념이 있었다. 그 순간 로잘린의 이성은 마비되어 버렸다.

“백작님! 저도 한 잔 주세요.”

“……?”

둘은 예상치 못했던 돌발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지금쯤 안절부절못하면서 어떻게든 카이로시아로 하여금 커피 마시기를 멈추게 하려는 노력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로잘린 스스로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를 달라고 나선 것이다.

카이로시아는 ‘너 미쳤니?’라는 눈빛을 보냈다. 이에 로잘린은 ‘그래, 나 미쳤다’라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응수했다.

“저도 한 잔 달라니까요. 백작님!”

“그, 그러지 뭐.”

현수가 커피를 만들어주자 로잘린은 냉큼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곤 도전적인 시선으로 카이로시아를 일별하고는 망설임없이 입술을 가져간다.

“로, 로잘린 양……!”

벌컥―!

“앗! 뜨뜨뜨뜨…….”

뜨거운 커피에 입천장을 덴 듯하다.

“로잘린 양, 어쩌려고……?”

카이로시아가 만류하는 척하는 순간 로잘린은 다시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리곤 카이로시아를 째려본다.

잠시 멈춰 있던 순간은 불과 1∼2초이다.

로잘린은 머금고 있던 것을 꿀꺽 삼킨다. 그리곤 또 다시 머금었다 삼키기를 되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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