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귀족 사교계를 드나드는 동안 늘어나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읽는 기술과 권모술수뿐이라는 말이 있다.
세실리아 역시 자작의 부인으로서 꽤 많은 연회를 참석한 바 있다. 비록 귀족치고는 작위가 낮은 편이지만 워낙 미모가 빼어나 다들 아껴주었다.
그때 언니뻘 되는 백작가의 안주인, 후작가의 안주인들로부터 전수받은 것이 있다.
자고로 사내라는 동물을 사냥하려면 움켜쥐었다 풀어주었다를 반복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여 공식대로 일단 밀어붙인 것이다. 이젠 풀어줄 시간이다.
“흠흠, 시간을 드려도 아무런 대답이 없으니 제가 한 말씀만 더 드리죠.”
“네, 말씀하십시오.”
“초면에 뵈었을 때 아르센 대륙을 방문한 이유가 평생을 함께 하고픈 반려를 구하기 위함이라 들었습니다. 맞죠?”
“네……? 아, 네에.”
“아르센 대륙엔 여러 나라들이 있습니다. 각기 다른 법령과 풍습으로 살아가지요. 하나 딱 한 가지 같은 것이 있어요. 혹시 아시나요?”
“글쎄요?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직 이곳의 풍습을 전부 파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각본대로 되어감에 세실리아 자작부인은 내심 흐뭇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백작은 다섯 명의 처를 둘 수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네? 그게 무슨……?”
“일부다처제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백작님은 아직 혼례 전이라 하셨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거두절미하고 우리의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다섯 자리 가운데 하나를 주셔야겠습니다.”
“다섯 자리라니요? 아……!”
의문을 표하려던 현수는 말끝을 흐렸다. 세실리아 자작부인이 원하는 바를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구두로 한 약속도 약속이듯, 정신적인 순결도 순결이라는 거 잊지 마세요.”
“……!”
“압니다, 백작님이 장난으로 우리 로잘린에게 그러셨다는 것을……! 그리고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런 애정도 없다는 것도 압니다. 하나 책임질 일을 하셨으면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는 것이 귀족된 사람의 책무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그야…….”
현수는 대답이 궁색하여 또 말끝을 흐렸다.
“첫째 자리를 달라고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다섯 자리 가운데 하나를 비워달라는 것뿐입니다.”
“……!”
“제 요구가 너무 심한 요구인가요? 딸아이는 순결을 잃고 겁에 질려 울었습니다. 귀족의 딸로 자랐지만 평민의 성노로 팔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더군요. 백작님이 성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이 밖에 나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백작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이 대목에서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현수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부답했다.
“백작님께도 갑작스런 일인 것이 분명합니다. 하여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조만간 답변을 들었으면 하는군요.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네에.”
현수는 딱 두 글자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로니안 자작 일가는 마차를 타고 영주성으로 되돌아갔다.
빈방에 덩그러니 남게 된 현수는 한참을 눈을 감고 있었다. 상황이 이리 전개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듣고 보니 자신이 로니안 자작이었다면 후려 팼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럼에도 세실리아 자작부인은 아주 침착하고 논리적으로 대했다.
로잘린 로니안 드 테세린!
테세린 영지를 다스리는 로니안가의 로잘린이란 이름이다.
열아홉 살이니 한국 나이로 치면 스무 살이다. 이런 아가씨를 상대로 장난을 했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조금 심했다.
그 결과 결혼을 강요받았다. 그런데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책임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로잘린에 대한 호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재기 넘치고 발랄하며, 테세린 최고의 미녀로 추앙받는 아주 아름다운 아가씨이다. 미판테 왕국의 왕자마저 청혼했는데 딱지를 놓은 당찬 여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너무 순진하여 커피가 센트 오브 워머나이저라는 농담에 속아서 눈물을 쏙 빼기까지 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귀엽고, 명랑하며, 의욕적이고, 영리한 아가씨이다. 물론 몸매까지 뛰어나다.
‘나하고 나이 차이가 좀 나긴 하는데…….’
현수는 로잘린을 떠올리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여긴 다섯 자리라고……?’
아르센은 백작은 부인을 다섯이나 둘 수 있는 세상이다.
부인만 이러니 첩까지 치면 더 많은 여인을 거느린 백작들도 많을 것이다.
“흠, 사내들 입장에서 보면 좋은 세상이군. 후후!”
문득 카이로시아가 떠오른다.
이미 같은 침상을 썼다. 그리고 청혼하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반려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여자이다.
로잘린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가진 당찬 여인이다.
“흐으음! 여기서 결혼하게 되면 두 자리는 주인이 생긴 거군.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팔베개를 하고 누운 현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짹짹! 짹짹!
똑, 똑, 똑!
“끄응……! 누구……? 세실리아? 들어와.”
삐이꺽―!
문 여는 소리는 들렸는데 아무런 소리가 없다.
“안아줘? 그래, 그럼 들어와.”
현수는 잠결에 이불을 들췄다. 세실리아가 이불 속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아이가 아닌 듯하다. 하여 눈을 떴다.
“백작님 품이 너무 그리워서…….”
눈앞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보인다.
카이로시아는 새 침구에서 잠이 들었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자다가 깼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카이로시아는 일어나 의복을 걸쳤다. 그리곤 말을 타고 달렸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이곳 세실리아 여관이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곧이어 걸치고 있던 옷들을 벗었다. 다 벗고 나니 실크 잠옷만 남는다.
그 상태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하인스 백작이 눈을 뜨는 것 같다. 약속을 상기시키려 반지를 드러내 보였다.
“아, 좋다. 매일 백작님 품이 생각나서 어쩌죠?”
“끄으응……!”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내고는 카이로시아를 안았다.
그리곤 미처 자지 못한 잠을 잤다. 카이로시아 역시 금방 잠이 들었는지 규칙적으로 고른 숨을 쉬고 있다.
무엇이든 처음 한 번이 어려운 법이다. 카이로시아는 오늘도 편하고 깊은 숙면을 취했다.
“대답을 주기 전까진 여길 떠나지 못하실 거예요.”
“휴우, 아마도……! 그렇겠지?”
“저라도 그럴 거예요. 이제 어떻게 하시려구요?”
잠에서 깨어난 카이로시아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 물론 로니안 자작 부부가 다녀간 이야기이다.
로잘린을 놀려먹자던 제안을 후회했다. 밤새 뜻밖의 전개가 이루어진 때문이다.
9장 빈 소주병의 값
“로시아의 생각은 어때?”
“정말 반려를 얻기 위한 여행이었나요?”
“물론, 그런 목적도 있지.”
현수는 아드리안 공국 이야길 아직은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로니안 자작가에서 했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는 코리아 제국의 백작이 시종도 없이 아르센 대륙을 돌아다니는 것을 설명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자작부인의 말씀대로 백작은 다섯 명의 처를 둘 수 있어요. 그중 한 자리를 비워주지 않으시면 백작님 명예에 손상이 갈 듯하네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아르센 대륙의 귀족들에겐 오래전부터 계승되고 있는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다.
남작은 오로지 한 명의 처만 둘 수 있다.
자작은 세 명의 아내까지 얻을 수 있다.
로니안 자작은 부인인 세실리아 자작부인을 너무 사랑하여 다른 처를 두지 않는 아주 특별한 케이스라고 한다.
대륙 전체에서 딱 한 명의 처만 둔 유일한 자작일 것이라 하니 얼마나 특별한 경우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이 백작이다. 다섯 명의 처를 가질 수 있다.
후작이 되면 일곱 명을, 공작은 아홉 명까지 둘 수 있다.
대공 이상은 이러한 제한이 없다.
국왕은 의무적으로 네 명의 왕비를 두어야 한다.
물론 이게 최소이다. 능력만 된다면 얼마든지 더 많은 왕비를 거느려도 된다.
제국에는 제1황후부터 7황후까지 일곱 명의 황후 자리가 있다. 이 자리 역시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
귀족은 물론이고 왕가와 황가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많은 처를 둘 수 있게 허용하는 이유는 보다 나은 후손으로 하여금 가문을 잇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아르센 대륙은 남녀의 성비가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잦은 전쟁과 몬스터의 습격 때문에 남자의 수가 여자보다 훨씬 적기에 일부다처제가 관습화 된 것이다.
따라서 아르센 대륙엔 장자 계승의 원칙이란 게 없다. 다시 말해 능력있는 자가 가문을 잇는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딸이 가문을 잇는 경우까지 있다. 이렇게 가문을 이은 딸은 결혼을 하더라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다.
다시 말해 데릴사위를 얻는다는 것이다.
현수가 가려는 아드리안 공국 역시 아르센 대륙의 국가이다. 따라서 이런 규칙이 적용되고 있다고 한다.
“으으음……!”
“백작님, 로잘린 영애는 순진하지만 착하고 열정적이에요. 그냥 마음 정하시는 편이 좋을 듯하네요.”
“로시아의 아버님도 백작이시잖아.”
“네.”
“몇 분의 부인을 두셨지?”
“현재로선 세 분이에요. 제 어머닌 일찍 돌아가셨고, 그보다 먼저 결혼했던 부인도 돌아가셨으니까요.”
한때 다섯 명이란 숫자가 채워졌었다는 이야기이다.
“혹시 부인 이외의 여인들도 계시나?”
“아마도……. 워낙 정열적인 분이시라 곳곳에 인연을 맺은 분들이 계실 거예요.”
“으음! 그렇군.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 로시아는 내가 다섯이라는 자리를 모두 채운다면 어떻게 생각할 거야?”
카이로시아는 현수가 내심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저에 대한 사랑만 식지 않는다면 모두와 잘 지낼 수 있어요, 저는……!”
“알았어. 그리고 고마워.”
로잘린으로 하여금 정신적 충격을 받게 한 것은 분명 의도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가 그러하다. 현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로잘린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현수는 아침 식사 후 영주성을 찾았다.
로니안 자작과 세실리아 부인은 어제 일을 잊었다는 듯 밝은 미소로 환대했다.
로잘린은 하인스 상점으로 출근해서 자리에 없었다.
현수는 정중히 어제의 일을 사과했다. 그리곤 당장은 아니지만 로잘린을 아내로 맞아들이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증표로 카이로시아에게 주었던 것과 유사한 반지 하나를 건넸다. 안쪽에 음각으로 글귀를 파놓은 것이다.
Lady Rozalrin ♡ Count Hains Merlin.
세실리아 자작부인은 환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현수는 적지 않은 물건을 꺼냈다.
아이오페 레티놀! 주름 케어 No.1이라 선전하는 제품이다.
BB크림! 정식 명칭은 블레미시 밤(Blemish Balm)이다.
피부과 치료 후 피부 재생 및 보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잡티를 가려주고 피부톤을 정리해 준다.
아모레 퍼시픽 라네즈 스노우 크리스탈 립스틱은 빨강과 분홍 등 열두 가지 색을 내놓았다.
쥬단학 템테이션 셀 코엔자임 Q10 스킨케어 3종 세트!
스킨 토너, 에멀전, 그리고 크림으로 이루어진 제품이다.
또한 한국화장품의 아이브로우 펜슬, 파인 블랙 마스카라, 픽스 아이라이너가 선사되었다.
테메테르 7종 향수 세트 역시 선을 보였다.
세실리아 자작부인은 새로운 물건이 꺼내지고, 사용법과 효능을 들을 때마다 눈빛을 반짝이며 감탄하고 좋아했다.
술을 좋아한다는 로니안 자작에겐 소주 300병, 위스키 100병, 보드카 100병을 선사했다.
당연히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물론 너무 좋아서 웃느라 그런 것이다.
현수에겐 아무것도 아닌 소주병조차 이곳에선 보석으로 대접받는 유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전에 마셨던 사과 주스 병 아홉 개가 현재 자작의 보물창고에 보관되고 있을 정도이다.
소주병은 에메랄드빛을 내는 유리인지라 공병을 내다 팔아도 고가가 될 것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모든 병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다는 것이다. 이곳에선 그렇게 만들 기술이 없다.
따라서 빈 병만으로도 한 밑천 잡을 수 있다.
실제로 로니안 자작은 동료 귀족들을 청해 파티를 연다. 남몰래 사위를 얻은 기쁜 마음이 들어서이다.
하여 인근 영지의 귀족까지 아홉 명을 초청했으니 로니안 자작을 포함하여 열 명이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 자리에서 소주 30병이 빈 병이 된다. 물론 소주의 기가 막힌 맛에 귀족들의 눈은 휘둥그레진다. 목 넘김도 부드럽고, 뒤끝도 일품이다.
당연히 어디서 났느냐는 물음이 쇄도한다. 하지만 로니안은 말해줄 수 없는 비밀이라고만 했다.
다음 날, 술에서 깬 귀족들은 너무도 귀해 보이는 빈 병을 팔라는 요구를 한다.
그래서 로니안 자작은 공병을 팔게 된다.
구매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 결국엔 경매가 개최되었고, 귀족가에서 보낸 시종장들간의 대화가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이건 에메랄드를 깎아 만든 것이 아닌가! 대체 얼마나 큰 덩이를 깎아 이렇게 만든 걸까?”